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 리베카 솔닛


17쪽
나는 약간의 자기불신은 잘못된 사실을 바로잡고 이해하고 귀담아듣고 발전하는 데 좋은 도구라는 사실도 안다 - 지나친 자기불신은 사람을 마비시키고 철저한 자기확신은 교만한 멍청이를 낳겠지만 말이다. 남성과 여성은 그런 양 극단으로 각각 밀어붙여지고 있지만, 사실 그 사이에는 행복한 중간지대가 있으며, 우리는 모두 서로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그 훈훈한 적도대에서 만나야 한다.

24쪽
대부분의 여자들은 이중의 전선에서 싸우고 있다. 하나는 무엇이 되었든 문제의 주제에 관한 싸움이 벌어지는 전선이고, 다른 하나는 애초에 말할 권리, 생각할 권리, 사실과 진실을 안다고 인정받을 권리, 가치를 지닐 권리, 인간이 될 권리를 얻기 위해서 싸우는 전선이다.

32쪽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어 발언할 권리는 우리의 생존과 존엄과 자유에 기본이 되는 조건이다. 나는 한대 폭력적인 방식으로까지 침묵을 강요당했지만 이제는 내 목소리를 갖게 된 데 감사하며, 그렇기 때문에라도 언제까지나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권리에 결속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40쪽
하도 많은 남자들이 현재 배우자나 옛 배우자를 살해하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살인이 매년 1,000건을 훌쩍 넘는다. 그렇다면 그로 인한 희생자 수가 매 3년마다 9.11 사건의 사망자 수를 넘는다는 뜻인데, 이런 종류의 테러에 대해서는 누구도 전쟁을 선포하지 않는다.

45쪽
살인은 그런 권위주의의 극단적 형태다. 살인자는 당신이 죽을지 살지 결정할 권리는 자신에게 있다고 살인을 통해서 단언한는 셈이다. 이것은 타인을 통제하는 궁극의 수단이다.

54쪽
요즘도 강간에 대해서는 강간범이 아니라 피해자를 단죄하려는 경우가 많다. 마치 완벽한 처녀만이 성폭행을 당할 수 있다는 듯이, 또는 완벽한 처녀의 말만 믿을 수 있다는 듯이.

56쪽
강간이 욕정의 범죄라는 말은 그만하라. 이런 강간은 계산된 기회주의적 범죄다.

60쪽
여성해방운동은 남성의 힘과 권리를 침해하거나 빼앗으려는 의도를 가진 것처럼 묘사되곤 했다. 마치 한번에 한 성만 자유와 힘을 누릴 수 있는 암울한 제로섬 게임인 것처럼. 그러나 우리는 함께 자유인이 되거나 함께 노예가 될 수 있을 뿐이다.

61쪽
우리가 그저 살아남는 데만 매달리지 않아도 된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다른 중요한 일들에 쏟을 수 있겠는가.

75쪽
이 용어가 혼란스럽게 느껴진다면, '성'을 지우고 '폭행'에만 집중해보라. 폭력에, 타인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 행위에, 모든 인권 중에서도 기본인 신체보전권과 자기결정권을 부정하는 행위에.

92쪽
최근에 많은 미국인들은 '동성결혼(same-sex marriage)'이란 어색한 용어를 '평등결혼(marriage eqaulity)'으로 바꾸었다. 원래 이 용어는 동성 커플도 이성 커플이 누리는 권리를 전부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그렇지만 이 용어는 결혼이란 평등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라는 뜻도 될 수 있다. 전통적 결혼은 그렇지 않았다. 서구 역사에서 대부분의 기간에, 법은 결혼을 통해서 남편이 사실상 아내의 소유자가 되고 아내는 사실상 남편의 소유물이 된다고 규정했다. ...... 이런 법규 하에서 여자의 삶은 남편의 성정에 달려 있었는데, 그야 당시에도 못된 남편 못지않게 착한 남편도 많았겠지만, 나에 대한 절대적 권력을 쥔 사람의 친절에 기대기보다는 권리에 기대는 편이 더 믿음직한 법이다.

95쪽
같은 성의 두 사람이 결혼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평등한 관계이다. 한쪽 파트너가 여러가지 다양한 방식으로 좀더 힘을 지닐 순 있겠지만, 대개의 측면에서 그들은 서로 평등한 위치에 선 사람들끼리의 관계라서 자신들의 역할을 자기들 마음대로 규정할 수 있다.

97쪽
보수주의자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전통적 결혼을 보존하는 것, 실은 그보다도, 전통적 성 역할을 보존하는 것이다.

