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영화의 탄생

 

전도연과 송강호. 주인공 배우들만 떠올려도 적어도 시간 낭비는 아니겠다 싶은 영화, <밀양>(2007)이다. 감독도 범상치 않다. <초록물고기>, <박하사탕>, <오아시스>를 만들어 낸 이창동 감독. 이창동은 영화인 이전에 작가다. 국어교육 학사 출신으로 교사와 소설가를 거쳐 영화계에 이르기까지. 선보이는 작품마다 문학상과 감독상을 휩쓴, 그야말로 '문학적 예술가'. 요즘 보기 드문 '홀로 쓰고 찍는' 영화계의 싱어송라이터. 과연 이야기꾼답다. <밀양>은 유일하게 원작자가 따로 있다. <서편제>를 쓴 소설가 이청준의 <밀양; 벌레이야기>를 스크린으로 옮겼다. 시나리오와 연출은 이창동 감독의 솜씨다.

 

인간의 추악한 본성과 잔인한 인간 세계를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작품들이 있다. 철학적 메시지를 선사해 국내외를 막론하고 훌륭한 작품으로 인정 받기도 한다. 예술적 재능 부족이 문제인지, 취향 자체가 맞지 않는지는 모르겠다. 스크린상에서 부정적인 인간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는 건 상당히 불편한 일이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도 그런 부류라는 인식이 있었다. 거북한 이야기를 따뜻하게 풀어낸다는 점에서 기피까지는 아니었기에 <밀양>을 접했다. 정말 아무런 기대 없이. 그런데 뜻밖의 관심거리가 등장한다. 잠시일까 싶었는데 끝까지 그 얘기다. 바로 개독교. 종교적, 또는 종교인에 대한 비판보다는 상징적인 '' '인간'의 괴리를 그린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 원작자인 소설가 이청준은 '용서'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다고 한다. 보다 깊은, 겹겹이 싸여 있는 작품의 다양한 메시지는 추후에 되새겨 볼 참이다. 오늘은 <밀양>을 보면서 '이거다!' 싶었던 개신교의 비합리적인 양상을 공유하기로 한다.

 

줄거리

 

'남편이 죽었다. 바람을 피우다 죽어 버린 남편. 죽어서도 나를 괴롭힌다. 온갖 소문과 따가운 시선. 지긋지긋하다. 평소 그가 살고 싶어 하던 밀양. 그곳에 가면 더 이상 바람이네, 과부네, 말들 않겠지. 그래, 나를 모르는 곳, 밀양으로 가자.' 아들 준과 함께 밀양에 도착한 신애(전도연 분). 가게가 딸린 집을 얻어 피아노학원을 차린다. 활발하지 않은 준은 웅변학원에 보낸다. 동네 여자들과 어울리다 밤이 깊어서야 집에 돌아온 어느 날, 준이 없다. 전화가 울린다. 준을 데리고 있다는 그. 돈을 요구한다. 시키는 대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돈을 전한다. 며칠 후, 살해 당한 채 강가에 버려진 준을 경찰이 찾아낸다. 범인은 준이 다니던 웅변학원 원장이다.

 

