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 엄기호


39쪽
그러나 평범함에 대해 '유감스럽다'는 말을 붙여야 할 만큼 유감스러운 사회가 바로 한국 사회이다.

43쪽
평범함이 곧 탈락이라는 말은 탈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 사회에서 예외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국가 경제 발전을 위해서 수도권 규제 완화, 대기업 규제 철폐, 공공 부문 민영화, 종부세 폐지 등을 외치는 신자유주의는 '평범하지 않은 사람'을 위해 원칙과 규범에 대해 예외를 만들고 확장하며, 급기야는 그 예외가 규칙을 바꿔치기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또한 좀 더 원론적으로 따져 보면, 근대국가의 주권과 인권, 시민권이 갖고 있는 보편성이 '평범하지 않은 사람'의 무한한 욕망에 족쇄가 되기 때문이다.

74쪽
인간이 정서적 안정과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랑과 가족 같은 친밀한 관계는 안정적인 공간에서 누려야 하는 권리가 아니라, 자신이 누리고 싶으면 스스로 알아서 만들어야 하는 책임이 되었다.

76쪽
우리 모두는 서로의 정서적 안정에 필요한 일시적인 소모품이 되어 버렸고, 우리 모두는 다 외로워졌으며, 그 외로움을 인간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어리석은 짓이다. 신자유주의에서 깨져 버린 것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가장 소박한 꿈, 사랑이다.

86쪽
지난 2백여 년 동안 산업자본주의국가에서 노동자의 투쟁은 바로 이 임금에 포함되어야 하는 재생산 비용이 무엇인가를 둘러싼 투쟁이기도 하였다. 투쟁을 통해 점차 임금에 빵과 우유를 살 돈뿐만 아니라 주거비가 포함되었고, 양육비, 교육비가 포함되었으며, 노동자로서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는 자기 계발에 필요한 비용이나 여가비 등이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나고 있는 이 프라카리어트라는 무산자 계급에게 제공되는 임금과 노동 조건은 다시 이들을 일회용 휴지의 상태로 되돌리고 있다.

114
신자유주의는 약속하였다. 선택의 기회가 확장되면 확장될수록 더욱 멋진 세상이 된다고, 신자유주의는 주장한다. 훌륭한 소비자가 곧 훌륭한 시민이라고, 신자유주의가 보기에 인간의 본성에 가장 적합한 공간은 시장이다. 사회가 할 일은 하나도 없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시장은 이런 개인들이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이다. 이 공연이 성공하면 그 성공은 시장의 공이지만, 실패하면 그것은 개인의 실패이다.  

134쪽
우리는 자신이 가진 것 가운데 무엇이 상품 가치가 있는지를 날마다 되물어 봐야 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그렇게 팔 수 있는 것 가운데 마지막이 사생활, 개인의 이야기이다. 이미 우리 주변에는 팔릴 만한 삶을 낚아채어서 선정적으로 보도를 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미디어 산업이 있다. ......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팔릴 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이제는 모두 미디어로 몰려든다. ...... 인간의 사생활이 좋은 구경거리, 상품임을 잘 보여 주는 각종 리얼리티 쇼가 과연 어디까지 다루게 될지는 솔직히 감히 예측하기가 두려울 정도이다.

137쪽
신자유주의는 소유권에 대한 근대 자본주의의 기반을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하여 소유권의 중심을 '단순 소유'에서 '자본 투자'로 옮겼다. 몸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부가가치는 몸 주인이 아니라, 그 몸에 투자하여 이윤을 창출하는 사람과 그 사람이 소속된 자본의 것이 된다. 신자유주의 산업의 핵심 가운데 하나인 생명 산업, 지적재산권과 특허권은 이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 준다.
...... 문제는 누가 이것을 자본으로 굴리기 시작하였는가이다. 신자유주의의 사회는 특허권과 지적재산권에 대해, 그것을 자본으로 굴리기 시작한 사람을 소유주에 앞선 창조주로 선포했다. 

147쪽
생명공학은 불임이나 난치병 같은 인간의 슬픔을 극복한다고 선전하지만, 이처럼 사실을 우생학에 가까워지고 있다.

