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려니 하기엔 너무도 기막힌 지경에 이른 우리 사회를 어쩌면 좋을까? 바꿀 순 있을까? 내가? 없다. 그럼 그냥 넘어갈까? 그럴 수도 없다. 그래서 내린 결론. 생각하자! 그럼 적어도 비뚤어진 쪽으로 맥없이 휩쓸리진 않을 테니까. 그리고 이야기하자, 생각하자고. 듣고, 읽고, 생각하고, 말하고, 그리고 중심을 잡자.

 

다음은 진중권의 <호모코레아니쿠스> 중 일부다.

 

주객전도 비상대책위원회 

 

인간 vs 기계 

 

기계론적 신체관은 근대라는 시대에 인간의 몸에 일어난 두 가지 변화를 예언한다. … 또 다른 변화는 경제적 성격의 것으로, 근대에 일어난 산업혁명과 관련이 있다. 기계가 생산의 주역이 되면서 인간의 신체를 기계의 운동에 적응시킬 필요가 생긴다. 기계가 인간의 신체를 돕는 게 아니라, 인간의 신체가 기계의 작동을 도와야 하는 것이다. 이로써 인간의 신체는 기계화된다. 이른바 '합리화'라는 이름으로 생산에 도입된 테일러시스템은 이 신체의 기계화의 이론적, 실천적 완성이다.

 

자발 vs 강제

 

인상적인 것은 신입사원들이 교육자의 지시에 따라 망가진 얼굴로 서로 고함을 지르는 장면. 제정신 가진 사람이라면 남들 보는 데서 그런 괴상한 짓을 하지는 않을 게다. 한마디로 독립적 개인의 격조와 품위를 망가뜨림으로써 그들을 집단으로 융합하겠다는 발상인 듯했다.

 

권력이 국가에서 시장으로 넘어가면서 과거에 국가에 바치던 공적 충성의 의무가 한국과 일본에서는 고스란히 회사에 대한 사적 충성으로 옮겨졌다.

 

자발적이면서도 강제적인 신체 만들기. 이는 한국 사회에 널리 퍼진 현상이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제 몸을 기업의 요구에 맞게 뜯어고친다. 언뜻 자발적인 것으로 보이나, '존재미학'은 실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강요한 '생존미학'일 뿐이다.

 

vs

 

비릴리오를 따라 속도를 두 종류로 구별하는 게 좋겠다. 하나는 신체가 정신없이 돌아가는 속도. 이를 '외연적 속도'라 부르기로 하자. 다른 하나는 발명, 발견, 개발, 디자인과 같은 창의성의 속도. 이를 '내포적 속도'라 부르자. 인간의 몸은 기계가 아니기에 신체를 가속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가속화의 특정한 단계에서 양적인 속도는 질적인 속도로, 외연적 속도는 내포적 속도로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빨리빨리' 문화는 한편으로 이 사회가 외연적 속도에서 내포적 속도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다른 한편으로는 이 사회가 인간을 배려하고 삶의 질을 고려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엄마들 비상대책위원회

 

원칙 vs

 

언젠가 독일 엄마들이 애들을 어떻게 가르치는지 볼 기회가 있었다. 전철의 문이 열리니 한 엄마가 형제로 보이는 두 꼬마를 데리고 들어선다. 큰 아이가 잽싸게 창가에 앉자, 그 자리에 앉고 싶었던 동생이 떼를 쓴다. 엄마가 당연히 '네가 형이니 동생에게 양보하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떼쓰는 작은 아이에게 "안 돼!"라고 잘라 말한 후 이렇게 덧붙인다. "왜냐하면 한 좌석에 동시에 두 사람이 앉을 수는 없기 때문이야."

 

습속이 형성되는 방식은 이렇게 다르다. 독일 문화에는 형과 동생, 나이 차에 따른 대우의 구별이 없다. 그 다음에는 안 된다고 잘라 말한 후 그 원칙을 끝까지 지키는 단호함이 있다. "왜냐하면 한 좌석에 동시에 두 사람이 앉을 수는 없기 때문이야." 어린 시절부터 습속이 수평적, 원칙적, 합리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반면 한국의 방식은 정감적이다. "네가 형이니까 양보해라." 당연히 형은 양보를 안 하려 할 테고, 억지로 자리를 빼앗아 동생을 앉혔다가는 이번엔 큰 애가 떼를 쓰기 시작한다. 결국 싸움은 누가 더 시끄럽게 떼를 써서 부모를 괴롭히느냐에 따라 결판이 나게 된다. 아이들은 이런 경험을 통해 제가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을 터득한다. '자극의 양을 남들이 견딜 수 없을 정도까지 극대화하라.' 성인들이 사회적 갈등을 푸는 방식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규칙 vs 특권

