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는 어떻게 몰락하는가 - 진중권

67쪽
이렇게 정치에 사랑이 개입하니 정치의 본질은 왜곡될 수밖에. ...... "당신을 지켜드리기로 맹세합니다. 우리를 믿으세요." 원래 이는 대통령이 국민에게 해야 할 얘기다. 그런데 그 얘기를 거꾸로 국민이 대통령에게 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팬 객체는 투사된 자아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대통령을 지키는 게 곧 자기를 지키는 일이 되는 것이다.

75쪽
한때 진보주의자들은 인터넷의 민주주의적 속성에 열광했다. 하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 인터넷의 주인이 된 것은 네티즌이 아니라 검색엔진이었다. '깨어 있는 시민'들은 '구글신'에게 데이터를 갖다 바치는 존재가 되었다. 먼저 기업들이 이 데이터들을 마케팅에 활용했고 정당들도 곧 기업의 마케팅 기법을 벤치마킹했다. 그 결과 인터넷이 정치의 '주체'로 세운 유권자들은 빅데이터를 통해 다시 마케팅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75쪽
사실 정치 마케팅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정치권에서는 오래전부터 '여론조사'라는 이름으로 늘 시장조사를 해왔기 때문이다. 다만 전통적 여론조사가 공적 사안에 대한 유권자의 의견을 물었다면, 빅데이터를 활용한 여론조사는 매출(득표)을 위해 유권자들의 사적 니즈를 파악하는 판매전략에 가깝다. 

78쪽
정치의 마케팅화는 정당의 이념과 정책에 대한 지지를 '브랜드 충성도(brand royalty)'로 바꾸어놓는다. 민주당 지지자들은 더 이상 '노무현 정신'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노무현'이라는 브랜드뿐이다. 민주당을 맴도는 두 위성정당(더불어시민당, 열린민주당)의 비례 후보들이 노무현 묘역을 찾은 것은 브랜드 사용권을 얻기 위한 경쟁으로 볼 수 있다. 사용권이 확보되면 당연히 브랜드를 이용한 요란한 마케팅이 시작된다.
심지어 남의 브랜드를 도용하기도 한다. 열린민주당에서는 엉뚱하게 광고에 노회찬의 사진을 실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노회찬 정신'이 아니라 '노회찬'이라는 브랜드이고, 그 브랜드는 물론 정의당의 표를 빼앗기 위한 것이다. 그들의 마케팅을 통해 노회찬은 졸지에 조국이 되었다. 둘 다 정치검찰의 희생자라는 것이다. 

86쪽
성격을 달리하는 정치와 게임을 같은 것으로 혼동할 때 대중은 모종의 착란에 빠지게 된다. 문제는 그 착란이 사회를 두 개의 적대적 진영으로 찢어놓는다는 데에 있다. 정치에는 이른바 중도층이 존재한다. 하지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토트넘이 대결하는 경기장에 어느 편도 아닌 이를 위한 좌석은 없다. 정치에는 스윙보터가 존재한다. 하지만 경기 도중 응원하는 팀을 바꾸는 팬은 존재하지 않는다. ...... 이성은 격정으로 대체되고 개인은 집단에 흡수된다. 논쟁이 전쟁으로 바뀌면 논리보다 무력이 중요해진다. 

87쪽
게임에서는 승리 자체가 목적이나, 정치에서 승리는 그저 수단일 뿐이다. 정치의 목적은 그 승리로 얻은 권력으로 공동체의 과제를 해결하는 데에 있다. 하지만 정치가 게임이 되면 이 본연의 목적은 뒷전으로 밀린다. 정치인과 유권자 모두 또 다른 승리를 위해 바로 다음 게임에 돌입한다.

143쪽
오늘날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동성애 자체가 자연의 질서에 속하는 것으로 본다. 선교사들은 이 땅에 먼저 병원과 학교부터 세웠으나, 그 후예들은 구약으로 과학을 대신하고 기도로 병원을 대신하려 한다.

152쪽
실제로 여론조사를 해보면 국민의 70퍼센트가 집회금지 조치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국민의 기본권을 다수결로 제한할 수는 없는 것이다. ...... 타인의 집회에 '반대'하는 것과 그 집회를 '금지'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153쪽
"나는 당신의 견해에 반대한다. 그러나 당신이 반대할 권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 볼테르의 것으로 (잘못) 알려진 이 말은 보수와 진보의 차이를 떠나 모든 이가 지켜야 할 민주주의의 원칙이다.