152쪽
그 아이는 죽어서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스스로를 죽일 수는 있었지만, 타인으로부터 추모될 수는 없었다. ......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이런 존재를 일컬어 "신성한 인간Homo Sacer"이라고 부른다. '신성한 인간'은 로마시대에 "죽어도 아무도 처벌을 받지 않지만, 절대 제물로는 바쳐질 수 없었던"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
...... 이들의 생명은 이중으로 부정당한 목숨이다. 먼저, 아무나 죽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목숨은 생물학적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였다. 두 번째로, 이들의 생명은 신을 위한 제단에 바쳐질 수 없다는 점에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가치도 부정당했다.

169쪽
국가가 나서서 이들을 도덕적으로 공격하는 동안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격과 혐오 범죄 역시 늘어났다. 미국과 영국 같은 서구에서 신자유주의가 가속화될수록 노숙자나 성 소수자, 이주 노동자에 대한 범죄가 증가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회적 약자도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고 내가 돌보고 연대해야 하는 이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좀먹고 등쳐 먹는 기생충으로 바라보는 일을 국가가 정당화해 주었기 때문이다.

170쪽
신자유주의는 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인종 청소 작업이며 인간 개조 사업이다. ...... 이들에 대한 지원은 최대한 작아야 하며 복지를 제공받는 동안 사회적 약자는 국가가 요구하는 온갖 통제와 훈육을 받아야 한다.

172쪽
조르조 아감벤에 따르면 정치의 원초적인 형태는 추방이다. 이 추방은 권력 바깥으로의 내침이 아니라 권력 안쪽으로의 내침이다. 만약 존재가 권력 바깥으로 내쳐진다면 더 이상 권력의 관할 소관이 아니지만, 권력 안쪽으로의 추방은 오히려 배제의 형태로 권력에 포함되는 상태를 뜻한다.
...... 누구를 언제, 어떻게 추방을 통해 예외적으로 벌거벗은 생명으로 다룰지가 바로 주권 권력이 가장 세심하게 생각하고 고안하고 다루는 문제이다.
...... '누가 순수한 독일인인가?'라는 질문에 나치가 그토록 천착한 것도 바로 이런 정치적인 이유에서였다.

186쪽
시장에 반대하는 모든 사회 운동을 반테러리즘이라는 이름으로 탄압하고, 그 탄압을 위해 모든 통치 수단을 군사화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의 전 지구적인 프로젝트이다.

189쪽
국가는 끊임없이 비경제적 영역에서 개인의 안전이 위협을 받고 있음을 주지시키면서, 안전을 위협하는 세력과 싸움을 벌여야 하기 때문에, 자신이 공권력을 독점해야 한다고, 자신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국민에게 설득한다. 결국 내 삶이 위협받고 있단느 공포 속에서 국민은 자발적으로 스스로의 기본권을 국가에 반납하고 불편을 감수하게 된다. 

212쪽
모든 근본주의가 그렇듯이 목적은 수단을 완전히 정당화하며, 수단을 문제시 삼는 사람은 믿음이 부족하거나 적에게 세뇌당하고 오염된 존재로 공격받았다.

221쪽
이처럼 아룬다티 로이는 "추모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유일하게 여겨진 9.11 희생자에 보태어 "추모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는 자"를 나란히 추모한다. 셈하지 않는 자가 셈으로 들어오고, 셈되어서는 안 되는 자가 셈되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일,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는 셈되고 있는 자끼리 누가 다수이고 누가 소수인지 따져, 그 숫자에 따라 권력을 나눠 같은 행태가 아니다.

241쪽
과거의 이데올로기가 '내가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행한다.' 였다면, 현재의 이데올로기는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잘 알면서도 (냉소적으로) 행한다.'이다.
...... 과거에 이야기하던 대안은 일종의 '체제 탈출'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탈출할 바깥이 사라지거나 안 보이는 시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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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신자유주의, 넌 도대체 누구니?아이들에게 저축하는 법 대신 '투자'하는 법을 가르치는 사회, 대학등록금이나 연금기금을 통해서 나도 모르는 사이 자본주의 도박판에 배팅하게 되는 사회, 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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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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