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로 나는 존재하는 고양이 - 진중권

81쪽
과학도 기술도 없던 시절, 문제 해결의 유일한 방식은 '원인'을 찾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범인'을 찾아 처형하는 것뿐이었다. 교란에 빠진 자연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사회는 적당한 희생양을 찾고 있었다.

90쪽
인간을 대신하여 죽어간 또 다른 존재는 동물이었다. 이 주술 신앙은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에 이미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굳어져, 교회에서도 그 관습을 없애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그것을 기독교화하여 교회 안에 품는 길뿐이다. 성탄절, 부활절, 추수감사절과 같은 교회의 명절은 대부분 기독교가 생기기 훨씬 전부터 동지, 추분, 춘분과 같은 절기에 다산을 기원한는 주술적 목적으로 행해졌던 이교의 여러 축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 세월이 흘러 주술이 종교로 변모할 즈음이 되면, 동물을 태워 죽이는 행위의 의미도 달라진다. 이때부터 동물은 인간의 죄를 대신해 죽어가기 시작한다. 이른바 희생양 제의다. 동물을 죽여 태우는 '번제'의 관습은 대부분의 문화권에 존재한다. 이 잔인한 관습은 예수가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렸다는 기독교의 교리에까지 그 흔적을 남겨놓았다.​

126쪽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고양이는 고양이로다.'

135쪽
"백성은 나의 동포이고 만물은 나의 동반자이다. 초목은 지각이 없어 피와 살을 가진 동물과 구별되니, 그것을 먹고 살아도 괜찮다. 하지만 동물로 말하자면 살기를 원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마음이 사람과 똑같은데 또 어찌 차마 해칠 수 있겠는가?"(<성호사설>, 김대중 옮김)

159쪽
고양이는 "생각이 깊고 사색적"이다. 고양이가 철학적 동물이라는 것은, (1) 고양이는 하는 일이 없다 (2) 그런데도 잠이 많다는 두 가지 명백한 사실에서 간단한 추론만으로 쉽게 입증된다. ...... 보라, 고양이는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뭔가 골똘히 생각하며 보낸다.

264쪽
이런 이름들을 붙일 때 우리는 사실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 행세를 하는 셈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창 2:19)

265쪽
하지만 신이 인간에게 주신 권한도 고양이 앞에서는 효력을 잃는다. 고양이에게는 또 하나의 이름, 즉 "오직 고양이 혼자만 알고, 절대 말해주지 않는 이름"이 있기 때문이다. 이게 고양이의 진짜 이름이다. 고양이의 이름을 짓는 것은 쉬운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려운 일도 아니고, 그냥 불가능한 일이다. 고양이의 진짜 이름은 우리가 붙이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흔히들 자기가 고양이 이름을 짓는다고 생각한다. 착각하지 마라. 고양이는 제 이름을 스스로 갖고 태어난다.

269쪽
'내가 고양이와 놀 때에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시간을 보내는 것인지,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인지 누가 알겠는가?'
철학자 몽테뉴의 말이다 .그가 행여 무료해할까 놀아준 고양이는 '마담 배너티'라는 이름의 여자아이였다. 왜 이름을 하필 '허영vanity'이라 지었을까? 알 수 없다. 고양이를 볼 때마다 인간의 허영을 경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316쪽
되기-능력은 오늘날 창의적인 소수의 전유물처럼 되어버렸지만, 인류의 유년기에 인간의 동물-되기는 매우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 사실 유년기에는 우리도 예술가들 못지않게 뛰어난 되기-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 시절 우리는 그저 두 팔을 벌리는 것만으로 비행기가 될 수 있었다.

285쪽
과거에는 만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을 신이 주신 권리로 정당화했지만, 신을 믿지 않게 되면서 인간의 지배권을 정당화하는 새로운 논리가 필요해진다. 그래서 '이성'을 새 근거로 들이댄 것이다. ...... 인간에게 동물이 갖지 못한 '이성' 있다면 동물에게는 인간이 갖지 못한 다른 능력들이 있다. 왜 여러 능력 중에서 '이성'만이 그런 특권을 누려야 하는가? 인간이 이성을 가졌다는 사실에서 논리적으로 동물에 대한 지배권이 나오지는 않는다. 나아가 인간이 '이성'을 가졌다는 사실을 고작 동물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논리로 써먹는 게 과연 얼마나 이성적인 짓일까? ...... 에른스트 하우슈카(1926~2012)의 말대로,

'인간들이 동물이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한, 동물들은 인간이 생각하지 못한다고 느낄 것이다.'

307쪽
하지만 '차이'의 인정이 '차별'의 정당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데리다처럼 차이의 목록을 늘린다고 동물과 인간 사이의 경계가 더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외려 차이의 수를 증식시킬 때 둘 사이의 경계는 요동하게 된다. 가령 아리바바는 도둑이 자기 집 대문에 해놓은 표식을 지우는 대신에 동네의 모든 집 대문에 표식을 함으로써 식별의 기능 자체를 사라지게 하지 않았던가. ...... 데리다는 굳이 동물을 인간화하지 않는다. 동물을 인간과 대등한 주체로 만들기 위해 그는 동물과 인간의 차이를 지우지 않고 외려 그 차이를 증식시킨다.

310쪽
인간과 동물 사이에 높은 벽이 생긴 것은 17세기 이후의 일. 이 시기에 사람들은 동물과 구별되는 특징을 통해 자신을 '인간human'으로 정의하기 시작한다. 이를 우리는 '휴머니즘'이라 부른다.



322쪽
진정한 의미의 고양이-되기는 자신의 영혼과 정신에 고양이성을 구현하려는 노력에서 출발한다.
타인의 사랑을 바라나 굳이 그것을 구걸하지는 않고, 속으로는 따뜻해도 겉으로는 늘 까칠하며, 이기적으로 보이나 실은 그 누구보다 이타적이고, 아무리 친해져도 끝내 어떤 알 수 없는 구석을 남기며, 사회 안에서 살면서도 거기에 완전히 동화되지는 않는 존재. 고양이성을 구현한다는 것은 이렇게 사회 속에서 살면서도 고양이 특유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을 가리킨다. 고양이에게 배움으로써 우리는 더 매력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다음 책] 고로 나는 존재하는 고양이 - 진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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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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