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장소 환대 - 김현경


43쪽
모독mortification의 어원에 죽음mort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67쪽
또 공동우물이나 저수지를 사용하지 못했고, 이발소, 호텔, 상점을 이용할 수도 없었다. 이러한 예들은 사회적 성원권이 무엇보다 장소에 대한 권리와 관련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데리다가 지적했듯이, 환대hospitalite는 그 어원-주인과 손님을 동시에 의미하는 hote-에서부터 장소와의 관계를 함축한다.

69쪽
즉 외국인에게 주어지는 환대 혹은 사회적 성원권은 조건적이다. 환대와 사회적 성원권을 구별하는 사람은 결국 조건적 환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131쪽
이때 차별당하는 집단은 이러한 차별을 받아들인다는 조건하에 사회 안에 머무를 자격을 얻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의 성원권은 조건부로 주어지며, 이는 의례적 불평등성 속에서 일상적으로 확인된다.

116쪽
개인은 (사회화를 거쳐서) 일단 사람이 되었다고 해도, 남의 도움 없이 계속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다. 사회생활의 모든 순간에 그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람대접을 받음으로써 매번 사람다운 모습을 획득하는 것이다. 상호작용에 참여하는 개인은 그러므로 다른 참가자들의 사람다움을 확인해주고, 사람이 되려는 그들의 노력을 지지해줄 도덕적 의무를 갖는다. 역으로, 그는 남들이 자신을 사람으로 대우해주기를 기대할 도덕적 권리를 갖는다. 

122쪽
현대 사회는 낙인의 존재를 부인하는 경향이 있다. 낙인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믿음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존엄의 관념은 낙인을 초래하는 불명예스러운 속성들을 포함하여, 사람들을 높이거나 낮추는 차이들이 모두 사소하고 우연적이며 비본질적인 것이라는 주장을 내포한다. 이에 따라 낙인자the stigmatized와 정상인the normals의 만남은 어떤 종류의 기만을 수반하곤 한다.

123쪽
정상인들을 불편하게 하지 않기 위해 낙인자들이 구사하는 전략은 다양하다. ...... 이것은 흑인이 백인 앞에서 자신의 지성을 감추고 '전형적인 흑인' 행세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 

125쪽
낙인을 지닌 개인이 정상인들로부터 존중의 의례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이처럼 적절하게 처신하는 한에서이다. ......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갔거나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한 낙인자들이 받은 대접이 이 점을 잘 보여준다. ...... 그는 휠체어를 타고 있었는데, 그가 있는 곳과 테이블이 놓인 테라스 사이에는 가파른 계단이 있었다. 그는 휠체어에서 내려와 무릎으로 계단을 기어 올라가려 했다. 그러자 즉시 종업원이 달려왔다. 그를 도와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당신은 이 식당에 들어올 수 없다, 손님들이 우리 식당을 찾는 것은 식사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갖기 위해서이지, 불구자의 모습을 보며 우울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다.

129쪽
우리는 순수한 폭력, 아무런 상징성도 띠지 않는 날것 그대로의 폭력과 의례로서의 폭력을 구별해야 한다. 체벌은 폭력인 동시에 일종의 의례이다. 체벌이 체벌당하는 사람의 협조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이 점을 잘 말해준다. ...... 종아리를 걷거나, 엉덩이를 내밀고 엎드리거나...... 등이 그러한 협력의 예이다.

130쪽
체벌은 갖가지 이유로 행해질 수 있고, 거기 따라붙는 훈계도 그만큼 다양하다. 하지만 표면상의 다양성을 넘어서, 체벌은 언제나 단 하나의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전달한다. 바로 체벌이 언제라도 반복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너의 몸은 온전히 너의 것이 아니며, 나는 언제든 너에게 손댈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체벌에 동의한다는 것은 이 가르침을 수용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모욕의 역설을 이해하게 된다. 모욕은 타인의 인격을 부정할 뿐 아니라, 그러한 부정에 대해서 부정당하는 사람의 동의를 강요한다. ...... 하지만 모욕당하는 자가 모욕에 동의하는 순간, 모욕은 더 이상 모욕이 아니다. 그것은 의례의 일부이며, 질서의 일부이다. 결국 모욕은 자신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는 폭력이다.

135쪽
존비법이 엄격한 사회는 일상적으로 엄청난 감정노동이 이루어지는 사회이고, 미처 처리하지 못한 감정의 찌꺼기들이 뒷골목에 흘러넘치는 사회이다. ......
한 사람에게는 끊임없이 존중을 표현하게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그러한 표현을 생략하도록 허용하는 존비법의 체계는 인간관계가 원활하게 굴러가는 데 필요한 감정노동을 '아랫사람'의 몫으로 떠넘기는 문화와 연결되어 있다. 이 문화는 아랫사람의 감정을 배려하지 않는데, 그에게도 감정이 있음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의 감정이 그만한 배려를 받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기 떄문이다. 

