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가는 마을 - 이바라기 노리코



13쪽​
​행방불명의 시간

인간에게는
행방불명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속삭이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삼십 분도 좋고 한 시간도 좋고
멍하니 혼자
외따로 떨어져
선잠을 자든
몽상에 빠지든
발칙한 짓을 하든

전설 속 사무토 할머니처럼 
너무 긴 행방불명은 곤란하겠지만
문득 자기 존재를 감쪽같이 지우는 시간은 필요합니다

25쪽
버릇

 

옛날에 심술 맞은 여자애가 있엇다
괜한 일로 사람을 못살게 굴고
머릴 잡아당기고 볼을 꼬집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이이잇!

그 아이 앞에선 꼼짝 못하고
명색이 나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못된 계집애라고만 생각했는데
졸업식 날 그 애가 쪽지를 건넸다

사실은 너를 좋아했었어
너랑 친구가 되고 싶었는데
서툰 글씨로 쓰여 있었다
나는 맥이 풀려서 아니 풀릴 것만 같아서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솔직하게 
말했담 좋았을 걸
너무 늦었어 기쿠짱! 이젠 손쓸 도리가 없어
소학교 졸업 후 너는 곧 게이샤 견습생이 됐지

이후 욕하고 괴롭히고 짓궂게 구는 
갖가지 일을 당할 때마다 마음속으로
이 사람 어쩌면 날 좋아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37쪽
​총독부에 다녀올게


한국의 노인 중에는
지금도
화장실에 갈 때
유유히 일어나
"총독부에 다녀올게"
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던가
조선총독부에서 소환장이 오면
가지 않고는 못 버티던 시대
불가피한 사정
이를 배설과 연결 지은 해학과 신랄함

서울에서 버스를 탔을 때
시골에서 온 듯 보이는 할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두루마기를 입고
검은 갓을 쓴
소년이 그대로 자라 할아버지가 된 듯
순수 그 자체의 인상이었다
일본인 몇 명이 일본어로 몇 마디 나누었을 때
노인의 얼굴에 공포와 혐오
스치는 것을 보았다
어떤 말보다도 강렬하게
일본이 한 짓을
그때 보았다

67쪽
낙오자

 

낙오자
과자 이름에 붙이고 싶은 상냥함
낙오자
지금은 자조를 곁들여 별 볼일 없다는 뜻
낙오되지 않기 위해 
어리석게도 쓸쓸히 수업을 받았지
낙오되는 것이야말로
멋과 향기로 그윽한데
낙오자의 열매
너그럽게 포용할 줄 아는 풍요로운 대지
그렇담 너부터 낙오되어봐
그러죠 여자로선 이미 오래전에 낙오되었어
낙오되지 않고 탐스러워져서
호락호락 잡아먹힐 줄 알고
낙오자
결과가 아니라
낙오자 
화려한 의지로 살라

77쪽
자기 감수성 정도는

바삭바삭 말라가는 마음을
남 탓하지 마라
스스로 물주기를 게을리해놓고

서먹해진 사이를
친구 탓하지 마라
나긋한 마음을 잃은 건 누구인가

일이 안 풀리는 걸
친척 탓하지 마라
이도 저도 서툴렀던 건 나인데

초심 일어가는 걸
생계 탓하지 마라
어차피 미약한 뜻에 지나지 않았다

틀어진 모든 것을 
시대 탓하지 마라
그나마 빛나는 존엄을 포기할 텐가

자기 감수성 정도는 
스스로 지켜라
이 바보야

79쪽
질문

곰곰 생각해보면
난 대체 뭐 하고 있는 걸까
곰곰 생각해보면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마라 글쎄 새들은 어때
곰곰 생각해보면
어느새 바꿔치기 당한 책임감과 찬란한 생
곰곰 생각해보면
하나같이 무언가에 홀린 듯한데
한번 곰곰 생각해보면
이 고민 저 고민에 반세기가 훌쩍 지나
청춘의 질문은 그 옛날 그대로
더욱 갈고 닦이어 파아랗게 빛난다

101쪽
기대지 않고

이젠
만들어진 사상에 기대고 싶지 않아
​이젠
만들어진 종교에 기대고 싶지 않아​
이젠 

만들어진 학문에 기대고 싶지 않아​
이젠 

그 어떤 권위에도 기대고 싶지 않아​
긴 세월 살면서 진정으로 배운 것은 그 정도일까
나의 눈과 귀
나의 두 다리로만 선다 해도
나쁠 것 없다

기댈 것이 있다면
그건
의자 등받이뿐

121쪽
말하고 싶지 않은 말

마음속에 강한 압력을 가해
남몰래 감춰둔 말
소리 내 말하면
글로 써내면
순식간에 빛이 바래리라

그 말로 인해
나 여기 있으나
그 말로 인해
나 살아갈 힘을 얻으나

남에게 전하려 하면
너무도 평범해져
결코 전하지 못하리라
그 사람 고유의 기압 내에서만
생명을 얻는 말도 있는 법이다

한 자루의 초처럼
격렬히 타올라라 완전히 타버려라
제멋대로 
어느 누구의 눈에도 닿지 않고

143쪽
되새깁니다
- Y.Y에게


어른이 된다는 건
약아지는 거라고
믿었던 소녀 시절
몸가짐이 우아하고
발음이 정확한
멋진 여성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은 제가 애쓰고 있단 걸 알아챘는지
무심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순수함이 중요해
사람을 만날 때나 세상을 대할 때나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을 때
타락한단다   추락해가는 걸
감추려 해도 감추지 못하는 사람을 많이 보았지

저는 뜨끔했습니다
그리고 깊이 깨달았습니다
어른이 되어 갈팡질팡해도 되는 거구나
서툰 인사    못나게 얼굴이 빨개지고
실어증   자연스럽지 못한 언동
철없는 꼬마의 욕설에도 상처 입고
믿음 안 가는 생굴 같은 감수성
그런 걸 단련할 필요가 없었구나
나이 들어도 갓 핀 장미처럼   보드랍게
밖으로 펼쳐지는 것이야말로 어려운 일
세상 모든 일
온갖 좋은 일의 핵심에는
떨리는 연약한 안테나가 숨어 있다 반드시......
저도 예전 그분과 비슷한 나이가 되었습니다
문득 떠올리며
지금도 가끔씩 그 의미를
가만히 되새길 때가 있습니다

177쪽
(팬티 한 장 차림으로)

팬티 한 장 차림으로
오락가락한대도
품위 있는 사람은 있기 마련입니다
함게 사는 동안에
배우자가 그리 생각토록 하는 건
지극히 어려운 일일 텐데
당신은 수월히도 잘 해냈지요
어깨에 힘 한번 주지 않고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쭉 생각했습니다
채 따라잡기도 전에 떠나가는군요
단 한 가지 위안은
당신이 살아 있을 때에
제가 당신의 가치를 이미 알았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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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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