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 김정운


34쪽
시선은 곧 마음이다. 내 시선이 내 생각과 관심을 보여준다는 이야기다. 다른 동물들에 비해 인간 눈의 흰자위가 그토록 큰 이유는 시선의 방향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흰자위와 대비되어 시선의 방향이 명확해지는 검은 눈동자를 통해 인간은 타인과 대상을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함께 보기joint-affection'다. 인간의 의사소통은 바로 이 '함께 보기'에 기초한다. ...... '훔쳐보기'는 '함께보기'가 어려울 때 흥행한다!

52쪽
하나 더, 언젠가부터 한국 사람들은 '창조'라는 단어를 언급하지 않는다. 이전 정권에서 '창조'를 참으로 희한하게 사용했기 때문이다. 

64쪽
시나 소설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바로 이 같은 단정적 표현들 때문이다. 삶의 무게에 주눅 든 개인들은 감히 할 수 없는 통찰적 선언들을 작가들은 앞뒤 안 가리고 과감하게 내던진다.
...... 사회는 '담론적'이어야 하고 삶은 '단언적'이어야 한다.

78쪽
우연은 아니다. 평생 좋아하며 듣게 되는 음악은 청소년기가 끝나고 청년기가 시작되는 20세 전후에 들었던 것이 대부분이라는 심리학 연구 결과가 여럿 있다. 정서적으로 가장 예민한 시절에 듣는 음악인 까닭이다.

82쪽
아주 기초적인 셀프 '인지 치료'다. 간단한 덧셈과 뺄셈은 암산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복잡한 계산은 노트에 수식을 적어가며 풀어야 한다. 마찬가지다. 다양한 경로로 축적된 '공연한 불안' 역시 '개념화'라는 인지적 수식 계산을 통해 처리해야 한다. 생각이 복잡할 때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이유는 바로 이 '개념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85쪽
수시로 자신의 삶을 규정하고 있는 전제들을 성찰하며 상대화해야 명함이 사라져도 당황하지 않는다. '탈맥락화'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탈맥락화'는 본질에 대한 질문이다. 철학에서는 '자기 성찰'이라 하고, 심리학에서는 '메타 인지meta-cognition'라 한다. 미술에서는 '추상Abstraktion'이라고 한다.

98쪽
열등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적'을 만드는 것은 가장 게으른 방식이다. ...... 타인들과 공동체를 이뤄 살아가는 한 열등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마음속에 깊이 박힌 대못'처럼 그저 성찰의 계기로 품어야 한다.

115쪽
'나쁜 것'이 분명해야 그것을 제거할 용기와 능력도 생기는 것이다. '나쁜 것'이 막연하니 그저 참고 견디는 것이다. 그러나 무조건 참고 견딘다고 저절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내 스스로 아주 구체적으로 애쓰지 않으면 '좋은 삶'은 결코 오지 않는다.

127쪽
책은 다르다. 중요한 부분에 밑줄을 긋는다. 그 옆의 빈 곳에 떠오르는 내 생각을 적는다. 밑줄을 긋고 빈 곳에 내 생각을 문자화하는 행위는 매우 성찰적이다. '내가 왜 이 구절을 중요하다고 생각했는가에 대한 생각'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이 같은 '내 생각에 대한 생각'을 심리학에서는 '메타 인지'라고 한다.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자기 성찰'의 메커니즘과 '밑줄 긋는 독서'의 메커니즘이 심리학적으로 동일하다는 이야기다.

139쪽
죄다 남 조롱하고 비아냥대는 이야기뿐이다. 희한하게 '사회정의'로 정당화하며 즐거워한다. '나쁜 이야기'에 서로 '좋아요'를 죽어라 눌러댄다.

139쪽
도대체 우리는 왜 이러고 사는 걸까? 타인의 관심을 얻기에 '나쁜 이야기'가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원시시대를 한번 생각해보자. '저기 바나나가 있다'는 정보와 '저기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정보 중에 내가 지금 살아남는 것과 관련해 어느 이야기가 더 중요할까? ...... '나쁜 이야기'에 끌릴 수밖에 없는 타인의 반응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불안한 인간이 너무나 많은 까닭이다. 불안한 이들이 불안을 유포해 혼자만 불안하지 않으려는 아주 웃기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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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쪽
'리스펙트'의 화용론은 사뭇 다르다. '수평적 상호작용'의 구체적 전제 조건이 되는 '인정'의 맥락에서 쓰이는 단어다. '나는 당신을 참으로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혹은 '나는 당신 의견을 듣고 내 생각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와 같은 열린 상호작용의 규칙이 바로 '리스펙트'다. 서구 사회의 일상에서 강조되는 '매너' 혹은 '교양'이란 바로 이 리스펙트의 활용 규칙이다. ...... 문화심리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서구의 근대화는 이 '리스펙트'를 제도와 관습으로 구체화하는 과정이었다. 이를 독일의 철학자 게오르크 헤겔은 '인정 투쟁'으로 설명한다.

198쪽
프로이트의 '콤플렉스'와 더불어 현대인의 삶을 가장 잘 설명하는 개념이 있다면 마르크스의 '소외'다. 자신이 만든 생산물과는 아무 관계 없이, 그저 노동의 대가로 받는 임금으로 살아야 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은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 심리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다. 노동의 결과가 전혀 확인되지 않는 삶을 마르스크는 '소외된 삶'이라 했다. ......사무직에서 일했던 사람일수록 손으로 직접 하는 일을 배우는 것이 좋다. 두 번째 인생에는 노동의 결과를 눈으로 직접 판단하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구체적인 일을 해야 심리적으로 소외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201쪽
최근 내가 여수시로 주소를 이전한 이유도 이 착한 도시에 세금을 제대로 내기 위해서다.

