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배신 - 바버라 에런라이크

# 가난하기에 돈이 더 든다


47쪽
가난한 사람들만 아는 절약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난하기 때문에 추가로 드는 비용이 수두룩했다. 아파트를 구할 때 지불해야 하는 한 달치 집세와 한 달 집세에 상응하는 보증금이 없으니 결국 일주일 단위로 방을 빌리면서 엄청난 방세를 내야 한다.

52쪽
"글쎄, 나는 당신이 어떻게 담배를 안 피우고 그렇게 오래 버티는지가 더 이해 안 되는걸."이라고 했다. 거의 내가 뭘 잘못했다는 듯한 말투였다. 왜냐하면 일은 남을 위해 하는 거지만 흡연은 오로지 나를 위해 하는 거니까. 흡연자들이 이런 반항적인 자기 양육 심리 때문에 흡연 행위에 그렇게 집착하고 있다는 걸 금연 운동가들은 왜 모를까? 미국의 일터에서 온전히 자기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 몸속에 키우는 종양과 그것을 키우는 데 바치는 몇 분뿐인 듯했다.

73쪽
난 하나도 안 피곤해, 나 자신에게 그렇게 장담했지만, 어쩌면 얼마나 피로한지 판단할 수 있는 '나'는 더 이상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 모두가 우리를 무시한다


127쪽
우리들 간의 유대감은(그런 게 실제로 존재했다면) 전적으로 육체적인 것이었다. 한 사람의 건강 상태에 문제가 생기면 다른 팀원들에겐 가외의 짐이 되었다. 통증을 완화하는 처방 없이 살 수 있는 약품과 허브 약제 들이 끊임없이 오갔다. 비록 동료들이 이런 급여를 받으면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또는 지옥 같은 여건에서 일하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해도 그들의 허리 통증, 쥐나 경련, 그리고 관절염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게 되었다.
...... 우리의 세계는 통증이 지배했다. 통증을 참는 방법으로는 액세드린이나 애드빌 같은 진통제를 먹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혹은 (주말에만 가능했지만) 한두 명은 술로 달랬다. 집 청소를 맡기는 사람들은 자신의 집을 모텔처럼 정돈돼 보이게 하려고 투입된 사람들이 겪는 극심한 고통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알게 되면 과연 양심의 가책을 받을까? 아니면 예를 들어 저녁 만찬에 초대한 손님들에게 자기 집 바닥이 온전히 가장 순수한, 갓 흘러내린 인간의 눈물로 닦였다고 자랑하는 식으로 자신들이 돈을 주고 산 것에 변태적인 자부심을 느낄까?

142쪽
정신을 좀 차리자. 그리고 무엇보다 거리를 두자. 고통받는 사람들 곁에 있는 걸 견딜 수 없다면 기자 아니라 기자 할아버지라도 애초에 저임금 노동의 세계에 몸을 담지 말았어야 했다.

148쪽
멈추지 말고, 생각하지 말고, 단 한순간이라도 정지하지 마라. 안 그랬다가는 다리가 점점 아파 오는 것을 느끼게 되고 결국 피로가 나를 굴복시킬 것이다. ...... 1년에 360일 이상을 비천한 일을 하면서 살면 정신에도 일종의 반복성 긴장 장애가 생길까? ...... 어쨌든 간에 일단 누가 내 등에 칼을 꽂았다는 상상 대문에 금쪽같은 수면 시간을 허비했다는 사실 자체가 경악스러웠다. 와, 큰일 나겠네, 정신 차려!

163쪽
피트의 말대로 일은 우리가 사회에서 '왕따'로 전락하지 않도록 구원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일 자체가 왕따의 일로 눈에 보이지 않고 심지어는 역겹기까지 했다. 경비원, 청소부, 단순노동자, 성인의 기저귀를 갈아 주는 사람들. 이들은 신분제가 존재하지 않는 민주 사회의 불가촉천민들이었다. 그리하여 테드 같은 자격도 없는 사람에게 카리스마가 부여된 것이다. 그는 탐욕스럽고 무뚝뚝하고 잔인했지만 더 메이즈에서는 유일하게 더 나은 세상, 사람들이 대학에 진학하고, 사복을 입고 직장에 나가고, 주말에는 재미로 쇼핑을 하는 세상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만약 청소할 집이 모자라면 그는 직원들을 ('정말 좋다'는) 자기 집으로 보내 일을 시켰다.
혹은 일반적으로 저임금 노동 자체가 노동자 스스로를 천민처럼 느끼게 만드는지도 몰랐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텔레비전을 보면 등장하는 사람들 거의 모두가 시간당 15달러 혹은 그 이상을 번다. 뉴스 앵커들을 말하는 게 아니다. 시트콤이나 드라마의 주인공은 모두 패션디자이너나 학교 선생님, 변호사 들이다. 따라서 패스트푸드 가게 점원이나 간호사 보조는 자기가 비정상적인 존재라고, 파티에 초대 받지 못한 유일한 혹은 거의 유일한 사람이라는 결론에 쉽게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 생각이 맞다. 가난한 사람들은 문화 전반에서 사라져 버렸다. 매일의 오락은 물론이요 정치적인 선언이나 토론, 그리고 지적인 노력에서도 소외되고 있다. 

