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 - 엄기호


20쪽
오늘날 한국 사회의 무기력은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기력이 아니라 세상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에 기인한 '과격한 무기력' 이다.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방탕과 타락 그리고 미래에 대한 기대 없이 하루하루를 소비하는 무기력이다. 그러나 이 무기력은 기회가 주어지면 세상을 통째로 날려버리겠다는 반역사적인 종말론적 급진주의와 매우 친화력을 가지고 있는 과격한 무기력이다. 화난 무기력이며 무기력해서 화가 난 상태다.

98쪽
그 누구도 다른 이의 목숨과 존엄을 '불가피'하고 '부수적'인 것으로 여길 권한은 없지만 그것이 '살기 위함'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희생자가 사회의 아래와 바깥인 것은 명백하다.

118쪽
이처럼 '아니오'라고 말하며 '존엄'을 지키는 대가는 '생존'의 박탈이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다. 존엄과 생존이 대립되는 세상 말이다. 존엄을 추구하는 자는 생존을 포기해야 한다. ...... 대신 생존을 택했다면 끊임없는 굴욕을 감수해야 한다. 굴욕과 모욕은 생존의 대가가 되었다.

124쪽
그 결과 증오의 말을 내뱉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말을 증오와 혐오가 아니라 '공익'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134쪽
장학금의 사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개인적인 노력과 공적인 보조/지원은 결코 충돌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개인적인 노력을 권장하기 위해 공적인 보조와 지원이야말로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능력주의'란 그 이름과는 달리 개인이 훌륭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을 공적으로 지원하고 보조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들이 말하는 능력은 결코 다른 어떤 것을 배제한 순수하게 자신의 것으로서의 자질과 노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시 강조하지만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이 사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의미하며, 이 자원을 활용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정당화되는 것이 이들의 말하는 '능력주의'다. 이 능력주의에서는 결코 모든 개인들이 훌륭해지기 위해 노력할 수 없으며 그것은 사적 자원을 가진 소수만이 가능해진다.

141쪽
이런 점에서 구의역 '젊은' 노동자의 죽음에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가 철저히 바깥의 존재였다는 점이다. 그는 전문계 고등학교 출신이다. 즉 한국과 같은 학벌 사회에서 인문계가 아니기 때문에 그는 안이 아니라 '바깥'의 존재였다. 또한 그는 전문계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실습 노동'을 했다. 실습 노동을 하는 동안 그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노동의 바깥에 있었고, 노동을 했기 때문에 학생의 바깥에 있었다.
그리고 그는 노동자가 되었다. 지하철 공사의 정규직이 아니라 지하철 공사에서 스크린도어를 고치는 업무를 외주로 맡아하는 하청기업의 노동자였다. 지하철 공사의 바깥이다. 그 바깥에서도 그는 비정규직 노동자였기 때문에 바깥의 바깥이었다. 그렇기에 그를 책임질 '안'은 그 어디에도 없다.

143쪽
이것이 위와 아래가 아닌 안과 바깥으로 시민을 분할하여 통치하는 새로운 계급사회, 아니 신분제적 사회의 실체다. 안으로의 유혹을 통해 끊임없이 사람을 경계에 배치하고 그 경계를 갈아먹는 것으로 움직인다.
...... 모두가 그를 다 자기 소관이 아닌 '바깥'으로 여겼으며 그게 그의 '법적 지위'였다.

165쪽
그 결과 우리는 공동세계, 인'간' 세계에서의 활동을 포기하는 것으로 안전을 도모하려고 한다. 여기서 우리가 도모할 수 있는 안전은 생물학적 생명의 안전이다. 

166쪽
활동과 의견이 안전한 사회, 그 사회가 바로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받는 사회다.

167쪽
그러므로 우리가 요구해야 하는 것은 존엄과 안전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안전하기 위해 가만히 있는 삶이 아니라 활동과 의견의 안전이 보장되는 사회를 요구해야 한다.

171쪽
위로와 만남이 불가능하기에 외면을 택한 삶이 더 괴로울 수는 있어도 기쁠 수는 없다. 아마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가장 처참한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 아니겠는가? 기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덜 괴롭기 위해 사는 것 말이다. 그렇게 덜 괴롭게 살기 때문에 순간순간의 우울과 고통, 슬픔은 진실을 대면했을 때보다는 덜 하지만 삶 자체는 더 비참해진다.

201쪽
가르치는 이가 '협력'을 강조하지만 실제 일이 진행되는 과정은 협력이 아니라 분업인 경우가 훨씬 많다. 
...... 협력의 기술을 키운다고 하지만 정작 협력을 보는 게 아니라 그 결과'물'을 보기 때문에 성과를 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203쪽
자기만의 고유한 의견을 가진 존재로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집단의 목표에 충실히 따르는 존재로서 자기를 드러낸다. ...... 오로지 강요된 하나의 협력 방식만 있고, 각자가 드러나는 다양한 협력의 방식은 무시된다. 획일주의적 동원이 협력인 것처럼 가정될 때 협력은 혐오스러운 것이 된다.

209쪽
그러므로 폐허가 되다시피 한 이 사회를 다시 세우기 위해 필요한 것은 '똑똑한 소비자'가 아니라 끊임없이 상대의 말을 새로운 제안으로 돌려줄 줄 아는 '협력의 기술자'다. 그리고 이런 활동이 활성화되고 보호받고 안전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이 시대와 사회에 대해 다시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네이버 책]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 - 엄기호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

혐오와 리셋의 감정 속, 한국 사회는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있는가?세월호 이후 변하지 않는 국가, 당리당략에 목숨을 건 정치인들, 제 자신의 안위만을 챙기는 기득권자들, 자그마한 권력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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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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