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쪽 - 경희 <여자계> 1918. 3.
경희도 사람이다. 그다음에는 여자다. 그러면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또 조선 사회의 여자보다 먼저 우주 안 전 인류의 여성이다. 이철원 김 부인의 딸보다 먼저 하느님의 딸이다.
87쪽 - 만혼 타개 좌담회 <삼천리> 1933년 12월호 수록
꽉 찬 나이에도 시집, 장가를 가지 않으려 하는 이들이 많은 요즘의 세태를 되돌아보고자 김기진, 김억, 나혜석, 이광수 이렇게 문인 네 분을 모시고 좌담회를 열었다.
144쪽
김기진 : 어느 생물학자의 말을 듣건대 일단 딴 남성을 접한 여자에게는 그 신체 혈관의 어느 군데엔가 그 남성의 피가 섞여 있지 않을 수 없대요. 그러기에 혈통의 순수를 보존하자면 역시 초혼이 좋은 모양이라 하더군요.
101쪽 - 독신 여성의 정조론 <삼천리> 1935. 10.
가장 단순한 듯한 자연이 우리에게 가장 염증을 아니 주는 것을 보면 자연력이란 그 내재력이 풍부한 것인가 보아요.
132쪽 - 부처 간의 문답 <신여성> 1923.11.
처: 내 생각 같아서는 매년 몇 십 명씩 관광단을 모집하여 일본의 후지산이나 닛코나 마쓰시마 같은 데 구경시키는 것보다 가깝고도 서양 풍속을 볼 수 있는 상해나 하얼빈 같은 데 가정 시찰이나 시켜 근본적 생활 개선책을 실행하는 것이 얼마나 큰 사업일는지 모르겠어요.
160쪽 - 이혼 고백장 <삼천리> 1934. 8~9
전 인류 중 하필 너는 나를 구하고 나는 너를 짝지으려 하는 데는 네가 내게 없어서는 아니 되고 내게 네게 없어서는 아니 될 무엇 하나를 찾아 얻지 못하는 이상 그 결혼 생활은 영구치 못할 것이요, 행복치 못하리라는 것을 나는 일찍이 깨달았던 것이었습니다.
160쪽 - 이혼 고백장 <삼천리> 1934. 8~9
그때 내가 요구한 조건은 이러하였습니다.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 주시오.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케 하여 주시오.
씨는 무조건하고 응낙하였습니다. 나의 요구하는 대로 신혼 여행으로 궁촌 벽산에 있는 죽은 애인의 묘를 찾아 주었고, 석비까지 세워 준 것은 내 일생을 두고 잊지 못할 사실이외다.
173쪽 - 이혼 고백장 <삼천리> 1934. 8~9
때는 아내에게 이혼 청구를 하고, 만일 승낙치 않으면 간통죄로 고소를 하겠다고 위협을 하는 때였사외다. 아아, 남성은 평시 무사할 때는 여성이 바치는 애정을 충분히 향락하면서 한 번 법률이라든가 체면이라는 형식적 속박을 받으면 어제까지의 방자하고 향락하던 자기 몸을 돌이켜 금일의 군자가 되어 점잔을 빼는 비겁자요, 횡포자가 아닌가. 우리 여성은 모두 일어나 남성을 저주하고자 하노라.
196쪽 - 이혼 고백장 <삼천리> 1934. 8~9
사람은 자기 내심의 자기도 모르는 정말 자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보이지도 알지도 못하는 자기를 찾아내는 것이 사람 일생의 일거립니다. 즉 자아 발견이외다. ...... 사람의 행복은 부를 얻은 때도 아니요, 이름을 얻은 때도 아니요, 어떤 일에 일념이 되었을 때외다. 일념이 된 순간에 사람은 전신 세정한(깨끗이 씻은 듯한) 행복을 깨닫습니다. 즉 예술적 기분을 깨닫는 때외다.
213쪽 - 신생활에 들면서 <삼천리> 1935. 2.
"크면 어디 가오? 다 에미 찾는 법이지." 하면 코웃음이 난다. 에미는 찾아 무엇하고 자식은 찾아 무엇할 것인가. 남은 문제는 내가 돈이 많아서 저희들에게 이롭게 해준다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남이 되고 마는 것이다. 다만 열 달간 뱃속에 넣고 고생했을 따름이나, 그도 과거가 되고 보니 한 경험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215쪽 - 신생활에 들면서 <삼천리> 1935. 2.
