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냥 버스기사입니다 - 허혁


25쪽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신호를 주는 영감님이 있다. 안 타니까 어서 가라고 열렬하게 손을 저으신다. 고마운 마음에 기사는 정류장을 지나며 인사를 올린다. 가뭄에 콩 나듯 정류장 뒤로 몸을 숨겨주는 할머니도 있다. 갑이 을의 노동을 완전하게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미의 정점이라고 본다. 분명 그분들의 삶도 고단했을 것이다.
하루는 외곽에서 시내로 들어오는데 중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안 타니까 어서 가라고 손을 저어주고 있었다. 어린 학생이 손을 저어둔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 모습이 하도 예뻐서 자발적으로 탄력을 죽이며 다가가 국군의 날 도열하는 군인처럼 거수경례를 멋지게 붙여줬다. 한 손으로는 입을 가리고 다른 손으로는 빠이빠이 하며 수줍게 웃어주는데 정말 일할 맛 났다. 그 아이에게 멋진 퍼포먼스를 선물할 수 있었던 나의 유연함도 좋았다.

44쪽
원래 나쁜 기사는 없고 현재 그 기사의 여건과 상태가 있을 뿐이다.

나는 그냥 버스기사입니다 - 허혁 /윤리적 버스 승차
나는 그냥 버스기사입니다 - 허혁 /윤리적 버스 승차

 

47쪽
명상치료를 하면서 내가 나한테 속고 살았음을 알았다. 신념이니 자유의지니 하는 것들이 뇌과학 앞에서는 모두 소설이었다. 화가 나 있는 상태이기도 한 높은 베타파가 습관화되어 내 삶을 끌어왔던 것이고, 그 예민함과 날카로움이 다른 사람과 대비되는 나만의 매력인 줄 알고 살았는데 그냥 울화병 환자였다.

49쪽
내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닐 때 우리는 기도를 한다. 오늘도 무사히는 운전기사들의 겸허한 신앙고백이다. 나와 내 가족 먹고사는 일이 사람을 해치는 일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기도문이다.​

58쪽
어찌 보면 시내버스를 모는 것도 부족하나마 글을 쓰는 것도 모두 아버지 덕분이다. 아버지의 권위를 부정적으로 내면화해 돈과 권력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었고 지속적인 학대로 힘들어야만 사는 맛을 느끼는 자아를 형성했다는 점이다. 상처가 깊은 사람이 글을 쓴다.
버스에 오르는 영감님 중 십중팔구는 성난 아버지 얼굴을 하고 있다. 참으로 아픈 우리 근현대의 얼굴이다. 나이를 더할수록 아버지를 닮아가는 내 얼굴 또한 큰 고민이 아닐 수 없다.

64쪽
전주 시내버스에도 몇 가지 비하인드스토리가 있다. 승객 일부는 특별히 갈 데가 있어 버스를 타는 것이 아니며, 진짜 길을 몰라서 길을 묻는 것이 아니고, 젊은이가 반드시 음악을 듣기 위해 이어폰을 끼는 것은 아니라는 것 등이다. 

81쪽
당장 한 푼이 아쉬운 동료의 처지를 모르는 것은 아니나 정당한 임금 인상 투쟁을 통해 얻지 않고 알바로 부족한 생활비를 보충해버린다면, 우리의 노동이 합당한 대우를 받는 날은 점점 더 멀어진다고 본다.

81쪽
자기 능력의 70퍼센트를 쓰며 사는 사람이 제일 현명한 사람이라고 한다. 나머지 30퍼센트의 여유 공간에서 인간다운 면모가 나온다고 한다. 

96쪽
고여 있으면 아프고 흐르면 원만하다.

97쪽
없는 듯 살아야 하는 위치에서 보면 사람 됨됨이가 잘 보인다. 상대방이 돈도 없고 완력도 없어 보이면 굳이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한번 얕보이면 한도 끝도 없이 밀고 들어온다. ...... 총무님은 어떻게 저 혼자 머리로만 아름다울 수 있죠?

112쪽
비 좀 맞으면 큰일 나는 승객이 있다. 버스 선 뒤에 우산 접고 우산 털며 엉덩이부터 데민다. 자기 집 현관 들어갈 때 리듬이다. 그런 승객이 하차할 때는 잠시라도 비를 안 맞고 우산을 펼 수 있도록 뒷문을 정류장 박스 안에 정확히 맞춰준다. 도로 끝 진창에 신발 젖으면 안 되니까 인도에 최대한 붙여 세우는 것도 잊으면 아니 된다.