140쪽
성폭력은 모욕의 한 형식이다. 모욕이 대개 그렇듯이 성폭려에도 가르침이 담겨 있다. 몸의 올바른 사용법에 대한, 네 몸이 누구에게 속하는가에 대한, 네가 있을 곳이 어디인가에 대한.

140쪽
한편 외국인은 언어가 서툴고 체류국의 제도와 관습에 익숙하지 않다는 점 때문에, 순진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리보기나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 아이의 이미지를 갖기 쉽다. ......
사회적인 타자화와 유아화infantilization를 동반하는 예는 이 밖에도 많다. 장애인이나 거동이 불편한 노인, 생활보호 대상자도 곧잘 나이를 무시당하고 아이처럼 취급된다.

142쪽
신분이란 어떤 위계화된 구조 안에 있는 고정된 위치들이 아니라 무리짓고, 사회 공간을 점유하고, 경계를 만들며, 배제하거나 포함시키고, 자리를 주거나 뺏는 어떤 운동의 효과이다. 그러므로 신분의 개념은 인정투쟁이나 타자화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144쪽
주어지거나 주어지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인 시민권과 달리, 사회적 성원권은 의례를 통하여 끊임없이 확인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상호작용 의례나 집단적 의례에 참여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성원권을 확인하고 자신의 성원권을 확인받는다. 사회란 결국 이러한 의례의 교환 또는 의례의 집단적 수행이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상상적 지평이다.

152쪽
상투를 자르는 것과 학교에 가는 것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학교에서 아이들은 그들이 어떤 집안 출신이든 간에 모두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모자를 썼다. 겉모습의 수준에서 실현된 이러한 평등성은 사회적 이동을 위한 기회를 누구에게나 똑같이 제공하겠다는 근대적인 교육제도의 약속을 상징한다. 하지만 실제로 학교가 만들어낸 것은 또 다른 불평등 혹은 사회적 균열이었다. 전통적인 사회에서 지배 계층에 속했던 사람들은 남들보다 앞서서 적극적으로 이 새로운 기회를 이용함으로써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였다. 반면 학교에 다니지 못한 사람들은 여전히 사람 노릇을 못하는 존재로 남게 되었다.

158쪽
신자유주의적 노동 통제는 신분적 모욕을 새로운 형태의, 더욱 미묘하고 일반화된 모욕으로 대체하였다. 문자 한 통으로 해고를 통보한다든가, 프로페셔널리즘의 이름으로 노예 같은 서비스를 요구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과거에는 모욕이 주로 저학력, 여성, 육체노동자의 몫이었다면, 오늘날에는 모든 노동자, 즉 노동자로서 모든 사람이 모욕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아마도 그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소비자로서만 의식하려 하며,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은 되도록 잊고 싶어 한다.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우리는 연대 의식을 느끼는 대신에 소비자로서 겪게될 불편을 먼저 생각한다.

158쪽
한편 소비의 영역, 즉 노동력 재생산의 영역에서 신자유주의적 주체들은 각자의 상품성을 최대화하라는 압력을 받는데, 이는 자본이 원하는 이상적 주체의 모습을 널리 알리고, 거기에 맞춰 각자의 결함을 수정하는 일을 개별 주체들에게 맡기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 하지만 소비주의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이 새로운 캘빈주의는 예전의 캘빈주의가 그랬듯이, 항상 더 많은 노력을 요구할 뿐 누구의 죄도 결정적으로 사해주지 않는다. 그 결과 신자유주의적 주체들은-'노바디'이건 '썸바디'이건- 끊임없는 굴욕과 강등의 위협에 시달린다.

160쪽
신자유주의 하에서 모욕은 흔히 굴욕의 모습을 띠고 나타난다. ...... 이론적으로 모욕은 구조가 아니라 상호작용 질서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 누구도 나를 모욕하지 않았다면, 내가 느끼는 굴욕감은 전적으로 나 자신의 문제가 된다.

165쪽
제도가 사람을 모욕할 때 그것은 모욕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166쪽
또한 나는 신분의 폐지라는 역사적인 사건이 필연적인 것도 아니고 결정적인 것도 아님을 상기시키려 한다. 한국 사회가 신분제로 회귀하고 있다는 증거는 많다. ...... 법은 그것을 저지하기는커녕 오히려 촉진하는 중이다.

184쪽
한국 사회가 경제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다루는 또 하나의 방법은 효도나 돌봄 같은 전통적인 가치를 강조하면서 가족에게 짐을 떠넘기는 것이다. 