201쪽
내가 서울에서 운전하며 가장 괴로울 때는 차선을 바꿀 때다. 다들 '차선 바꾸겠다는 신호'를 '빨리 달려오라는 신호'로 받아들인다.

202쪽
그래서 자동차 안이 그렇게 행복한 거다. 한 평도 채 안 되지만 그 누구도 눈치 볼 필요 없는 나만의 공간이다. 밟는 대로 나가고, 서라면 선다. 살면서 이토록 명확한 '권력의 공간'을 누려본 적 있는가? 그러니 도로에서 누가 내 앞길을 막아서면 그토록 분노하는 거다. ......
한국 남자들에게도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한국 남자의 이 몹쓸 분노와 적개심은 '아파트'라는 매우 한국적인 주거 공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전통 가옥에는 '사랑방'이라는 가부장적 공간이 아주 폼 나게 있었다. 그러나 아파트가 들어오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남자의 공간은 사라지고 아주 못된 가부장적 습관만 남았다.

205쪽
어느 날부터 아이들이 자기 방문을 잠그기 시작한다. 주체적 개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달라는 거다. 공간이 있어야 주체 의식도, 책임감도 생긴다. 

206쪽
'자기만의 방' 출입문은 꼭 밀어서 여는 문이어야 한다. 조금씩만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215쪽
거참, 자기 콘텐츠만 확실하면 '시선의 자유'와 '목구멍이 포도청' 사이의 모순은 얼마든지 해소할 수 있는 세상이다.

221쪽
지금 내 삶이 지루하고 형편없이 느껴진다면, 지금의 내 관점을 기준으로 하는 인지 체계가 그 시효를 다했다는 뜻이다 .내 삶에 그 어떤 감탄도 없이, 그저 한탄만 나온다면 내 관점을 아주 긴급하게 상대화시킬 때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 구체적 맥락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의 추상적 사고와 창조적 문제 해결 능력은 '먼 곳', '높은 곳'을 조망하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래서 인간은 복잡한 문제가 생기면 눈을 위로 치켜뜨며 생각하는 거다. ...... 자주 까먹고, 물건을 손에서 놓치고, 물을 쏟고, 오가며 문짝에 자꾸 부딪힌다고 불평할 일이 아니다. 가까운 것들에 대해 둔해지는 만큼, 멀고 높은 곳을 바라보는 거시적 안목과 탈맥락적 시선이 가능해진다. ...... 시간 날 때마다 멀리 봐야 한다. 그래야 제한된 우리의 삶을 적극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창조적 통찰이 가능해진다.

230쪽
섬의 내 '미역창고'에 가려면 그야말로 산 넘고 물 건너야 한다. 섬에 다리가 놓이면 좋겠다는 생각도 자주 한다. 그러나 섬에 다리가 놓이면 더 이상 섬이 아니다. 다리는 그저 익숙한 '직선의 유혹'일 따름이다. 내가 섬에 들어서는 순간 그토록 마음이 평온해지는 이유는 섬의 '착한 곡선' 때문이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해안선을 따라 걸으며 나를 괴롭혔던 모든 문제가 이 '직선'과 관계되었음을 깨닫는다. 참 치열하게 살았다. 부딪히면 뚫었다. 안 되면 되게 했다. 무슨 일이든 맡기면 해냈다. 그러나 내 직선적 행위가 타인에게 상처가 되는 줄은 전혀 몰랐다. 내가 타인에게 입힌 상처는 어느 순간 내 상처로 돌아왔다.
이제는 좀 천천히 가도 된다. '직선의 모더니티'는 평균수명이 채 50세도 안 되던 시절의 이데올로기다. 빨리 죽으니, 서둘러 가야 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재수 없으면(?) 백 살까지 산다. 평균수명 100세 시대에는 '하면 된다'가 아니다. 되면 하는 거다!
이렇게 섬이 휘돌아 나가면 나도 모르게 <아리랑>을 부른다.
"나아를 버어리고 가아시는 님은..."

235쪽
사태의 비관적 전망을 예고하는 것은 '지식인'의 의무다. 이런 비관주의는 '지적 우월함'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나름 지식인'을 아침에 만나면 하루 종일 뭔가 불편한 거다. 스스로의 삶에 대한 비관주의적 태도는 아주 치명적이다. '행복한 지식인'은 형용모순이다.

249쪽
낯선 곳에서의 삶은 그 곳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이 누군인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273쪽
책장에 책이 그렇게 많은 이유는 내가 알고 싶은 것이 너무 많다는 뜻입니다.

273쪽
수시로 책장의 책들이 '헤쳐 모여'를 반복합니다. 내 관점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책장의 책을 다시 정리하는 행위 자체가 내겐 '지식의 편집' 과정입니다. 이전에 전혀 관련 없던 책들이 새롭게 연관되어 붙어 있게 된다는 것은 두 책이 담고 있는 지식을 연결시켜주는 내 '메타 언어'가 새롭게 생겨났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279쪽
외로움을 담보로 해야 '책을 매개로 한 내적 대화'가 진실해집니다.


[네이버 책]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 김정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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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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