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다(다다다) - 김영하


20쪽
한번은 군부대에 강연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 군인답게 모두 정확히 각을 맞춰 질서정연하게 자더군요. 보람 있었습니다. 아, 내가 강연을 온 덕분에 병사들이 저렇게 꿀 같은 휴식을 취할 수 있다니. 

21쪽
문학은 성공하는 방법은 가르쳐줄 수 없지만 실패가 그렇게 끔찍하지만은 않다는 것, 때로 위엄 있고 심지어 존엄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러니 인생의 보험이라 생각하고 소설을 읽어라. 

33쪽
이렇듯 글을 쓴다는 것은 간접적인 행위이지만 오감을 동원하면 그것은 마치 놀라운 가상현실처럼 우리에게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주고, 그런 글쓰기가 습관이 되면 일상생활에서도 더 민감하게 오감을 동원하게 됩니다. 감각과 기억, 표현은 이렇게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감성 근육을 키우는 것입니다. ...... 잘 느끼는 것은 왜 중요할까요? 자기 느낌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의견에 쉽게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 견고한 내면을 가진 개인들이 다채롭게 살아가는 세상이 될 때, 성공과 실패의 기준도 다양해질 겁니다. ...... 자기만의 감각과 경험으로 충만한 개인은 자연스럽게 타인의 그것도 인정하게 됩니다. 

40쪽
라디오는 아주 문학적인 데가 있습니다. 개인적인 매체지요. ...... 텔레비전은 콜로세움 미디어, 그러니까 사람들이 모여서 보는 미디어지요. 그러한 성격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가 월드컵의 거리 응원이고요. 하지만 오늘날 여러 사람이 모여서 라디오를 듣는 풍경은 상상하기 힘들죠. 라디오는 모두가 혼자 들어요. 어두운 밤 나에게만 들려주는 노래 같고, 진행자가 "오늘 더우셨죠?" 하면 "더웠지" 하면서 혼자 대답을 하죠. 그런 의미에서 라디오는 개인적이에요. 

44쪽
어쨌든 평온했던 40년 동안에 미국과 서구의 여행자들이 여행 문화를 평준화했어요. 어딜 가도 하얀 침대보가 깔려 있고, 어딜 가도 아메리칸 스타일이죠. 여행지들은 비슷비슷해졌고, 그래서 여행이 가지고 있는 긴장과 흥분 같은 것들이 빠르게 사라졌어요. 

47쪽
조용하게, 고요하게 앉아 있는 걸 보면 인간을 좀 돌아보게 되는 것 같아요. 인간은 뭔가를 계속하잖아요, 부스럭부스럭. ...... 우리보다 먼저 죽고, 작고 힘이 없는데도 훨씬 우아한 동물이죠. ...... 인간만 존재하는 세상에선 인간의 본질을 생각할 필요가 없죠. 그런데 동물과 함께 있으니까 인간다움에 대해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56쪽
요컨대 사람들은 그 어떤 엄혹한 환경에서도, 그 어떤 끔찍한 상황에서도, 그 어떤 절망의 순간에서도 글을 씁니다. 그것은 왜일까요? 글쓰기야말로 인간에게 남겨진 가장 마지막 자유, 최후의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 언어는 논리의 산물이어서 제아무리 복잡한 심경도 언어 고유의 논리에 따라, 즉 말이 되도록 적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좀더 강해지고 마음속의 어둠과 그것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힘을 잃습니다. 이것이 바로 글쓰기가 가진 자기해방의 힘입니다. 우리 내면의 두려움과 편견, 나약함과 비겁과 맞서는 힘이 거기에서 나옵니다. 

76쪽
그러나 예술가는 '될 수 없는 수백 가지의 이유'가 아니라 '돼야만 하는 단 하나의 이유'로 예술가가 되는 것입니다. ...... 여러분이 뭔가를 하겠다고 할 때, 그들은 묻습니다. 이건 정말 마법의 질문입니다. "그건 해서 뭐하려고 그래?" 힘이 쭉 빠집니다. 하지만 예술이라는 것은, 뭘 하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지요. 그것은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 그러므로 이제 뭔가를 시작하려는 우리는 "그건 해서 뭐하려고 하느냐"는 실용주의자의 질문에 담대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냥 재밌을 것 같아서 하는 거야" "미안해. 나만 재밌어서"라고 말하면 됩니다. 무용한 것이야말로 즐거움의 원천이니까요. 