남편도, 이제 겨우 살인 아들도 모두 잃었다. 교회가 보인다. 무작정 들어간다. 사람들이 울부짖으며 기도한다. 그들 틈에서 주체할 수 없었던 고통과 슬픔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다. 실컷 울고 났더니 좀 낫다. 이제 신애는 교인이다. 교회도 나가고, 전도도 하고, 교회 밖에서도 옹기종기 모여 예배 드린다. 용서는 하나님의 뜻. 신애는 그 뜻을 따르기로 한다. 교도소에 있는 범인과 마주 앉는다. 그에게 용서와 복음을 함께 전할 참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그의 얼굴이 좋아 보인다. 이미 교도소 안에서 주님을 만났단다. 마음의 평안도 얻었단다. 용서를 받았단다. 신애는, 기가 막힌다. 교도소를 나서는 길에 정신을 잃고 만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놀라 자빠진 이유를 알겠다. 배신감 탓이다. '나도 아직 용서를 안 했는데, 누가 그 사람을 용서해!? 하나님? 하나님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이제 신애는 교인이 아니다. 하나님은 복수의 대상이다. 야외에서 한창 예배 중인 교인들. 음향기기에 김추자의 '거짓말이야' CD를 넣는다. 플레이. 복수다. 피아노학원 맞은편의 약국. 부부 약사가 운영 중이다. 여 약사는 '주님' '구원'을 구구절절 늘어놓았었다. 남 약사를 유혹한다. 하나님이 잘 볼 수 있게 야외로 유인해 돗자리를 편다. 간음하는 현장을 똑똑히 보라 말한다. '주님'. 자신의 손목을 그어 피를 쏟으면서도 똑같이 말한다. 병원에서 퇴원한 신애. 머리부터 다듬고 싶다. 미용실에 앉는다. 익숙한 여자애가 다가온다. 범인의 딸이다. 자리를 박차고 나와 집으로 향한다. 마당에 거울을 세워 놓고 직접 자르기 시작한다. 밀양에 내려오던 날부터 묵묵히 신애 곁을 맴돌며 그녀를 돕던 시골 노총각 종찬. 종찬이 거울을 들어 준다.

 

신과 사람

 

직접 자른다

 

<밀양>의 마지막 장면은 꽤 의미심장하다. 퇴원 후 신애가 처음 들른 곳은 미장원. 산뜻한 기분을 만끽하고 싶다. 그런데 그녀의 머리를 손질해 주겠다고 나타난 이가 다름 아닌 범인의 딸, 정아다. 신애는 마음이 복잡하다. 정아에게 태연히 머리를 맡기기엔 분노가 크다. 정아는 그녀의 아버지가 준을 유괴한 범인임을 알고 있었다. 준이 사라진 후 한 날, 그녀는 잠긴 피아노학원 안을 살피고 있었다. 신애가 무슨 일인지 묻자 황급히 사라졌다. 범인의 정체를 알고 나서야 정아의 그날 그 태도의 이유를 알았다. 정아는 공범이다. 아들을 죽인 살인자의 딸이자, 범죄 사실을 은폐한 야속한 공범. 신애는 돌연 가운을 벗어 던진다. 집 앞마당. 신애는 거울과 가위를 꺼내 들고 자신의 손으로 머리를 마저 자른다.

 

다른 미장원으로 향할 수도 있었다. 촌구석이라도 미장원은 얼마든지 더 있다. 하지만 신애는 집으로 들어가 버린다. 하나님이나 사람들이나 다 꼴도 보기 싫다. 퇴원 길에 기분 좀 새롭게 단장해 보고자 미장원에 들렀었다. 신은 이제 막 퇴원한 그녀를 또 시련에 빠뜨렸다. 왜 하필 그 미장원으로 가게 한 걸까. 신에 대한 원망을 거둘 수가 없다. 내 집에서, 내가 직접 하고 말지 싶다. 사람들은 지치고 힘들 때 신에게 기댄다. 닥친 고통이 극심할수록 신에게 의지하는 경우가 많다. 일상적인 고통이야 주위 사람들과 나눠도 충분하다. 신은 진정 나에게 위안을 주는 존재인가. 어쩌면 나 자신보다도 나를 달래 주지 못하는 게 신 아닐까. 나 스스로 나를 돌보는 게 가장 큰 위로가 되지 않을까. 나 자신을 믿는 것만이 그 어떤 시련도 극복할 수 있는 힘 아닐까.

