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생각 - 개똥철학 - 갑과 을
올해 한 식품업체의 영업 방식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갑과 을에 대한 논란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많은 이들이 강자와 약자 간에 벌어지는 불미스런 일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이후 갑의 횡포와 을의 피해를 상징하는 사례들이 잇따라 언론에 공개됐고, 이를 접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약자의 눈물에 공감하며 강자의 횡포에 치를 떨었다. 물론 안타깝고 괘씸한 노릇이다. 하지만 언론의 숱한 고발, 국민의 뜨거운 호응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오늘은 어제와 똑같이 씁쓸하기만 하다.
을인 것도 억울한데, 갑이 쥐고 흔드는 난장판이라고 해서 오늘의 행복까지 포기하고 주저앉을 순 없다. 그들이 재산을 불리기 위해 머리 터지게 고민하는 동안, 우린 한껏 행복을 누리는 게 상책이다. 비결은 스스로가 을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사실 두 개인이나 집단 간의 관계를 갑, 을로 구분하는 건 양쪽 모두에게 득이 될 게 없다. 갑과 을로 나누는 순간 갑의 횡포와 을의 설움이 시작된다. 영원한 갑을도, 명백한 갑을도 없다. 관계 및 입장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보통 입사 면접이라고 하면 자신이 시험대에 오르는 상황이라 생각한다. 때문에 상대에게 최대한 잘 보이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면접관의 눈에 들기 위해서라면 평소 생각도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바꾸어 말하고, 신념이나 신조를 지어내기도 한다. 상대는 갑, 본인은 을이라는 생각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어서다. 사전에 해당 기업의 모토, 문화, 체계, 근무 조건, 본인이 맡게 될 업무, 현장 분위기 등에 대해 꼼꼼히 알아봤고, 그 결과 본인에게 둘도 없는 직장이 될 거란 생각이 확고하다면 갑을 관계가 성립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대략적으로 알고 있는 게 전부다. 그렇다면 거꾸로 내가 갑, 상대가 을일 수 있다.
면접은 회사가 개인에 대해 알아보는 자리일 뿐 아니라, 개인이 회사를 방문하고 면접관을 만나 봄으로써 다닐 만한 곳인지를 가늠하는 자리다. 면접관의 말투와 가치관, 직원들 간의 분위기, 업무 환경 등을 잠시나마 경험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상대는 서류상으로 일단 나를 합격시켰다. 자격이 있다고 판단했고 호감을 가졌기 때문에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다. 물론 나도 회사의 기본적인 조건이 마음에 들어 지원했다. 결국 상하, 갑을 따위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같은 입장인 셈이다.
질문은 주로 그쪽에서 한다. 그러다 마지막에 궁금한 점이 있는지를 물어 온다. 이 절호의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 대개 예상되는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만을 준비해 가는데, 본인이 묻고 싶은 항목도 미리 생각해 둘 필요가 있다. 똑같이 상대가 우리 직원, 내 직장으로 적합한지를 알아보기 위해 만난 자리인 만큼, 나에게도 직장이 실제 어떤 곳인지 물어볼 권리가 있다. 회사 홈페이지나 구인란에는 언급돼 있지 않지만, 내가 입사 여부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사항이 있을 수 있다. 근무 복장이나 회식 빈도, 출장 여부 등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에 대해선 확실히 해 둬야 뒤탈이 없다.
막상 직접 가 보고 사람들을 만나 보니 꿈에 그리던 직장이란 생각이 든다고 치자. 그때도 마찬가지다. 본인에게 중요한 내용을 반드시 확인하고, 본인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전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조건 입사하고 보자'는 생각이 얼마 지나지 않아 '일단 그만두고 보자'는 생각으로 바뀔지 모른다. 면접은 과정에 불과하다. 목적은 유쾌한 직장 생활에 있다. 당장의 구직에 눈이 멀어 자신의 사고방식을 다르게 꾸며 대는 건 생고생을 사서 하는 일이다.
물론 추가로 질문한 내용이나 분명하게 밝힌 본인의 주관 때문에 불합격 신세가 될 수도 있다. 자주는 아니지만 종종 야근이 있을 수밖에 없는 업계에서 야근이 잦은지를 물으면, 야근 때마다 애를 먹이겠구나 싶어 당장에 후보에서 제외 당한다. 팀워크가 무엇보다 중요한 부서에서 신입 사원 지원자가 팔로우십(followship)보다 리더십이 더 강하다고 답한다? 원하는 인재가 아니라는 낙인이 찍힌다. 하지만 전혀 낙심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잘된 일이다. 거의 매일 반복되는 야근. 거슬리는 정도가 아니라 직장 생활을 지속할 수 없을 만큼 탐탁지 않다면, 차라리 면접 때 확인하는 게 낫다. 면접관이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매우 바람직한 질문이다.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빠져나갈 궁리만 하는 꼴을 안 봐도 되게끔 하는, 회사에 대한 일종의 배려다. 생각보다 잦은 야근에 '이걸 계속 다녀야 돼, 말아야 돼?' 하며 밤낮 고민하는 불상사도 막을 수 있다. 맡은 작업에 대한 신념이 확고하고 일을 추진력 있게 진행시키지 않으면 참지 못하는 사람이 상대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팔로우십이 더 뛰어나다고 대답한다? 본인과 회사 둘 다 잘못된 선택을 하도록 부추기는 꼴이다. 같이 죽잔 얘기다.
여기 아니어도 갈 데 많다는 식의 어설픈 객기를 부리라는 얘기가 아니다. 개념 없이 지껄여서도 안 된다. 진심과 허영은 엄연히 다르다. 듣는 사람도 이를 모를 리 없다. 합격 여부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아닌, 그저 잘된 일일 뿐이다. 합격했다면 나와 잘 맞는 회사를 만났으니까 잘된 일이고, 떨어졌다면 나와 맞지 않는 회사에 아까운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게 됐으니 잘된 일이다. 지레 상대와 나를 갑과 을로 나눠 갑에게 선택 받기 위해 용쓰는 애처로운 을을 자처할 필요가 없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이는 게 최선이다. 진솔한 답변과 명쾌한 질문은 그들이 찾던 지원자가 아니더라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확실한 인상을 남길 수 있다. 실제 경험담이다. 지원했던 회사에서는 불합격 통보를 받았지만 당시 면접관의 소개로 다른 회사에 면접 볼 기회를 얻은 적이 있다.
면접은 유쾌하고 보람찬 직장 생활이 가능한지를 검증하는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몇 분간의 짧은 대화로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지만, 최대한 적중률을 높이고자 한다면 평소 본인의 생각을 확실히 정립해 둘 필요가 있다. 예상 질문 따위를 찾아 인터넷을 헤매는 것보다 더 좋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근무 조건이나 기업 여건에서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직장 생활에서 내가 얻고자 하는 것, 내가 잘하는 것, 흥미를 느끼는 분야, 능률이 오르는 작업 환경, 가치 있는 삶에 대한 기준 등 그 우선순위까지 구체적으로 목록으로 만들어 두면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일을 하게 될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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