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생각 - 개똥철학 - 사랑과 우정

 

사랑과 우정도 키스와 뽀뽀처럼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리 생각할 수 있다. 감정의 뜨거운 정도를 기준으로 삼으면 사랑은 우정보다 한 단계 높은 수준이다. 하지만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 부작용을 감안하고 본다면 우정이 오히려 고차원적이라 할 수 있다. 사랑의 부작용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배려보다는 욕심이 앞선다는 것이다. 남녀 간의 사랑,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 모두 마찬가지다.

 

퇴근 후 친구와 영화를 보러 가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몇 시간을 남겨 두고 전화가 걸려 왔다. 얼마 전 소개팅에서 만난 이성에게서 데이트 신청을 받았다며, 약속을 취소해도 괜찮겠냐고 묻는다. 대부분 친한 친구 사이일수록 흔쾌히 보내 준다. 친구가 기뻐하는 일을 돕지는 못할망정 방해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연인 사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남자친구가 약속 시간을 얼마 앞두고 친구에게 일이 생겨 약속을 다음날로 미뤄도 괜찮겠냐고 물으면 당장에 따지고 든다. "친구가 중요해, 내가 중요해?" 배려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부모가 자식을 위하는 마음은 당연히 친구 간의 우정에 비할 수 없을 만큼 크고 깊다. 이를 알기에 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있다. 아들놈은 비가 오는 날이면 우산 하나씩 잃어버리는 게 이제 거의 공식이 돼 버렸다. 쪼끄만 게 왜 그리 깜빡깜빡하는지, 덜렁대기로 치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것이다. 잃어버리지 않게 가방에 넣을 수 있는 삼단 우산도 줘 보고, 눈에 잘 띄는 장우산도 줘 봤지만 소용이 없다.  매번 주의를 주는데도 절대 고쳐지질 않는다. 조금만 신경 쓰면 될 일을 부주의로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게 부모로서 도저히 용납이 안 된다. 이번에도 잃어버리고 들어오면 눈물이 찔끔 날 만큼 혼쭐을 내 주리라 마음먹는다.

 

친구 김 군이 오늘도 우산을 잃어버렸다. 버스에 두고 내린 것이다. 계속 비가 쏟아졌다면, 좀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잃어버리지 않았겠지만 버스는 이미 떠났다. 김 군은 비오는 날마다 우산 때문에 집에서 잔소리를 듣는다며 툴툴댄다. 다행히 비는 멈춘 상태. 내 우산을 들려 보내거나, 그것마저 잔소리를 들을 성 싶으면 그가 가지고 있던 것과 비슷한 우산을 하나 사 주기로 마음먹는다. '왜 그랬니?', '신경 좀 쓰지!' 하는 등의 쓸데없는 잔소리는 하지 않는다. 분명 김 군을 더 사랑하는 건 친구인 내가 아닌 그의 부모다. 다 자식 잘되라고 하는 잔소리라지만, 호되게 야단쳐서 우산 좀 덜 잃어버린다고 김 군의 미래가 얼마나 어떻게 더 밝아지다는 건지 묻고 싶다. 한 번 사 주고 말면 그만인 친구, 계속해서 우산을 사들여야 하는 부모. 둘의 금전적인 입장 차이 때문이라고 하기엔 잔소리의 이유가 너무 사소할 뿐 아니라, 사랑이란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어 더욱 못마땅하다.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가 이직을 원한다. 대학에서 경영을 전공한 그녀는 현재 많은 사람들이 1등 신부감이라 여기는 은행원으로 5년 넘게 일하고 있다. 그간의 경력이 아깝지도 않은지 전혀 관련이 없는 영화 일을 해 보고 싶단다. 날벼락이 따로 없다. 말이 이직이지 퇴직이나 다름없다. 영화를 좋아한다는 건 알았지만 직접 뛰어들 정도인 줄은 몰랐다. 나는 뒤통수를 맞은 듯 정신이 멍하기만 한데, 그녀는 한껏 들떠 있다. 나 몰래 응모한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본선 진출작으로 뽑혔다는 것이다. 둘의 직업 덕분에 안정적인 생활이 가능할 거라 생각했고, 그래서 결혼에 대한 결심을 굳힐 수 있었다. 물론 그녀를 사랑한다. 결혼을 취소할 순 없다. 너무나 사랑하니까. 대신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해 그녀를 단념시키기로 한다. 지금의 직장에서 얻을 수 있는 이점, 영화에 뛰어들어 실패할 가능성을 차근차근 설명하고 설득하기 시작한다.

 

나는 오래 전부터 영화에 관심이 많았다. 배우, 시나리오 작가, 감독, 조명, 음악 등 영화를 만드는 모든 사람들, 모든 영역이 흥밋거리다. 하지만 연극영화과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있는 취미이자 관심 분야라고 여겼을 뿐이다. 영화업계는 딴 세상 사람들 얘기라고 생각했다. 무난한 경영학과를 택했다. 운 좋게 은행에 취직이 됐다. 해가 갈수록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 중이다. 일에서 느끼지 못하는 재미를 여가 시간에 영화를 보고 글을 쓰며 달랬다. 관심 가는 작품의 시나리오를 구해 읽어 보다가 공모전에 대해 알게 됐고, 당연히 안 되겠지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글을 보냈다. 생각지도 않게 본선에 올랐다는 연락을 받았다. 갑자기 억누르고 있던 영화 일에 대한 욕구가 솟구쳤다. 희미하게나마 가능성도 있어 보였다. 일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싶어졌다.