 

거울을 들어 준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은 두 가지를 내포한다. '최선을 다해 떳떳하게 살고 있다'는 믿음과 '최선을 다하면 어느 정도는 해낼 수 있다'는 믿음. 이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큰 버팀목이 된다. 그 믿음만 있으면 무서울 것도, 견디지 못할 것도 없다. 조금 불편할 순 있다. 불완전하고 부족한 게 인간이다. 문제 없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에 어긋나지 않게 살다 보면, 누군가가 그 불편함을 덜어주기 때문이다. 혼자 머리를 자르는 신애. 거울을 보면서 자르자니 각도가 애매하다. 종찬이 들어선다. 뭐라도 도와주고픈 종찬. 멋쩍은 듯 다가와 신애의 눈높이에 맞춰 거울을 들어 준다.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들고 있다. 헌금을 바라지도, 가해자에 대한 용서를 종용하지도, 피해자에 대한 배려도 없이 죄 지은 자를 멋대로 용서해 버리지도 않는다. 종찬이 그놈의 하나님과 다른 점이다.

 

아들이 사라졌다. 종찬은 자기가 담당 형사라도 되는 양, 수시로 경찰서를 들락거리며 상황을 체크한다. 범인이 잡혔다. 종찬은 자기가 피해 당사자인 양, 범인에게 욕을 퍼부어 댄다. 범인이 신애를 쳐다만 봐도 있는 힘껏 패 줄 판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신보다 백 배 위로가 된다. 나만큼 나를 믿어 주고 아껴 주는 사람은 신보다 더 든든하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전지전능한 신이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부족한 그 한 사람이 오히려 내겐 더 큰 힘이 된다.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범인을 용서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종찬과 동네 사람들은 신애를 말렸다. 그녀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헤아리고 있어서다. 신애는 마음을 다잡는다. 시련을 극복하게 해준 하나님이다. 의리를 지키고 감사를 표해야 마땅하다. 그렇게 마주한 범인의 얼굴. 이미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고, 마음의 평안을 얻었단다. 신애에게도 하나님의 손길이 닿아 다행이란다. 이게 대체 무슨 경운가. 하찮은 인간인지라 죄에 응당한 벌을 내리는 건 자기가 아닌 하나님의 몫이라 생각했는데, 엄정히 선악을 심판해야 할 하나님이 단 며칠 만에 아들을 살해한 자를 용서하고 구원하다니! 인간적인 이기심을 힘겹게 억누르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했던 그녀다. '당신의 뜻에 따라 용서하겠어요. 더 큰 아량을 갖게 해주세요.' 이미 신께 용서 받은 살인자를 두고, 이러고 있었던 거다. 죄를 짓고도 편안히 지내는 가해자, 아직도 문득문득 설움이 복받치는 피해자. 하나님이 내린 심판은 너무 잔인하다.

 

진심이 통한다

 

신애가 밀양에 내려와 피아노학원을 열고 동네에 떡을 돌릴 때다. 옷가게에도 떡을 전했다. 몇 번 그 앞을 지나면서 생각했었다. 실내 벽 색깔이 어두워 매장이나 상품이 돋보이지 않는다고. 떡과 함께 평소 생각하던 바를 함께 전했다. 미장원에서 머리를 하고 있는데, 신애를 보지 못한 옷가게 여사장이 그녀를 씹는다. '인테리어를 바꿔 보라'는 어이없는 조언을 했다면서. 참 민망하고 씁쓸한 상황. 생각해 보면, 그때는 그럴 만도 했다. 신애는 적당히 동네 사람들과의 거리를 유지하며 경계를 분명히 했고, 땅을 사서 집을 짓겠다며 허세도 부렸다. 아는 이 하나 없는 밀양에서 그녀 자신과도, 주위 평범한 사람들과도, 다르고 멋지게 살아 보고 싶었다. 서울에서 밀양으로, 대도시에서 촌구석으로 이사한 사실은 그러기에 좋은 조건이었다. 우월해 보여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으로 보이기에.