# '동료'라는 이름의 노예


177쪽
왜냐하면 '솔선수범'하는 사람처럼 보여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노조 결성 같은 걸 할 사람으로 보여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214쪽 - 월마트
내가 귀가 안 들리고 말을 못한다고 해도 아무 문제없이 할 수 있는 일이었고, 오리엔테이션에서는 늘 웃으며 따뜻하게 사람을 대하라고 했지만 내 생각에는 자폐증이 있으면 오히려 더 유리할 것 같았다.

224쪽 - 월마트
고객들의 부주의와 쓸데없는 변덕 때문에 내가 허리를 굽히고 쪼그려 앉고 뛰어다녀야 한다는 사실을 더 이상 외면하기 힘들었다. 그들은 쇼핑객들이고 나는 반(反) 쇼핑객이었다. 내가 하는 일은 그들이 매장에 발을 들여 놓지 않았던 것처럼 깔끔하게 매장을 정돈하는 것이었다.이 시점에서 '적극적인 환대'는 적극적인 적대감에 자리를 내 주고 말았다. 그들의 카트는 내 카트를 들이받고 그들의 아이들은 마구 날뛰었다. 한번은 어떤 아기가 손에 닿는 옷은 모조리 옷걸이 대에서 끌어 내리는 걸 어쩔 수 없이 보고만 있었는데 저런 애는 낳지 말았어야 한다는 생각이 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는지 애 엄마가 마침내 아이를 말렸다.
...... 근무를 갓 시작해 '지킬 박사'일 때에는 과체중인 사람을 보면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이 고를 수 있는 옷은 허리를 끈으로 잡아매는 반바지, 가로줄 무늬가 있는 거대한 티셔츠처럼 보기 흉한 것들뿐이었는데 그 옷들은 마치 뚱뚱한 여성들을 조롱하려고 만들어진 듯했다. 그러나 근무를 계속할수록 동정심은 줄어 갔다.
...... 고객들처럼 옷을 갖고 싶다는 듯이 어루만지고 들어보는 일은 없었다. 탁 치면서 제자리에 놓았다. 똑바로 걸려 있어, 차려 자세로. 아니면 선반에 정연하게 엎드려 있어. 이런 마음 상태가 되면 고객이 상품을 들추고 다니며 매장을 건드리는 게 보기 싫어졌다. ...... 여성복 매장을 거대한 플라스틱 거품 안에 넣어 소매상점들에 관한 역사박물관 같은 어디 안전한 곳에 잘 보관했으면.

239쪽
그런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쫓아다니며 뒷정리를 해 주는 고객은 대부분 어머니들이니, 흩어진 장난감이나 옷가지를 줍고 엎지른 걸 닦아 내는 등 그들이 집에서 하는 일을 여기서는 내가 대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여성 고객이 느끼는 쇼핑의 매력 중 하나는 카트 위에서 아기가 빽빽 울어도 모른 척하고 버릇없는 애들처럼 물건을 아무 데나 던져 놓고 다른 사람이 치우게 하는 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만약에 옷들이 처음부터 잘 정돈되어 있지 않다면 어지르는 재미가 없지 않겠는가. 나는 계속해서 정리하고 고객은 심술 맞게 질서를 무너뜨리고. 그래서 내가 필요한 것이다. ...... 이사벨에게 우리의 업무는 다른 여자들이 와서 연기할 수 있는 무대를 끊임없이 제공해 주는 것이라는 내 이론을 들려주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없다면 아동 학대 비율이 갑자기 상승할 것이며, 우리는 일종의 치료사이기 때문에 급여도 그에 상응하게 시간당 50달러에서 100달러는 받아야 한다고 말이다. 

252쪽
자기의 시간을 1시간당 얼마라고 판다는 것은, 처음에는 미처 깨닫지 못하겠지만 사실은 인생을 파는 것이다.

# 왜 악순환이 계속되는가


262쪽
나는 이번 저임금 체험을 통해 인간의 미세 체계는 맨 밑바닥에서 위를 올려다보며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힘든 반면 그 필요성은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63쪽
일을 어느 정도로 열심히 할 것인가도 애매한 사안 중의 하나였다. '같이 일하기 좋은 동료'가 되기 위해서는 일을 신속하고 철저하게 해내야 했지만, 정도가 지나쳐서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됐다. ...... "당신이 그러면 앞으로 우리 모두가 그렇게 해야 될 거예요!"

269쪽
빈민들이 서비스 산업과 소매업체 매장이 많은 부자들의 거주 지역 근처에서 일을 해야 하는 한, 통근 시간이 길어지는 것을 감수하거나 살인적으로 비싼 임대료를 감당할 수밖에 없다.