"K가 나를 사람으로 살렸어. 내게는 더 없는 고마운 사람이야. 그가 나를 가정생활에서 떠나게 해 준 까닭에 제전에 입선을 하게 되고 뛰어난 감상문을 수편 쓰게 되었어. 나는 지금 죽어도 산 맛은 다 보았어. 나는 K를 조금도 원망치 않아. 오히려 고마운 은인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말하면서 불행에서 행복을 찾게 된다.
239쪽 - 모(母) 된 감상기 <동명> 1923. 1. 1.~21.
"여자가 공부는 해서 무엇하겠소. 시집가서 아이 하나만 낳으면 볼일 다 보았지!" 하는 말을 할 때마다 나는 언제나 코웃음으로 대답할 뿐이요, 들을 만한 말도 되지 못할 뿐 아니라 그럴 리 만무하다는 신념이 있었다. ...... 나는 할 일이 많았다. 아니 꼭 해야만 할 일이 부지기수이다.
245쪽 - 모(母) 된 감상기 <동명> 1923. 1. 1.~21.
그리하여 나 같은 자는 도무지 남의 처가 되어 볼 때가 생전 있을 것 같지 아니하였다. 그러던 것이 자각이나 자원보다 우연한 기회로 타인의 처가 되고 보니 결혼 생활이란 너무나 쉬운 일 같았다. 결혼 생활을 싫어하던 제일의 조건이던 공상 세계에서 떠나기 싫던 것도 웬일인지 결혼한 후는 그 세계의 범위가 더 넓고 커질 뿐이었다. ...... 그러나 여기까지 이르러서도 모 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혹 생각해 본 일이 있었다 하면 부인 잡지 같은 것을 보고 난 뒤에 잠깐 꿈같이 그려 보았을 뿐이었다. ...... 나는 분만기가 닥쳐올수록 이러한 생각이 났다. '내가 사람의 '모'가 될 자격이 있을까? 그러나 있기에 자식이 생기는 것이지.'하며 아무리 이리저리 있을 듯한 것을 끌어 보니 생리상 구조의 자격 외에는 겸사가 아니라 정신상으로는 아무 자격이 없다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 과민한 신경이 늘 고독한 것을 찾기 때문에 무시로 빽빽 우는 소리를 참을 만한 인내성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더구나 무지몰각하니 무엇으로 그 아이에게 숨어 있는 천분과 재능을 틀림없이 열어 인도할 수 있으며 ...... 그러나 자식이 생기고 보면 그러한 여유는 도저히 있을 것 같지도 않으니 아무리 생각하여도 내게는 군일 같았고, 내 개인적 발전상에는 큰 방해물이 생긴 것 같았다. ...... 다시 얻을 수 없는 사랑의 창조요 구체화요 해답인 줄 알면서도 마음에서 솟아오르는 행복과 환락을 느낄 수 없는 것이 어찌나 슬펐는지 몰랐다.
255쪽 - 모(母) 된 감상기 <동명> 1923. 1. 1.~21.
나를 낳고 기른 부모도, 또 골육을 같이한 형제도, 죽자사자하던 친구도 아직 내 젖을 못 보았고 물론 누구의 눈에든지 띌까 보아 퍽도 비밀히 감추어 두었다. 그 싸고 싸둔 가슴을 대담히 해치며 아직 입김을 대어 못 보던 내 두 젖을 공중 앞에 전개시키라는 명령자는 이제야 겨우 세상 구경을 한 핏덩어리였다.
이게 웬일인가? 살은 분명히 내 몸에 붙은 살인데 절대의 소유자는 저 쪼끄만 핏덩이로구나!
그리하여 저 소유자가 세상에 나오자마자 으레 제 물건 찾듯이 불문곡직하고 찾는구나. 나는 웃음이 나왔다. "세상 일이 이다지 허황된가..." 하고. 그리고 "에라 가져가거라." 하는 퉁명스러운 생각으로 지금까지 맡아 두었던 두 젖을 쪼그만 소유자에게 바쳤다. 그리고 하회를 기다리고 앉았었다. ...... 이와 같이 벌써 모 된 선고를 받았다.