160쪽
원래 차별받는 소수의 편에 서는 것은 진보주의자의 의무에 속한다. 하지만 민주당은 통진당의 후신인 민중당과 트랜스젠더 후보를 낸 녹색당을 비례연합정당 논의에서 배제했다. "이념 문제나 성 소수자 문제로 소모적 논쟁을 일으킬 정당과의 연합에는 어려움이 있다." ...... 진보의 가치를 실현하는 싸움을 이제 그들은 "소모적 논쟁"이라 부른다. 관철할 진보적 가치를 내버렸으니 섬세한 언어전략 따위가 어디에 필요하겠는가.

164쪽
플라톤의 대화편 <고르기아스>에는 이후의 역사에서 자주 반복될 사건의 원형이 등장한다. 거기서 고르기아스는 감히 소크라테스에게 제 말솜씨를 뽐낸다. 목숨이 위태로운데도 수술을 안 받겠다고 버티는 환자가 있었단다. 의사도 설득하지 못한 환자를 자신이 설득해 수술을 받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와 그 의사가 공직에 출마하면 민회에서 누구를 뽑겠습니까?" 우쭐대는 그에게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대꾸한다.
고르기아스여, 의사는 의술에 관한 참된 지식(에피스테메, episteme)이 있지만, 그대에게는 그 지혜가 없다오. 그런데도 남을 설득했다면 그보다 위험한 일이 있겠는가.

167쪽
선전(propaganda)은 이성에 호소하는 논리적 설득의 방식이고, 선동(agitation)은 감정에 호소하는 정서적 설득의 방식이다.

169쪽
미국 전략사무국(OSS)의 보고서는 나치 선전의 "기본 규칙"을 이렇게 요약한다. "절대로 대중의 흥분을 가라앉히지 말 것. 절대로 자신의 결점이나 오류를 인정하지 말 것. 절대로 적에게도 뭔가 좋은 점이 있음을 인정하지 말 것. 절대로 대안의 여지를 남기지 말 것. 절대로 비난을 용인하지 말 것. 한 번에 하나의 적에 집중하여 그에게 잘못된 모든 것의 책임을 뒤집어씌울 것. 사람들은 작은 거짓말보다 큰 거짓말을 더 잘 믿는다." 그런데 이 상황, 어딘지 낯익지 않은가.

189쪽
카를 슈미트의 민주주의, 다수결로 환원된 민주주의는 '공공선'의 공화주의 이념을 파괴하고, 소수 존중이라는 자유주의 원칙을 말살한다. 이 두 가치를 포기한 민주주의는 자살한다.

198쪽
친문 완장파에게는 모든 개별적 경우가 규칙을 새로 제정해야 할 제헌적 상황이다. 그래서 매 순간 자기들은 혁명가다. 그들은 자기들의 기회이성이 원칙이성보다 우월하다고 믿는다. 원칙이성은 기존질서를 수호하는 이론가들의 것이고 기회이성은 세상을 바꾸는 실천가들의 것. 그래서 규범을 어기고도 부끄러워 하지 않고 외려 자랑스러워하는 것이다.

214쪽
소련의 예가 보여주듯이 혁명은 성공하는 순간 반혁명이 된다. 권력을 잡은 혁명은 그 권력으로 먼저 혁명가들부터 제거하기 떄문이다. 브레히트도 이를 모르지 않았다. <의심을 찬양함>(1939)에서 그는 이렇게 경고한다.
이제 지도자가 된 당신은 잊지 말아라. 
당신이 옛날에 지도자들에게 의심을 품었기에,
당신이 지금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을!
고로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의심하는 것을 허용하라!

227쪽
대통령의 답답함은 "고구마" 화법의 문제가 아니다. 말을 더듬어도 연설은 감동적일 수 있다. 그러려면 말에 에토스(ethos)가 실려야 한다. 그런데 대통령은 그것을 내버렸다. 아무리 시인을 데려다 치장해도 에토스가 빠진 말을 공허할 뿐. 그 많은 발언 중 인용할 게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다." 한때 감동적이었던 이 말도 요즘은 비아냥거림에 인용된다.