 

아들을 잃고 자살을 시도하고 입원 치료도 받았다. 온갖 시련을 겪고 나니, 허세는 커녕 만사가 우습다. 모든 걸 내려놓았다. 가식을 벗고 사람들을 대했다. 사람들은 '있어 보이는' 신애보다 '아프지만 담담한' 신애를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미장원을 뛰쳐나와 집으로 가던 신애. 여사장은 반가운 마음에 신애를 불러 세운다. 신애의 조언대로 인테리어를 환한 색으로 바꿨다며 자랑한다. 장사도 더 잘되는 것 같단다. 한쪽만 짤따란 신애의 머리를 보고 여사장은 자조치종을 묻는다. 허심탄회하게 '미장원에서 자르다 마음에 안 들어 나와 버렸다'고 말한다. 여사장은 '미쳤는갑다'는 말을 내뱉고는 이내, 정신과 치료를 받고 퇴원한 신애에게 미안함을 내비친다. 신애는 미장원에서 자기를 씹다가 눈이 마주치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뻔뻔하게 눈인사를 해 대던 그때의 여사장보다 인간미 넘치는 지금의 여사장이 좋다. 멀쩡히 잘살고 있는 공범, 퇴원하자마자 공범을 눈앞에 들이댄 신. 그리고 마주친 옷가게 여사장. 신애를 웃게 만드는 건, 부족하고 주책맞지만 인간적이고 같은 인간으로 그녀를 이해해 주는 옷가게 여사장뿐이다. 전지전능한 신도 헤아리지 못한 내 진심을 허술한 동네 아줌마가 어루만진다.

 

피도 물의 한 종류에 불과하다

 

'가족'에 대해 생각해 볼 시간이 왔다. 신애는 부모와 남동생, 가족 누구에게도 말 한마디 없이 서울을 떠났다. 준에게 끔찍한 일이 벌어지기 전, 동생 민기가 밀양을 찾아왔다. 바람 피우다 교통사고로 죽은 남편을 그런 적 없다 두둔하더니 죽은 남편 고향에 내려와 사는 누나. 민기는 누나를 이해할 수 없다. 준을 보내던 날 다녀간 민기는 신애가 병원에서 퇴원하던 날 다시 밀양을 찾았다. 세 번째 방문이다. 퇴원 수속을 밟고 민기는 곧 서울로 돌아간다. 퇴원 때 입을 산뜻한 하늘색 원피스를 사다 준 이는 가족이 아닌 종찬이었다. 신애의 기분을 살피며 꽃다발을 안긴 이도, 맛있는 걸 먹으러 가자며 분위기를 돋운 이도, 혼자 머리를 자를 때 거든 이도, 모두 종찬이었다. 피를 나눈 가족은 그 자리에 없었다.

 

준의 화장터. 준의 친가 식구들이 신애를 몰아세운다. 남편도 먼저 보내더니 자식까지 앞세웠다며, 그런데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독한 년이라며, 피해자를 가해자인 양 매도한다.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에 넋이 나간 피해 당사자를. 종찬이 그들을 만류한다. 누구보다 억장이 무너질 신애를 이해하고 위로하지는 못할망정 탓하기만 하는 가족들이 밉다. 종찬은 한마디 대꾸도 못하고 고스란히 당하고 서 있는 신애. 종찬은 그녀를 정중히 대변하고 나선다. '손주를 잃어 속상한 마음 이해한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가장 가슴 아픈 건 준이 엄마 아니겠냐'. 신애를 대신해 아들을 죽인 범인을 흠씬 패 주던 종찬이 생각난다. 가족마저 보듬지 못하는 아픔을 종찬이 조심스레 위로한다. '언제나 따뜻한 내 편'이라 기대하는 '가족'. 기대는 무너진 지 오래다. '자신'의 아픔을 돌보느라 ''를 가해자 취급하는 게 가족이다. 만만한 게 가족이다. '우리'가 아닌 '너와 나'일 뿐이다. 더 많이 가지려고 다투고, 덜 상처 받으려고 상대를 궁지로 몬다. 피를 나눈 가족보다 진심을 나눈 타인이 더 따뜻하다. 가족도 수많은 타인들 중 한 무리일 뿐이다.

 

0123456789101112131415161718

 

시나리오 메시지 MONZAQ

Posted by 몽자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