 

남자친구에게 사정을 털어놨다. 축하해 줄 거란 기대는 나만의 착각이었다. 안색이 안 좋다. 결론은 마음을 접으라는 얘기. 다음날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하늘이 주신 기회라며 내 재능을 칭찬하기 바쁘다. 공모전의 경쟁률이 얼마나 높은지 아냐며 호들갑이다. 부모가 반대해도 밀어부쳐야 할 판에, 남편도 아닌 남자친구 때문에 꿈을 포기하는 건 현명하지 못한 처사라고 말한다. 그와 결혼하기로 약속한 마당에 평생 그를 원망하며 살 게 될지도 모른다고 충고한다. 무엇보다 결정은 내 몫이라고 말해 준다. 고민은 내일부터, 오늘은 일단 당선의 기쁨을 누리자며 자기가 더 신이 났다.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일단 축하해 주고 함께 기뻐해 주는 친구와 떨떠름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남자친구. 나를 생각하는 마음은 남자친구 쪽이 훨씬 더 끔찍하다는 걸 알지만,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내 일을 자기 일처럼 생각하는 쪽은 이 친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상대에게 참 많은 걸 요구하고 기대한다. '사랑하니까', '너를 위해서'라는 말만 붙이면 매도 사랑의 매 또는 사랑의 손길로 둔갑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사랑만큼 이기적인 것도 없다. 상대가 아무리 피곤해도 사랑하기 때문에 밖으로 불러내고, 맛없는 반찬도 사랑하기 때문에 먹으라고 강요한다. 엄밀히 따지면 그놈의 '사랑하기 때문에'는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니가 피곤하다고 해도 나는 지금 너와의 데이트를 원해. 그러니 나와. 사랑해. 보고 싶어." "맛없어도 먹어야 돼. 그래야 니가 건강하고, 또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하거든." 결국 다 자기 좋자고 하는 짓이다. 해서 나는 외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여, 이를 인정하라!

 

 

자상하고 성실하고 능력 있는 남편, 애교 많고 가정적이고 말 잘 듣는 아내. 둘은 누가 봐도 이상적인 커플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둘의 감정은 꼭 그 부분에서 상한다. 열 번 기념일을 챙기다 한 번 깜빡했는데 그걸 가지고 트집을 잡고, 여태껏 월급 통장에 손 한 번 대 본 적 없는데 한 달 월급 액수 정도 사기 당한 걸 가지고 잡아먹을 듯이 몰아세운다. 365일 외출 한 번 않고 살림에 충실했는데 오랜만에 늦게 들어갔더니 대번에 언성을 높이고, 매번 남편 뜻에 따르다가 처음으로 강한 의지를 내비쳤더니 변했다며 문제가 뭐냐고 따지고 든다. 자상한 성격 때문에 더 사랑하는 거라면 평소의 자상함을 고맙게 생각하되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당연히 언제나 자상한 사람'이란 생각은 본인만의 착각이자,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다분한 헛된 기대일 뿐이다.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상대방에 대한 기대가 가능성이나 희망처럼 그의 긍정적인 측면을 부추기고 있는지, 아니면 순전히 내 욕심으로 그의 부정적인 측면을 부추기기만 하는지.

 

우리나라 부모들은 자식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아니, 자식의 진로에 대한 집착이 남다르다.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삶, 직업에 대한 사회적 인식, 배우자로서의 등급 등에 있어서 진로가 1차적인 기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기본적으로는 자식에 대한 사랑이 깔려 있다. 좋은 대학을 나오면 직업 선택의 폭이 넒어진다는 이유로 자식 교육에 매달린다. 다 자식이 편안하고 윤택한 삶을 살기를 바래서다. 하지만 입학시험 결과 전국 상위 1%에 든 자식이 의사가 아닌 간호사가 되기를 희망한다거나 신학 대학에 진학해 종교 활동을 하고 싶어 한다면 뜯어말리지 않을 부모는 거의 없다. 좋은 대학을 나와서 보다 많은 선택의 기회를 갖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지만 그야말로 말뿐이었던 셈이다. 진짜 원했던 건 자식의 성공으로 그간의 고생을 심적으로 보상 받고, 어디 내놔도 꿀리지 않는 성공한 자식을 지켜보며 만족감을 얻고 싶었던 것이다. 부모의 사랑은 너무도 커서, 간혹 이렇게 자기 욕심 채우는 일에 사랑을 갖다 붙여도 끔찍한 사랑 혹은 헌신으로 둔갑하곤 한다.

 

연인이나 부모 자식 사이에서 사랑하는 마음이 이기적인 언행으로 이어지는 이유는 사랑을 소유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우정 어린 관계에서는 상대를 소유하려 들지 않는다. 남편과 내가 바람직한 부부 관계를 유지하고 시간이 갈수록 더 사이가 좋아지는 것도 사랑보다 우정에 가까운 감정으로 맺어진 덕분이다.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고 싶다고 할 때 그의 의사를 존중하고 지지했던 것, 우산을 잃어버려도 잔소리 한마디 하지 않는 것, 다른 친구 일로 나와의 약속을 못 지켜도 불평하지 않는 것, 모두 그를 내 소유물로 여기는 게 아니라 배려해 주고픈 친구로 여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집안의 평화를 위해, 관계 유지를 위해 억지로 참고 분을 삭이지 않는다. 그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반응한다. 그는 내 소유물이 아니다. 아무리 사랑해도 상대를 제멋대로 조종할 권리는 없다. 그는 그일 뿐이다. 같은 생각은 공유하고 다른 생각은 그 자체로 존중한다. 둘 다 재미를 느끼는 일은 함께 즐기고, 서로가 다른 걸 원할 땐 각자 즐긴다. 우정으로 뭉친 부부가 사랑으로 뜨거운 부부보다 행복할 수 있는 이유다.

 

 

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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