# 다른 콤비 - 자의의 진가 - 잔소리

 

개수대나 세면대가 막히면 아주 지저분한 일을 치뤄야 한다. 작은 구멍 하나 막혔을 뿐이지만, 상황은 최악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타고난 욕구를 억지로 막았을 때의 폐해는 엄청나다. 개수대에 물이 빠져나갈 길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개수대를 통째로 바꾸지 않는 한 물길을 다른 쪽으로 돌릴 수 없는 것처럼, 사람도 나고 자라면서 발달하는 욕구가 굳어진다. 따라서 다른 조건이 모두 만족할 만한 수준이어도, 본인이 진정으로 바라는 바가 충족되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 없다. 다른 보상이 타고난 욕구를 대신할 수도, 잠재울 수도 없다는 얘기다. 욕구를 방치하거나 해소하지 못하게 잔소리를 해 대는 건, 개수대의 물구멍을 막는 꼴이다.

 

우리도 부부싸움을 밥 먹듯 하던 때가 있었다. 부부싸움이라기보다는 사실 나 혼자만의 분풀이였다. 결혼한 지 6개월 만에 일을 그만두고 1년을 쉰 후, 다시 같은 회사에 재입사했을 때의 일이다. 1년간의 휴식이 효력을 잃어 갈 때쯤,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심하게 화를 내거나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불안증 환자처럼 바퀴벌레 하나 봤다고 집을 뛰쳐나와 밤새 차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당시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한창 하루 12시간씩 주 6일 근무에, 왕복 3시간을 통근하던 때라 생각해 볼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다. 한마디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일을 그만두고 나서야 알았다. 문제는 일이었다. 내가 원하는, 내 강점을 살릴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겉으로는 입에 발린 소리로 다른 사람과의 친근감을 유지하면서, 결국에는 매출액 올리는 게 목적인 일이 성에 차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만족할 수 있는 순간은 상대가 최대한 잘 활용할 수 있는 옷, 신체적인 결점을 보완해 줄 수 있는 옷, 용도에 맞는 옷 등을 정확히 집어내서 만족스러운 쇼핑을 할 수 있도록 도울 때다. 가능하면 적은 돈으로 흡족한 상품을 구매할 수 있도록 전문적인 지식을 동원할 때다. 이것이 내가 의류 매장에서 발휘할 수 있는 강점이자 채우고픈 욕구였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진심이 아니면 허튼소릴 하지 않는 것.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사다. 내가 강점을 있는 대로 발휘하면, 회사의 1차적인 목적을 그르친다. 두 개를 놓고 고민할 땐 비싼 쪽으로 유도해야 하고, 충동구매라며 살지 말지를 망설일 땐 온갖 미사여구로 상대를 부추겨야 한다. 나가고 나면 욕을 퍼붓더라도 앞에선 웃으며 비위를 맞춰야 하고, 썩 어울리지 않아도 예쁘다는 말을 연발해야 한다. 그게 회사가 원하는 인재다.

 

회사가 원하는 업무 방식은 내가 추구하는 방향과 영 딴판이었다. 당연히 내 방식을 고집할 순 없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뿐이다. 원하는 바가 나와 일치하는 다른 회사를 찾아보거나, 어떻게든 회사가 원하는 방식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당분간은 회사의 방식에 따르기로 했다. 그때가 바로 시한폭탄이 따로 없을 때다. 사소한 일에 속을 부글부글 끓이던 때다. 한동안은 버틸 수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결정을 바꿔야 한다는 걸 직감했다. 결과마저 신통칠 않았던 것이다. 회사가 추구하는 목적을 위해, 일할 때만큼은 내 가치관을 버리고 공공연한 회사의 방침을 따랐다. 그러는 사이 몸과 맘은 만신창이가 됐다. 그런데 결과는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낭패 중의 낭패였다. 보람도 느끼지 못하고, 다른 동료들은 하지 않아도 될 생고생까지 해 가며 일을 계속할 이유는 없어 보였다. 두 가지 길에서 남은 길은 하나다. 다른 일을 찾아보기로 했다.

 

덜 예쁜 걸 아주 예쁘다고 말해 주기가 그렇게 어렵냐며,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내 물구멍이다. 솔직하지 않으면, 특히 내 물질적인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늘어놓으면 그것만큼 불편한 일이 없다. 매출액이 늘어도, 연봉이 올라도, 상대에게 진심만을 전하고픈 욕구는 채워지질 않는다. 자기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만족감을 느끼는 분야가 아니면, 아무리 큰 보상이 주어져도 대신해서 욕구를 메꾸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내 강점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업무도 있었다. 직급 구분 없이 거의 모든 일을 함께하는 회사였기 때문에, 시간이 흘러도 계속해서 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문제는 인사나 연봉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일종의 곁가지 업무라는 것이었다.

 

내가 잘하는 일은 사소한 것, 못하는 일은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회사를 다니는 건 고역이다. 내 일상은 물론 가족의 일상까지 망쳐 버린다. 채우지 못한 욕구 탓이다. 물길이 막히면 물만 고이는 게 아니다. 물길을 막고 있던 온갖 찌꺼기가 같이 올라온다. 욕구를 강제로 억눌러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온갖 추한 꼴을 보일 수밖에 없다. 추한 것을 걷어낸다고 일이 해결되진 않는다. 성향에 따른 욕구는 그 욕구를 채우는 것으로, 그 물구멍을 뚫는 것으로 해결을 봐야 한다. 내 경우, 마음가짐을 차분하고 너그럽게 가지려고 애쓰는 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었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효과가 없었을 게 분명했다. 문제의 핵심에 접근해야 했다. 일을 그만두고 원하는 길을 택했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폭탄이 양으로 변신했다. 내 본래의 가치관대로 살다 보니, 스스로는 물론 주변 사람들까지 편하게 하는 긍정적인 인간으로 거듭났다.

 

상대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거나 뭔가 불안해 보이는 등 둘 모두에게 부정적인 문젯거리가 있다면, 상대를 탓하기 전에 그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이유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이유는 과거나 현재 중에 반드시 존재한다. 이유를 알아내는 게 문제 해결의 첫걸음이다. 퇴직을 나 못지 않게, 아니 나보다 더 반기는 건 남편이었다. 지금도 가끔 얘기한다. 그때 그만두기를 정말 잘한 것 같다고, 정말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다시는 의류 매장 같은 데 취직할 생각 말라고. 벤츠 아니면 안 탄다는, 말도 안 되는 허세를 부리는 놈이다. 물론 장난 섞인 말이지만, 내 경제력으로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을 거란 생각에서 한 결혼이었다. 당연히 벤츠든 뭐든 다 사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하지만 그는 내가 그때처럼 예민한 사람으로 돌아간다면 벤츠도 마다하겠단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그런 소릴 다 할까 싶다. 부부의 문제는 내 문제 니 문제가 따로 없다. 한 사람의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설령 상대방이 안고 있는 문제라고 해도 괴로운 건 그 사람만이 아니다. 같이 적극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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