257쪽 - 모(母) 된 감상기 <동명> 1923. 1. 1.~21.
진실로 잠은 보물이요 귀물이다. 그러한 것을 탈취해 가는 자식이 생겼다 하면 이에 더한 원수는 다시 없을 것 같았다. 그러므로 나는 '자식이란 모체의 살점을 떼어 가는 악마'라고 정의를 발명하여 재삼 숙고하여 볼 때마다 이런 걸작이 없을 듯이 생각했다.
261쪽 - 모(母) 된 감상기 <동명> 1923. 1. 1.~21.
환언하면 천성으로 구비한 사랑이 아니라 포육할 시간 중에서 발하는 단련성이 아닐까 싶다. 즉 그런 솟아오르는 정의 본능성이 없다는 부인설이 아니라 자식에 대한 정이라고 별다른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266쪽 - 백결생에 답함 <동명> 1923. 3. 18.
...... 감상문만은 본래 논박한다는 것부터 말이 안 되고 더구나 이상화하고 사상화하려는 것이야 이에 대하여 무슨 일 푼의 가치가 있으리오. 씨가 절대의 책임을 내게 지우고 게다가 사상적이니 신여자니 하는 것으로 쓸어 맡기려 하는 것은 도무지 까닭 없는 비방이다. 이것은 나와 말하는 것보다 자연과 다투어 보는 것이 제일 합리적일 것 같다.
267쪽 - 백결생에 답함 <동명> 1923. 3. 18.
과연 마치 구름 속에 있는 양반에게 "너희는 왜 흙을 밟고 다니느냐." 하는 비방을 받는 격이 되었다. 씨의 "임신이란 것은 그리 편한 일이 아니다."라는 일구를 보면 씨가 능히 알지 못할 사실을 아는 체하려는 것이 용서치 못할 점이다.
267쪽 - 백결생에 답함 <동명> 1923. 3. 18.
씨의 반박의 중요 문구는, 즉 내 감상기 전문 중 나의 제일 확실한 감정이었다. 제일 무책임한 말이었고, 제일 유치한 말이었고, 제일 거슬리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 몇 구절은 나의 제일 정직한 말이었고, 제일 용감한 말이었다.
270쪽 - 백결생에 답함 <동명> 1923. 3. 18.
씨여 사상적 방황이란 그리 못된 일이오니까? 방황해야만 할 때 방황치 말라는 것은 못된 일이 아니오니까? 그다지 조바심을 하여 걱정할 것이야 무엇 있으리까? 방황도 아니 하고 고정부터 하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화석의 그림자나 아닐까요?
274쪽 - 내가 어린애 기른 경험 <조선일보> 1926. 1. 3.
첫돌이 돌아오면 비슬비슬 걷기를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일어서다 쓰러지고, 비틀비틀 다니다가 넘어지고, 고꾸라지고 떨어져서 코방아 찧는 일이 때없이 수없이 많습니다. 이때에 옆에서 보던 어른들은 깜짝 놀라 뛰어가서 일으켜 줍니다. 그러면 어린애는 엄살하고 입을 크게 벌려 웁니다. 어른의 이 태도가 제일 안 된 태도입니다. 떨어지지 아니 하려다가도 어른 악쓰는 소리에 놀라서 떨어지는 수가 많습니다. 그리고 아프지도 않으면서도 엄살을 합니다. 그뿐 아니라 이는 교육상에 제일 안 된 것입니다. 제가 넘어지거든 꼭 제가 일어나도록 하여야 합니다. 어른이 일으켜 주는 것은 버릇도 없어지거니와 의뢰심을 기르는 것이외다.
280쪽 - 내가 어린애 기른 경험 <조선일보> 1926. 1. 3.
아직 거기까지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또 장차 당할 때의 일로 미루려고 합니다. 오직 미리 생각하는 것은 아이들이 장성함에 따라 교육자인 부모의 교훈을 신뢰할 만치 부모 된 자는 반드시 그 시대 시대를 이해할 만큼 공부하기를 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상과 같이 냉정한 태도를 자연에 맡기어 아이를 길러 갑니다.
[네이버 책]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 나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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