 

유럽의 아이들은 집에서도 규칙을 지켜야 한다. 텔레비전에서 어린이 방송이 끝날 때쯤이면, 아이들은 제 방으로 돌아가서 밖으로 나오면 안 된다. 제 방에서 무슨 짓을 해도 좋으나 방 밖으로 나와 타인, 즉 부모를 귀찮게 해서는 안 된다. 반면 한국의 아이들은 집에서 특별 대우를 받는다. 집 안에서 모든 규칙을 초월하는 특권을 누리던 아이들은 집 밖에서도 똑 같은 대접을 요구하게 된다. ... 떠드는 아이를 제지하다가는 부모로부터 '당신이 뭔데 우리 아이 기를 죽이느냐'는 항의를 받게 된다.

 

부모들은 제 아이가 사회에 나가 공공선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나 홀로 규칙을 초월하여 '떵떵거리기'를 바란다. 규칙을 따르는 것은 외려 '융통성 없는 것' 혹은 '무능한 것'으로 여겨진다. 어른이 따로 있나. 이렇게 사회로 나간 아이들은 '남을 배려하지 못한다'는 한국의 어른이 된다.

 

가르치자 vs 누르자

 

한국에 사교육이 횡행하는 것 역시 '우리 아이들 함께 잘 가르치자'가 아니라, '내 아이만 잘 가르쳐 다른 아이들을 누르자'는 생각 때문이다.

 

이 사회에서 이른바 출세한 이들은 규칙을 잘 지켜 그 지위에 오른 게 아니다. 외려 출세의 비결위법이나 탈법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여기에 한국 사회는 매우 관대하다. '유전무죄' 운운하며 이를 비난하는 국민들도, 다른 한편으로는 기회만 닿으면 자신도 그들처럼 되고 싶다는 은밀한 욕망을 드러낸다.

 

아우라 파괴 비상대책위원회

 

자유인 vs 대기조

 

독일인이 핸드폰 문화에 소극적인 것은, 그들 스스로 자조하는 '독일식 기술 적대성' 때문일 게다. 수십 년 묵은 낡은 도구를 그대로 사용하며 자랑스러워하는 게 독일인이다. 게다가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해서 도대체 자신이 24시간 도달 가능하다는 사실을 끔찍하게 여긴다. 그러니 돈 주고 핸드폰을 살 일이 없었던 것이다.

 

합리와 불합리 vs 승자와 패자

 

사형제도의 존폐를 둘러싼 논쟁이 불거졌을 때. … 독일 인터넷 게시판에서 … 어느 사형제 반대론자가 "누가 인간에게 다른 인간의 생명을 앗아갈 권리를 주었느냐?"고 말하자, 사형제 찬성론자가 이렇게 반박한다. "그럼 누가 인간에게 다른 인간의 인신을 구속할 권리를 주었느냐?" 비록 보수주의적 입장에서 나온 반론이지만 상당히 예리하고 논리적이다.

 

한국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사형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인터넷에 올리자. "네 딸이 유영철에게 당해도 똑같은 얘기를 하겠냐?", "끓는 기름에 튀겨야 한다." 등등.

 

개인주의가 강한 서구에서는 서로 논쟁을 벌이다가 견해차가 좁혀지지 않으면 "유감이네요"하고 논쟁을 멈춘다. 하지만 모든 성원이 가치관을 공유하는 공동체 정서에 익숙한 한국인에게 견해의 차이는 참을 수 없는 것. 그 차이를 없앨 때까지 한국인은 가망 없는 논쟁을 집요하게 이어간다. 사안의 해결보다 중요한 것이 승부를 통해 결정되는 명예의 감정. 여기서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은 죽기보다 싫은 일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논쟁이 합리적이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너훈아 vs 나훈아 짝퉁 너훈아

 

채플린 흉내 내기 대회에 채플린 본인이 참가하여 4등을 했다는 얘기가 있다. 그러니까 원본보다 더 원본 같은 짝퉁이 위로 세 명이 있었다는 얘기. … 하지만 다른 길이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짝퉁 너훈아가 원본 나훈아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수준을 넘어, 아예 나훈아 스타일의 신곡을 만들어 발표하는 것이다. 잘만 하면 나훈아보다 더 나훈아다운 노래가 나올 수도 있다. 이때 짝퉁 너훈아는 원본 나훈아의 궤적에서 벗어나 제 자신의 삶의 궤도를 따라 달리게 된다. 이렇게 복제가 원본에서 독립하여 제 길을 가는 것, 이것이 바로 '모방적' 짝퉁이 아닌 '창조적' 짝퉁의 길이다. 대한민국의 짝퉁들이여, 분발하시라.