232쪽
사실 문 대통령에게 뜨악한 적이 몇 번 있었다. 2017년 4월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 제 팬덤이 저지르는 이 패악질을 그는 "경쟁을 더 재미있게 만들어주는 양념"이라 표현했다. ......
두 번째는 민주당 대선후보로서 세월호 분향소를 방문해 방명록에 "고맙다"라고 적었을 때였다. "얘들아 너희들이 촛불광장의 별빛이었다. 너희들의 혼이 1000만 촛불이 되었다. 미안하다. 고맙다." ......
하지만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결정적 계기는 신년 기자회견이었다. 거기서 그는 조국 전 장관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라고 했다. ...... 기자회견은 공적인 자리. 

244쪽
대통령은 신임 정은경 본부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러 청주에 있는 질병관리본부를 직접 찾았다. 이 이벤트를 탁현민은 "권위를 낮출수록 권위가 더해지고 감동을 준다"라고 자평했다. 
그가 자백하듯이 문 대통령이 권위를 낮춘다면 그것은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다. ...... 권위주의 파괴의 연출이 필요한 것은 정권이 여전히 권위주의적이라는 얘기다.
...... 노무현은 권위주의 타파를 '실행'했지만, 문재인은 권위주의 타파를 '연출'한다. "뭉클, 울컥"으로 표현되는 친문 대중의 감동은 실은 '그렇게 높으신 분이 이렇게 낮은 곳에 임하신' 데에 대한 신분제적 감읍에 가깝다.

256쪽
무능하나 순결했던 진보는 어느새 유능하나 부패한 보수로 변신했다.

 

260쪽

하지만 거울 속의 온전한 자아는 성장을 통해 도달해야 할 목표일 뿐, 현실의 아기는 여전히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존재다. 이상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 사이의 이 괴리는 아이를 불쾌하게 만든다. 그 괴리를 극복하려고 아기는 자기를 이상적 자아와 공격적으로 동일시하고(identify), 그것을 통해 정체성(identity)을 갖게 된다. 정체성이란 이렇게 현실적 자아를 이상적 자아로 착각하는 오인의 결과로 발생한다.

 

263쪽

민주당의 주류인 586세대가 바로 그런 경우로 보인다. 그들은 자기 모습이 곧 이상적 자아라고 굳게 믿는다. 상상계 속에서 그들은 여전히 과거의 정의로운 민주투사다. 하지만 실재계의 그들이 그렇게 고결할 리는 없다. 그들도 뇌물을 받고, 비리를 덮고, 여론을 조작하고, 상장을 위조하며, 높은 분을 위해 선거개입도 한다. 펀드 투자로 강남에 건물 살 꿈을 꾸고, 남의 자식 보고 북한 가라면서 제 자식은 미국 보낸다. 실재계는 그들의 상상계를 위협한다. 상사계를 지키려면 실재계의 침부틑 차단해야 한다.


273쪽
산업화 서사와 함께 민주화 서사도 파탄이 났다. 우리 세대가 아버지 세대의 전쟁 이야기에 넌더리를 냈던 것처럼, 요즘 젊은이 세대는 아버지 세대가 늘어놓는 민주화 서사를 냉소한다. 그 잘난 민주화가 이뤄진 사회에서 성공의 지름길은 상속과 세습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수저를 잘 물고 태어난 소수를 제외하고, 수저를 잘못 문 대다수 젊은이들은 민주화의 위선을 경멸하며, 민주화한 사회의 현실에 절망한다.

281쪽
한국에서 교수는 기능이 아니라 신분. 그 신분의 유지를 위해 그들은 자기들끼리도 안 읽는 논문을 써가며, 그 자리를 자식에게 물려줄 궁리를 하고 있다. 물론 그들이 누리는 특권은 희생양인 시간강사의 노동에 대한 착취를 통해 유지된다. 이 양들의 희생에 침묵하는 데에는 진보나 보수나 차이가 없다.

282쪽
'이익집단'으로서 진보는 승리했다. 하지만 '가치집단'으로서 진보는 죽었다. 이른바 '진보적' 문인들이 전직 대통령보다 호화로운 변호인단을 거느린 강남 사모님의 석방을 위해 서명운동이나 벌이고 있을 때, 돈 없고 힘없어 죽어간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일은 정작 '보수'에 속한 어느 문인이 맡았다. ...... 원래 지식인의 '앙가주망'은 이런 것이었다. 이 최후의 지식인에게 고마움과 미안함, 그리고 무엇보다 수치심을 느낀다. 저 징그러운 진보의 무덤에 이보다 더 고상하고 우아하게 침을 뺕을 수는 없을 것이다.

292쪽
내가 아는 것은, 우리가 세우려는 이상세계는 그것을 만드는 과정에 이미 구현되어야 한다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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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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