125쪽
빈틈을 메운다는 것은 우리가 완전히 알지는 못하는 어떤 진실을 완전히 안다고 착각하는 어떤 거짓으로 바꾸는 일이다. 

134쪽
내게 희망의 근거는 단순하다. 우리는 다음에 벌어질 일을 모른다는 것, 세상에는 있을 법하지 않은 일과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꽤 자주 벌어진다는 것, 비공식적인 세계사가 이미 보여주었듯이, 헌신하는 개인들과 대중운동들이 역사를 만들 수 있으며 만들고 있다는 것. 우리가 언제 어떻게 이길지, 얼마나 걸릴지는 예측할 수 없지만 말이다. 
절망은 확실성의 한 형태다. 미래가 현재와 거의 같거나 현재보다 쇠락하리라고 믿는 확실성이다. 곤잘러스의 공감되는 표현을 빌려서 말하자면, 절망은 미래에 대한 확실한 기억이다 .마찬가지로 낙관도 앞으로 벌어질 일을 확신한다. 절망과 낙관은 둘 다 행동하지 않을 근거로 작용한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그런 기억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 현실이 반드리 우리 계획과 일치하진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야말로 희망일 수 있다. 창조력과 마찬가지로, 희망은 낭만파 시인 존 키츠John Kears가 말했던 이른바 소극적 능력negative capability에서 생겨날 수 있다.

138쪽
집이라는 껍데기는 보호막이면서 감옥이다. 그것은 바깥에서는 사라질지도 모르는 친숙함과 연속성으로 이뤄진 외피다. 거리를 걷는 것은 사회에 관여하는 행위일 수 있으며, 봉기나 시위나 혁명에서처럼 여러 사람이 함께 걸을 때는 정치적 행동일 수도 있다. 그러나 또한 걷기는 몽상과 주관성과 상상력을 이끌어내는 수단일 수도 있다. ...... 생각은 때로 야외활동, 육체적인 활동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훼방받지 않는 집중이 아니라 가벼운 주의산만이 상상력을 추동하곤 한다. 그럴 때 생각은 우회로로 간다. 곧바로는 가닿을 수 없는 장소를 향하여 슬렁슬렁 에둘러 간다. ...... 창조작업이란 무릇 예측 불가한 방식으로 이뤄지는 법이다. 배회할 공간이 필요하고, 일정과 체계는 거부된다. 

142쪽
위대한 비평은 예술작품을 해방시킴으로써 작품을 더 완전히 보여주고, 계속 살아 있게 하며, 끝없이 이어지면서 끝없이 상상력을 북돋는 대화로 끌어들인다. ...... 이런 비평은 예술작품의 본질적인 미스터리를 존중하는데, 그런 미스터리야말로 예술작품이 간직한 아름다움과 즐거움의 일부분이며, 아름다움과 즐거움은 둘 다 비환원적이고 주관적인 것이다.  최악의 비평은 자신이 최종 선고를 내리고 싶어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계속 침묵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최고의 비평은 언제까지나 끝날 필요가 없는 대화를 시작하려고 한다.

143쪽
그녀(버지니아 울프)가 칭송했던 해방은 공식적, 제도적, 이성적 해방이 아니라 익숙한 것, 안전한 것, 알려진 것을 넘어서 좀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해방이었다. 그녀가 요구했던 여성해방은 단순히 남자들이 수행하는 제도적 활동의 일부를 여자들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요즘은 여자들도 다 한다), 지리적 차원에서든 상상력의 차원에서든 자유롭게 쏘다닐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147쪽
내가 지난 20년가량 글로 먹고살면서 스스로 설정한 임무는 사물의 핵심에 있는 미묘한 것, 계산할 수 없는 것, 그리고 그 기쁨과 의미를 - 즉 범주화하기 불가능한 것들을 - 묘사하는 언어를 찾아내거나 새로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내 친구 칩 워드Chip Ward는 "계량 가능한 것의 폭압"이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측정될 수 있는 것이 측정될 수 없는 것에 거의 언제나 우선한다는 뜻이다. 사익이 공익에, 속도와 효율이 즐거움과 품질에, 공리주의가 미스터리와 의미에 우선한다. ...... 계량 가능한 것의 폭압은 우리의 언어와 담론이 좀더 복잡미묘하고 유동적인 현상을 묘사하는 데 실패한 탓이기도 하다. 그처럼 종잡을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하고 아끼자는 의견을 형성하고 결정을 내리는 데 실패한 탓이기도 하다. 호명할 수 없거나 묘사할 수 없는 것을 아끼기란 어려운 일이다. ...... 미묘한 것, 돈으로 살 수 없고 기업이 구사할 수 없는 즐거움, 의미의 소비자가 되기보다 생산자가 되는 것, 그리고 느린 것, 배회하는 것, 일탈하는 것, 캐묻는 것, 신비스러운 것, 불확실한 것을 선호하는 반란이다.