185쪽
가부장제는 또한 가족 구성원들을 경제적 이해관계로 엮어놓음으로써, 그들 사이에 순수한 감정이 흐르는 것을 막는다. 이혼과 동시에 생계가 막막해지는 여자가 사랑과 타산을 구별할 수 있을까? 또한 그 남편은 아내의 마음을 믿을 수 있을까? 자기 말대로 하지 않으면 재산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위협하는 아버지에게 아들이 애정을 느낄 수 있을까? 또 그 아버지는 아들의 복종을 존경의 표시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187쪽
뒤르켐의 예견과 달리, 능력주의 사회의 도래는 상속제도의 소멸을 가져오지 않았다. 상속의 방식 혹은 전략을 바꾸어놓았을 뿐이다. ...... 상속이 특정한 시점이 아니라 양육 기간 전체에 걸쳐 이루어지기 때문에, 가족은 만성적인 갈등상태에 놓인다. 부모의 상속 프로젝트에 동의하지만, 물건 취급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아이들, 재산관리인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엄마, 가장이면서도 이 프로젝트에서 소외되어 있다고 느끼는 아빠가 갈등의 세 주역이다. 

187쪽
한국 가족은 구성원들 간의 유대가 물건에서 비롯되는 만큼, 경제 위기에 매우 취약하다. ...... 돈을 벌어오지 못하면 아버지가 아니라고 사람들이 말하고 ...... 밥을 안 해주면 엄마가 아니다, 공부 못하면 자식이 아니다, 늙으면 죽어야 한다 ...... 마치 자신의 유용성을 입증하지 못하면 가족의 일원이 될 수 없다는 듯이(유용성은 물건의 속성이다).

194쪽
환대는 자원의 재분배를 포함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아이들이 소꿉놀이를 시작할 때 먼저 장난감을 나누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아무리 욕심 많은 아이라도 상대방이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으면 서로 초대할 수도, 선물을 주고받을 수도 없다는 걸 알기에, 기꺼이 살림을 나누어준다.

203쪽
개인에게 자리/장소를 마련해주고 그의 영토에 울타리를 둘러주는 것이 바로 공동체의 역할인 까닭이다. 뒤르켐이 지적했듯이, 공공성이 강화될수록 사생활의 자유는 오히려 커진다. 가부장제 하에서 기혼 여성과 미성년 자녀는 사상활의 자유를 갖지 못한다. ...... 가부장 사회의 약자들이 겪는 사생활 박탈은 그들이 공공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좀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프라이버시의 결여와 공적 공간에서의 배제는 장소 살실placelessness의 두 형태로서, 동전의 양면처럼 맞붙어 있다. 사회 안에 자리/장소가 없는 사람, 사회의 바깥에 있는 사람은 자신을 위해 나서줄 제삼자를 갖지 못했기에, 사적 관계 안에서도 자신의 자리/장소를 지킬 수 없다.

232쪽
법을 어긴 사람은 그가 이미 동의한 규칙에 따라 벌을 받는다 즉 벌은 계약의 일부이며, 벌을 받는 동안에도 계약은 유지된다. ...... 반면 현대 사회에서 형벌은 규칙의 위반에 대해서만 책임을 묻고, 위반한 사람의 인격을 문제 삼지 않는다. ...... 모든 계약은 주체들의 인격적 동등성을 전제하는 까닭이다. 

257쪽
사람의 개념은 이처럼 사회에 대한 상상과 연결되어 있다. ...... 우리는 대뇌피질이 죽은 사람은 실제로 죽은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에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래서 그 사람이 더 이상 윤리적 배려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에는 그처럼 쉽게 동의할 수 없다. 그런 주장은 사회적 유대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직관과 깊은 곳에서 충동하는 것 같다.

259쪽
현대 사회의 도덕의 기초에 있는 것은 ...... 절대적 환대의 원리이다. 즉 태어나는 모든 인간 생명에게 자리를 주어야 하고, 어떤 명목으로도 이 자리를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사람의 신성함이란 바로 이 원리는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사회 안에 자리가 있다는 것이며, 신성하다는 것은 이 자리에 손댈 수 없다는 뜻이다.

275쪽
...... 공리주의적 계산법의 용도는 희생자들을 설득시키는 것보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양심을 위로하는 데 있는 것 같다.

294쪽
흑인 변호사나 흑인 교수 심지어 흑인 대통령의 존재가 전체 흑인의 지위를 판단하는 데 별다른 영향을 줄 수 없듯이, 몇몇 성공한 여성이 있다고 해서 이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네이버 책] 사람, 장소, 환대 -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사람, 장소, 환대』는 ‘사회적 성원권’, ‘환대’ 등의 문제를 오랜 기간 연구해온 인류학자 김현경의 첫 저서이다.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에 들어오고, 사람이 되는가? 우리는 사람이기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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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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