88쪽
작가로서 갖게 되는 정신적 만족감은 고통을 특권화할 수 있다는 데에서 기원한다고 생각해요. 세탁소 주인도 힘들고 택시 기사도 힘들죠. 하지만 그들은 자기 고통을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비해 아름답다고 말해볼 기회를 갖지 못하고 죽잖아요. 

89쪽
아마도 칼 세이건의 말일 텐데,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런 말이었어요.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내 생애에 우주를 전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밤하늘의 별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낀다. ...... 소설의 세계는 너무 거대해서 저는 어떤 파문도 일으키지 못할 거예요. 그게 기쁠 때가 있어요. 광대무변한 이 우주와 나.

136쪽
저는 가끔 학생들에게 그렇게 얘기했었습니다. 책상 서랍에 숨겨놓을 수밖에 없는, 그런 글을 써라. 부모가 보면 안 될 것 같은 글. 반대로 말하자면, 부모한테도 보여주고 싶고 선생님한테도 보여주고 싶은 글에는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거죠. 

140쪽
읽어보고 중요한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것이지요. 내가 정말 알고 싶었거나 답변을 듣고 싶었으나 지금껏 누구에게서도 듣지 못했던 것이 있는가? 그것을 나는 새롭게 표현할 수 있는가? 그런 문제들을 고민하기 위해서 작가는 늘 서가를 둘러보고 그 안에 넣고 싶은 책을 쓴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162쪽
저는 소설을 통해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지 않아요. 소설을 쓰는 동안에 저는 오직 제 소설과 소통을 합니다. ...... 순전히 저와 제 세계와의 문제에요. ...... 독자는 소설 쓰는 행위 자체만을 놓고 볼 때 사실 크게 중요하지는 않아요. 

168쪽
시장에 가서 잘 익은 사과를 골라 바구니에 담으면서도 막상 집에 와서 장바구니를 풀었을 때 그 사과가 여전히 그저 '잘 익은 사과'에 불과하면 실망을 합니다. 그것은 사과 이상(혹은 그 이하)의 전혀 예기치 못한 그 무엇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 '내가 뭘 원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잘 모르는 바로 그것을 내놓으라'는 게 문학 독자의 욕망인 것처럼 보입니다. 

179쪽
우리는 책을 사랑하는 것이지 특정한 어떤 책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책에 대한 사랑은 변합니다.

180쪽
직장은 우리의 영혼까지 요구합니다. 모든 것이 '털리는' 시대. 그러나 책으로 얻은 것들은 누구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독서는 다른 사람들과 뭔가를 공유하기 위한 게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과 결코 공유할 수 없는 자기만의 세계, 내면을 구축하기 위한 것입니다. ...... 나, 고유한 나, 누구에게도 털리지 않는 내면을 가진 나를 만들고 지키는 것으로서의 독서. 그렇게 단단하고 고유한 내면을 가진 존재들, 자기 세계를 가진 이들이 타인을 존중하면서 살아가는 세계가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세계의 모습입니다. 

233쪽
저는 '류' 대신에 '문화적 돌연변이'라는 메타포를 제안하고 싶습니다. 이 문화적 돌연변이들은 국경, 국가, 문화적 전통 등과 크게 관계없이 어떤 흐름이 만나는 곳에서 출현하는데요. ...... 이 돌연변이들은 문화적으로 상당히 '지저분한 환경'에서 태어납니다. 청학동 같은 문화적 청정지역에서는 잘 생기지 않습니다. 홍콩이나 부산, 뉴욕 같은 곳, 이 세미나가 열리고 있는 인천도 돌연변이가 출현하기에 적합한 환경인 것 같네요. 

240쪽
이런 경험을 반복하면서 나는 대화라는 것이 꼭 살아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조금은 실망스런 기분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후로 내가 주로 소통해온 사람들은 현실의 인간이 아니라 책 속의 인물들이었다. ...... 오래 생각해온 어떤 문제는 유창하게 말할 수 있지만, 일상적인 가벼운 대화에서 핀트를 잘 못 맞춰 오해를 사는 일이 잦았다. ...... 그러다보니 말보다는 글을 쓰는 것을 선호하게 되었다. 여전히 나는 내가 한 수백 마디의 말보다 제대로 쓴 한 줄의 문장이 더 나를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 책] 말하다 - 김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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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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