166쪽
그래도, 지금까지도, 여자가 남자의 비행에 관해서 뭔가 불편한 말을 할라치면, 사람들은 으레 그녀를 망상에 빠진 인간, 사악한 음모론자, 병적인 거짓말쟁이, 그저 재미일 뿐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징징대는 인간, 혹은 그 모두에 해당하는 인간으로 묘사한다. 지나치게 사나운 이런 반응들은 프로이트가 말했던 망가진 주전자 농담을 상기시킨다. 어떤 남자의 이웃이 남자에게 빌려간 주전자를 망가뜨려서 돌려주면 어떡하느냐고 책망하자, 남자는 처음에는 망가뜨리지 않았다고 대답했다가, 다음에는 빌릴 때 이미 망가진 상태였다고 대답했다가, 나중에는 아예 자신은 빌린 적조차 없다고 대답했다. 여자가 남자를 고발하고 그 남자와 남자의 옹호자들이 저런 식으로 항변할 때, 여자는 망가진 주전자가 된다.

178쪽
그러나 정신질환은 범주의 문제라기보다는 정도의 문제일 때가 더 많고,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들 중에서도 아주 많은 수는 온화하고 다정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여러 척도로 볼 때 광기는 불평등, 만족을 모르는 탐욕, 생태파괴와 더불어, 또한 비열함과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의 핵심에 자리한 속성이지 주변부에만 있는 속성이 아니다.

183쪽
제니추(Jenny Chiu)라는 여성은 트위터에서 이렇게 말했다. "물론 모든 남자가 다 여성 혐오자나 강간범은 아니다. 그러나 요점은 그게 아니다. 요점은 모든 여자는 다 그런 남자를 두려워하면서 살아간다는 점이다."

189쪽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 '데이트 강간' '부부 강간' 같은 용어들은 만들어지지도 않은 시점이었다. ...... 우리는 단어의 힘을 이용해 의미를 묻어버릴 수 있지만, 의미를 드러낼 수도 있다. 만일 우리에게 어떤 현상이나 감정이나 상황을 가리키는 단어가 없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말하지 못한다. 그것은 그 문제를 다룰 수 없다는 뜻이며, 하물며 변화시키기란 더더욱 불가능하다.

193쪽
조사에 따르면, 많은 경우 강간의 동기는 남자가 여자의 욕망과는 무관하게 자신이 그녀와 섹스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 마음이었다. 한마디로 남자의 권리가 여자의 권리에 앞선다는 생각, 혹은 여자에게는 권리가 없다는 생각이다. 이렇듯 여자가 남자에게 섹스를 빚지고 있다는 생각은 어디에나 퍼져 있다. 내가 어렸을 때처럼 요즘도 여자들은 우리의 어떤 행동이, 어떤 말이, 옷차림이, 우리의 모습 자체가, 우리가 여성이라는 사실 자체가 남자에게 욕망을 불러 일으켰으므로 응당 그 욕구를 만족시켜주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우리가 그들에게 빚을 졌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우리에 대한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212쪽
지니는 호리병으로 도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혁명이 실제 작동하는 방식이다. 모든 혁명은 무엇보다도 생각의 혁명이다. ...... 혁명은 사실 특정 체제에서 권력을 확보하는 일이 주가 되는 사건이 아니고, 그보다는 파열을 통해서 새로운 사상과 제도가 탄생하고 그 충격이 퍼지는 사건이었다.

215쪽
나는 우리 여성은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예속에서 벗어난다는 이유로 처벌 받거나 끊임없는 예속 상태라는 처벌을 받는 것 중 하나를.

235쪽
옮긴이의 말 - 김명남
솔닛은 에세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이런 글쓰기가 자신에게는 필연적인 선택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도 한때는 분석적인 미술비평, 저널리즘 기사, 사적 에세이를 따로따로 썼지만, 1980년대 네바다 핵시험장에서의 반핵운동 경험을 기록하면서 그토록 다층적인 사건들과 행위자들을 포괄하기 위해서는 모든 경로를 다 거닐어보는 글, 뜻밖에 연결을 환영하는 글, 끝나지 않는 대화를 시작하는 글, 그러면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숨기지 않는 글이 되어야 함을 깨달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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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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