나는 그냥 버스기사입니다 - 허혁 /윤리적 버스 하차

 

116쪽
전주 시내버스에는 크게 두 가지 속도가 있다. 하나는 '적폐속도'이고 하나는 '공정속도'이다. 적폐속도는 효율이 우선인 속도이고 공정속도는 사람이 우선인 속도이다. 요약하면 적폐는 쟁이고 공정은 인이다. 언제나, 어느 곳에서든 쟁은 빠르고 인은 더디다. 막살기는 쉽고 착하게 살기는 어렵다. "우회전은 어느 때고 할 수 있지만 좌회전은 신호 떨어져야 갈 수 있다."

147쪽
신호 떨어지면 자기 눈 믿고 대차게 나가줘야지 무슨 이유로 멈칫멈칫 바로 나가지 않는 건지 뒤에서는 뛰다 죽을 일이다. 15초다. 엄마한테 전화해서 물어보고 좌회전할래?

160쪽
현재의 친절기사 선정 방식은 비록 좋은 의도로 하고 있다 해도 부끄러운 일이다. 사회 전반의 시스템 문제를 들쑥날쑥한 인간의 품성에 기대어 해결해보려는 것은 너무 궁색하다. ......
버스기사는 운전원이면서 동시에 승무원이고 청소원이다. ...... 당신 같으면 하루 세 번 이상 혼자 사무실 청소 다 하고 수시로 민원인들 상대해가며 생명을 담보한 주 업무는 한시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언제나 친절할 수 있겠는가! ......
이왕 주기로 맘먹은 돈이라면 선진적으로 승무수당을 신설해 그림자 노동에 대한 노고를 알아주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평가에 의해 차등을 두기보다 똑같이 나눠주고 앞으로 더 잘해보자고 같이 파이팅이라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187쪽
이와 같이 기사와 승객의 시각이 다른 경우가 많다. 승객의 눈에는 본인이 탈 버스만 보이지만 기사는 승객과 도로와 차량의 흐름을 함께 살펴야 한다. ...... 생각 없이 비난하거나 평가하지 말고 다음과 같은 시인의 마음으로 버스를 타면 좋겠다.
버스에 오르면 흔들리는 재미에 하루를 산다.
-신동엽의 시 <영> 가운데

202쪽
막연하게 시를 써보고자 했으나 내 영혼이 시에 닿질 못했다. 이미지를 빌려 사는 얘기나 좀 해보려고 시작한 사진이었다. 조금 배우다가 지금은 그냥 '오토'로 막 찍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기를 들고 있는 것과 내려놓은 것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다. 사진기를 내려놓았다면 누가 버스기사를 불러 산해진미를 대접하겠는가! 삶이 예술이 된 뒤로 그토록 밝히던 돈 생각이 잘 안 나는 것도 신기하다. 
예술은 너무 쉽다. 그냥 하면 된다.

219쪽
시내버스를 타고 시내버스를 찍으러 다니면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기사가 승객이 되고 그 승객이 다음 날 기사가 되면 운전의 품질이 향상된다. 낯선 곳에서 나를 돌아보는 것이 여행이라면 멀리 안 가고 여행을 즐길 수 있어 좋다. 카메라를 들고 나서면 나를 포함한 사물의 일상이 충분히 낯설어진다. 흐르는 시간을 정지화면으로 보는 재미가 크다.

226쪽
고단한 삶에 매번 딴죽을 걸어 우리를 깊은 나락으로 빠트리는 무의식은 꿈 분석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의 실수에 상식선을 넘어 격분하거나 어떤 사람이 왠지 이유 없이 미우면 그 미운 점이 자기의 무의식이다. 무의식은 결코 인정하기 싫은 자기의 구린 속마음이다. 그런 연유로 분석을 통해서 그 사람의 무의식을 알려주면 얼굴이 시뻘게지면서 칼 들고 달려들기 쉽다. 나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고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을 죽도록 경멸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무의식이다.


[네이버 책] 나는 그냥 버스기사입니다. - 허혁

 

[다음 책] 나는 그냥 버스기사입니다 - 허혁

 

Posted by 몽자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