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생각 - 섭리교 - 우주의 섭리

 

작년에 있었던 일이다. 남편이 전에 같이 일하던 사람에게서 제안을 받았다. 새로운 매장을 오픈하는데 그곳 조리실장을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연봉이나 출퇴근 조건, 매장의 위치 등 남편 입장에서는 꽤 만족할 만한 제안이었다. 오픈을 며칠 앞두고 사장 및 함께 일할 다른 직원들과의 인사차 약속이 잡혔다. 낮부터 식사에 술을 곁들이다가 10시간이 훌쩍 지났다. 10시쯤 전화가 왔다. 경찰서였다. 매장은 분당, 약속도 분당이었는데 생뚱맞게도 동대문 경찰서였다. 지하철과 택시를 번갈아 타고 2시간 만에 도착했다.

 

경찰인지 깡패인지, 누운 건지 앉은 건지, 책상에 발을 올리고 TV를 보는 아저씨들 몇몇, 저쪽에 수갑을 차고 앉아 있는 남편, 그리고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는 남편이 답답한 듯 어르고 달래며 컴퓨터를 두들겨 대는 아저씨 한 분, 길거리 호객꾼처럼 무슨 일이냐며 수첩과 펜을 들이대는 기자. 그야말로 영화가 따로 없었다. 조서 작성이 끝날 때까지 밖에서 얌전히 기다리라기에 남편에겐 말도 못 붙이고 돌아 나왔다. 난생 처음 경찰서 대기실을 이용해 본 역사적인 날이었다. 남편은 더 큰 역사를 썼다. 이래 봬도 수갑까지 차 본 놈이다!

 

사건은 이랬다. 분당에서 만난 네 남자는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지면서 술김에 발동이 걸렸다. 2차로 맛집을 찾아 동대문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기분 좋게 먹고 마시던 중 남편은 주량을 초과했고 첫 대면인 한 연장자, 사장의 친구에게 실수를 저질렀다. 분위기는 엉망이 됐고 사장은 남편을 택시에 태웠다. 집에 곱게 왔으면 더 좋았겠지만 남편은 중간에 내려서 주차돼 있는 고급 승용차를 100미터쯤 몰았다. 주인이 이를 발견하고 뒤쫓아 신호에 걸려 멈춰 서 있는 남편을 제지했고, 그의 신고로 경찰서까지 오게 된 것이다. 단순 음주운전이 아닌 특수 절도죄에 해당하기 때문에 수갑까지 채웠다는 게 결찰의 설명이었다.

 

남편이 분위기를 흐린 그 순간, 당연히 일은 빠그라지고 말았다. 첫 출근 보름 전, 전에 하던 일은 이미 그만둔 상태였다. 운 좋게 얻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한껏 기대를 품고 있었는데 한순간에 일을 망쳐 버린 것이다. 면허는 당연히 취소. 남은 거라곤 500만 원이라는 거액의 벌금뿐이었다. 500 30 사는 우리에게, 모아 놓은 돈이라곤 땡전 한 푼 없는 우리에게, 500만 원이란 참으로 부담스러운 금액이다. 게다가 경찰은 차 주인이 연락하면 일정선에서 합의를 보라고 했다. 합의금으로 얼마를 부를지는 오리무중. 조서 확인, 본인 서명, 보호자 서명 등 시키는 대로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도착한 지 두 시간이 지나서야 경찰서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놀람, 걱정, 안타까움, 속상함, 후회 등등 부정적인 감정을 모조리 느꼈던, 참 잊지 못할 날이다. 중요한 건 그 감정들이 채 몇 시간을 못 갔다는 것. 다음날 사건을 곱씹어 보니, 일이 그쯤에서 마무리된 게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신호를 제대로 못 봐서 앞차를 들이받았다거나 사람이라도 쳤으면 어쩔 뻔했나! 양쪽 사고 차량에 대한 수리비, 피해자에 대한 보상금, 남편 병원비.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더 안 좋아질 수 있었던 일이 그렇게 일단락되다니! 하늘이 도왔다는 생각이 부정적인 감정들을 밀어내고도 남았다.

 

만취 상태라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남편이 냅다 올라탄 차량은 꽤 고급이었다고 한다. 생전 타 본 적 없는 버튼식 시동에 스마트 키. 시름에 젖어 있어야 할 우리는 순간 빵 터졌다.

"어쩜 그렇게 취한 상태에서도 좋은 차를 알아보고 콕 집어 그 차를 타고 내달릴 수가 있어?"

"그러게."

"고급 승용차가 그렇게 타고 싶었어?"

". 그 차가 좀 마음에 들더라구!"

비난이 전혀 섞이지 않은 내 질문, 이를 유쾌하고 능청스럽게 받아치는 그의 반응이 한참을 웃게 만들었다.