271쪽
임대료가 시장의 움직임에 극심할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반면 임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275쪽
<뉴욕 타임스>의 루이스 우치텔이 보도한 대로, 많은 고용주들은 임금을 올려 주지 않기 위해서라면 공짜 식사, 교통수단 보조, 자사 상품 구입 시 할인 혜택처럼 거의 무엇이든 제공할 의사가 있다. 어느 고용주는 그 이유를 시장이 변화해서 부수적 보상을 베풀 필요가 없어졌을 때 이러한 가외 혜택을 없애는 것이 한번 올린 임금을 내리는 것보다 쉽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277쪽
게다가 사람들은 '구관이 명관'이라고 생각하는 성향이 있어서 새 직장이 더 나은 급여와 혜택을 제시하는 경우에도 이직을 꺼린다. 한번 직장을 옮길 때마다 낯선 환경에서 친구도 없이 모든 걸 새로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280쪽
노동자가 행동하기를 꺼리게 만드는 것 중 한 가지는 직원을 '동료'나 '팀원'이라고 지칭하며 조직 속으로 흡수하는 경영진의 권력이다. ...... 내가 저임금 직장에서 가장 놀라고 불쾌하게 느꼈던 점은 기본적인 시민권과 자존감을 포기해야 하는 정도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심각하다는 것이었다.

283쪽
그러므로 자본주의 민주 국가에 속한 자유로운 노동자인 저임금 노동자들이 늘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을 하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전혀 자유롭지도 민주적이지도 않은 공간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 여기가 미국이라는 것을 잊고 미국이 옹호하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근무 시간이 끝날 때까지 입을 꼭 닫고 지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 ...... 만약 사람들이 당신을 게으름뱅이나 마약 중독자나 도둑놈처럼 믿지 못할 사람으로 취급한다면 당신 스스로도 자신을 신뢰할 수 없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 그런 동물들은 불안해하고 사회적 접촉을 꺼리며 두뇌에서 세로토닌 분비가 감소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방어를 해야 할 상황에서조차 싸우려고 들지 않는다. ...... 짐작건대 약물 검사, 끊임없는 감시, 관리자에게 듣는 '심한 질책' 등 수많은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가해지는 모욕적인 행위 덕분에 임금이 이렇게 낮게 유지되는 듯하다. 남들에게 무가치한 사람 취급을 오래 받다 보면 자기 같은 사람은 임금을 그만큼만 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284쪽
오히려 정반대로 임금으로 보나 회사에서 인정받는 정도로 보나 자기에게 돌아오는 보상이 너무나 미미한데도 자신의 직무에 놀라울 정도로 자부심을 가지고 일하는 걸 보면서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고 한편으로는 슬픈 생각도 들었다. 많은 경우에 노동자들은 일을 제대로 하려고 하는데 오히려 관리자들이 방해가 되었다. ...... 청소부들은 늘 시간에 쫓기다 보니 청소를 한 척만 해야 할 때 화가 났으며 ...... 

285쪽
경영자들은 자신의 위해 일할 노동자를 특정 범주의 사람들 중에서 뽑아야 하지만 그 범주의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불신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실제적인 경험보다는 계급 또는 인종에 관한 편견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앞서 설명한 억압적 경영을 해야 한다고 믿고, 개인의 영역을 침해하는 약물 검사와 인성검사를 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하지만 이 모든 일에 드는 비용이 엄청나고, 이렇게 억합하는 데 비용을 많이 쓰다 보니 임금을 낮게 유지해야 할 수밖에 없다.

291쪽
그 외에도 부자들이 빈민들과 같은 공간에 있거나 빈민들과 공유하는 서비스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는 점도 부자들이 빈민을 보지 못하는 이유로 꼽힌다. 공립 학교와 기타 공공 서비스의 수준이 점점 떨어지면서 여유 있는 사람들은 자녀들을 사립 학교에 보내고, 여가 시간을 전처럼 동네 공원에서 보내는 대신 회원제 헬스클럽처럼 출입이 통제되는 공간에서 보낸다. 그들은 버스나 지하철도 이용하지 않는다. 여러 인종이 함께 모여 사는 동네를 떠나 멀리 교외로, 주민들만 출입할 수 있게 담장을 둘러친 고급 주택 단지로, 혹은 경비가 있는 고층 아파트로 주거를 옮긴다.

296쪽
다른 사람들이 정당한 임금을 못 받으며 수고한 덕분에 우리가 편하게 살고 있다. 예를 들어 한 여자가 배를 곯는 덕에 당신이 더 싸고 편리하게 먹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여자가 먹고살기에도 형편없이 모자란 임금을 받으며 일하고 있다면 그 여자는 당신을 위해 지대한 희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 후기

 

311쪽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아주 기본적인 원칙을 정해서 사람들이 넘어졌을 때 그들을 발로 차지는 않겠다고 다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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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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