 

한국의 발달한 짝퉁 제조 기술은 바로 후진국형 '물자의 생산'에서 선진국형 '브랜드 생산'으로 넘어가고 싶은 염원의 허구적 실현이다. 한국에서 짝퉁 소비가 만연한 것하류층의 '재화의 소비'에서 상류층의 '기호의 소비'로 넘어가고픈 염원의 허구적 실현이다.

 

관조 vs 이론

 

중세의 대학은 순수한 정신적 관조(theoria)를 위한 기관이었다. 하지만 근대 이후 대학은 제작(poiesis)과 맞물리면서 서서히 생산력의 노하우, 즉 이론(theory)을 제공하는 기관으로 변모해왔다. … 특히 한국에서 대학은 이론만 제공하는 게 아니라 기업의 요구에 따라 맞춤 인간을 생산해 납품하는 곳으로 변해가고 있다. … 그러고 보니 대한민국은 교육부를 동시에 인적자원부로, 문화부를 동시에 관광부로 부르는 나라.

 

성전 vs 비즈니스 빌딩

 

'아우라'라는 말은 벌써 일상용어가 되었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어떤 먼 것의 일회적 나타남." 이것이 아우라 체험이다. 아우라는 파괴되었다. 파괴되지 말아야 할 것까지 사정없이 파괴되었다. 아우라 체험이 꼭 필요한 곳이 있다. 가령 교회와 같은 종교적 장소. 가톨릭교회에는 아직 분위기가 남아 있으나, 한국의 개신교회에서 신 앞에 선 아우라 체험을 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언젠가 강의 나가는 길에 청량리에서 해괴한 건물을 보았다. 이마에 '순복음강북성전'이라 써 붙였다. 그런데 정작 건물의 외관은 '성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미끈한 비즈니스 빌딩이다. 차라리 '순복음.com'이라고 써 붙이는 게 낫지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그 건물의 아랫부분은 은행과 기업이 들어서 있어, 성전 앞에서 돈놀이와 장사를 하던 이들을 채찍으로 다스렸다는 예수의 일화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우라 vs 아우라의 연출

 

독일 사람들은 대개 동사무소에서 혼인신고를 하면서 동시에 결혼식을 올린다. 그걸로 부족하면 동사무소에서 혼인신고만 하고 교회에서 제대로 된 예식을 올린다. 일년 내내 교회에 나가는 일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인구의 대부분이 명색만은 기독교인이다. 촌락 공동체가 급속히 해체되면서 전통 혼례의 맥인 끊긴 한국에서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딱히 식을 올릴 장소가 없다. 그러다 보니 오로지 혼례만을 위한 '예식장'이라는 건물이 필요한 것일 게다. "신부 입장!"이라는 말과 함께 신부가 예식홀로 들어오자, 바닥에 갑자기 안개가 깔리기 시작한다. 결혼이라고 하면 그래도 인생에서 꽤 의미가 있는 행사일 텐데, 그렇게 중요한 행사를 굳이 눈 뜨고 봐주기 민망한 키치로 연출할 필요가 있을까?

 

한마디로 '아우라'의 연출이다. "곧 다음 결혼식이 시작될 예정이오니, 빨리 기념 촬영을 마쳐주시기 바랍니다." 자본의 회전율을 높이기 위해 시뮬라르크의 자전을 재촉하는 이 멘트는 방금 안개까지 동원해 연출한 예실의 '아우라'실은 대량 복제 상품임을 일깨워준다. … 예식장 건물은 콘크리트로 구현된 한국 사회의 미발달한 미감이다. 토털 키치.

 

원작 vs 복제

 

대형 교회에서 흔히 보는 장면이 예배 장면을 TV 카메라로 촬영하는 것이다. 서울에 있는 본점에서 하는 목사의 설교를 전국에 흩어져 있는 지점들로 생중계하는 것도 흔히 본다. '언제 어디서라도' 예배의 복제물을 소비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신께 드리는 예배마저도 원작이 아니라 복제가 된다. 이 기술 복제된 예배에서 아우라를 기대할 수는 없다.

 

 

 


호모코레아니쿠스

저자
진중권 지음
출판사
웅진지식하우스. | 2007-01-15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유쾌한 미학자 진중권의 한국인 탐사 프로젝트 ! 호모 코레아니쿠...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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