 

나는 '꼭 돈 많이 벌어서 좋은 차를 사 주겠다'고 덧붙였다. 취중진담이라는 말에는 이견이 있지만 '취중오버'라는 말에는 동감이다. 평소 누르고 감춰 왔던 감정이나 욕구는 술이 들어가면 자제력이 풀려 솟구치기 마련이다. 당시 상황을 직접 목격한 것도 아니고 남편이 또렷이 기억하는 것도 아니라 확실친 않지만, 그가 평소 '고급 차'에 대한 욕심이 있다는 건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다. 다른 남자들처럼 차 자체에 대한 관심이 높다거나 스피드를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고급이 좋아서다. 이번 기회에 보다 확실해진 그의 고급 차량에 대한 선호도. 어서 빨리 제 차를 마련해 주고 싶은 마음은 당연히 진심이었다. 남편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내 부족한 능력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웬 허세냐며 그를 탓할 순 없다. 애초에 그렇게 생겨 먹은 놈이기 때문에 맘을 고쳐 먹으라고 닦달해 봤자 술 먹고 더 큰 사고만 일으킬 뿐이다. 다소간의 허세 덕분에 능청스런 대사도 들을 수 있고, 덕분에 안 좋은 일도 웃어넘길 수 있다. 167센티, 60킬로엔 지금의 마티즈가 제격이라며, SUV에선 뛰어내려야 한다며 놀려 먹을 수도 있다. 그는 끝까지 천연덕스럽게 맞받아친다. "나처럼 덩치 좀 있는 남자는 다 벤츠 SUV 같은 거 타고 그러는 거야." 동영상으로 보여 주지 못해 애석하다. 실제로 보면 진짜 배꼽을 잡는다.

 

유쾌한 얘기를 전하다 보니 갈피를 놓쳤다. 맞다. 하던 얘길 계속하자면, '그렇게 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그 난관에 부딪치고도 우린 그렇게 웃기 바빴다. 벌금은 다달이 나누어 갚아 얼마 전 청산했고, 합의금은 50만 원으로 마무리했다. 그 일이 액땜이 되었는지, 1년 반이란 시간 동안 우리에겐 별다른 사건 사고가 없었다. 남편이 현재 하고 있는 일도 그 사건 이후 꿰찬 자리다.  

 

 

회복 기간은 나보다 그가 더 오래 걸렸다. 나는 그날의 일을 한 번도 부정적으로 끄집어낸 적이 없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상황은 더한 비극으로 치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건의 장본인인 그는 입장이 달랐다. 내가 그에게 좋은 차를 사 주지 못해 안타깝듯, 그도 더 많은 걸 해 주지 못해 안타깝기는 마찬가지다. 그런 마당에 하루아침에 500을 날렸으니 입장 바꿔 생각하면 충분히 그 심정을 짐작할 수 있다. 덕분에 우리집엔 좋은 일이 더 있었다. 그가 알아서 술자리를 조심한다는 것이다.

 

보통 배우자가 술 먹고 사고를 치면, 무슨 약점이라도 잡은 것처럼 사사건건 그 일을 들먹거리고 술 약속이 있을 때마다 바가지를 긁어 댄다. 정말 쓸데없는 짓이다. 바가지는 오히려 부작용만 낳을 뿐이다. 아무 말 않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옆에서 아무리 부추겨도 당사자는 제 스스로를 자책하며 궁지에 몰아넣는다. 그런 상대에게 작정하고 비뚤어지자는 객기를 불러일으키고 싶다면 얼마든지 긁어 대라, 바가지!

 

군대에 가면 십중팔구 효자가 되어 돌아온다. 외로이 홀로 유학길에 오르면 매일같이 먹던 집밥이 사무치게 그립다.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3개월이면 상황 종료다. 언제 그랬냐는 듯 또다시 말썽을 피우고 반찬 투정에 외식 타령이다. 예외는 없다. 나는 남편에게 예외를 기대하지 않는다. 한동안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조심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언제 또 비슷한 불상사를 빚을지 모른다. 의도적으로 저지른 잘못이 아닌 바에는 얼마든지 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란 얘기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찬가지다.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잊지 못한다면 같은 일은 반복되지 않겠지만, 크든 작든 한 번 실수한 사람은 평생을 자책하며 살아야 한다. 진정한 비극이다. 그런 점에서 이후 1년 반을 무탈하게 보냈다는 건 참 감사한 일이다.

 

그날의 그 사건 이후 우리 부부에겐 또 하나의 감사할 거리가 생겼다. 사소한 일로도 부부싸움을 밥 먹듯 하는 다른 부부들과 달리, 소위 대형 사고에도 전혀 관계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흔들리기는 커녕 언성조차 높이지 않는다. 사건만 놓고 보면 절대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사건은 이미 벌어진 과거사일 뿐 우리에게 별 의미는 없다. 중요한 건 오늘과 내일. 행복한 내일에 대한 기대와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이 더해진 '오늘'이다. 우리의 행복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건 지나간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을 통해 얻은 깨달음으로 오늘과 내일 더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나는 그 일에 대해 전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부부가 평소의 생각을 실생활에 어떻게 반영하는지, 그리고 그 생각이 우리를 어떻게 행복하게 만드는지 보여 주는 결정적인 사례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감사하다는 생각이다. 우리 둘은 상대가 어떤 실수를 저질러도 주어진 상황에서 이로운 점을 찾아 보다 행복해질 수 있다는 믿음이 더 커졌기 때문이다.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여전히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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