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없는 사회 - 이반 일리치


32쪽
의무적인 학교교육은 불가피하게 한 사회를 양극화한다. 또한 그것은 세계의 모든 나라들을 국제적인 카스트 체제로 등급화한다. 

34쪽
평등한 교육 기회란 실로 바람직한 것이며 실현 가능한 목표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을 의무적 학교교육과 동일시하는 것은 구원을 교회와 동일시하는 것과 같다. 학교는 현대화된 가난을 겪는 이들에 대해 세속종교 역할을 하고 있고, 첨단기술 시대의 빈자들에게 그들의 삶을 구원해주겠다는 헛된 약속을 하고 있다. 국민국가는 학교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모든 시민을 등급화된 교육과정에 집어넣어 단계마다 졸업장을 따게 하는데, 이것은 과거의 교회 입교식이나 성직자 승급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현대 국가는 교육자가 판단을 내리면 선의의 미취학 단속반이나 취업 자격 등을 통해서 그 판단을 집행할 의무를 진다. 이것 역시 스페인 왕이 콩키스타도르와 종교재판관들을 통해 신학자들이 내린 판단을 집행했던 것과 같은 경우라 할 수 있다. 

38쪽
오늘날의 학교는 기회의 평등보다는 기회를 독점적으로 배분하는 곳에 불과하다.

43쪽
기술을 가르칠 사람이 부족한 것은 자격증의 가치에 대한 믿음이 완강하기 때문이다. 자격 증명은 사실상 시장 조작의 한 형태라 할 수 있으며, 학교화된 이들에게만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이다. 기술과 직업을 가르치는 대다수 교사들은 실제로 최상급 장인이나 직공에 비해 능숙하지도 창의적이지도 않으며 의사소통에 능하지도 않다. 스페인어나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대부분의 고등학교 교사들도 반년 정도 충분히 반복 훈련을 한 학생보다 말을 정확하게 하지 못한다.

45쪽
교육 지원금에 대한 현재의 제안은 직업 교사뿐 아니라 인종주의자, 종교교육 옹호자, 그밖에 사회적 차별에서 이익을 취하는 이들의 수중에 지원금을 맡기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도 이런 교육 권리증을 학교 내에서만 사용하도록 제한하게 되면, 이미 입증된 지식보다는 그런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가정된 교육 경로에 사회 발전이 발목 잡히는 사회가 될 것이고 그런 사회에서 계속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만 혜택을 주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48쪽
우리는 우리 자신이 적당한 사람인지 검열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사회적, 지적, 정서적으로 중요한 문제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제약 없이 만날 기회를 갖는 것보다, 차라리 인가받지 않은 기술 교류-심지어 바람직하지 않은 기술까지 포함해서-가 더 예측 가능하고 따라서 덜 위험해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50쪽
1962년 이후 내 친구 프레이리는 여러 나라에서 거듭 추방을 당하게 되었다. 주된 이유는 그가 공인된 교육자들이 미리 고른 단어들을 중심으로 수업을 진행하지 않고 수업 참석자들이 가져온 민감한 단어들을 주로 사용했다는 것이었다. ...... 학교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대안은,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끼리 그 관심사를 공유할 수 있도록 모두에게 동등한 기회를 열어주는 네트워크를 만들거나 그런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형태여야 할 것이다.

58쪽
나는 최근 강제적인 학년 진급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치고 있는 중학생 단체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학생들이 슬로건으로 내세운 것은 "흉내 말고 참여를!"이었다. 학생들은 이 운동이 더 많은 교육이 아니라 더 적은 교육을 요구하는 주장으로 비치는 것에 대해 실망을 금치 못했다. 나는 그것을 보고 백여 년 전 카를 마르스크가 아동 노동의 금지를 요구하는 고타 강령의 한 조항에 반대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는 청소년 교육이 노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들어 그 조항에 반대했다. 인간 노동의 가장 위대한 과실이 노동에서 얻는 배움이고, 노동이야말로 타인을 가르칠 기회를 열어주는 활동이라고 한다면, 현대 사회가 교육에서 노동을 소외시킨 것은 경제적 소외보다 훨씬 나쁜 것이리라.

69쪽
국교가 되어버린 학교 제도가 폐지되면 소년기와 청소년기 아이들을 유아, 성인, 노인에 비해 우대하는 현재의 차별도 종식될 것이다. ...... 제도적 통념은 말하기를, 아이들이야말로 학교가 필요한 존재들이라고 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통념 자체가 사실은 학교의 산물이다. 왜냐하면 학교가 마음대로 가르칠 수 있는 대상은 오로지 아이들밖에 없다는 게 오히려 더 올바른 상식이기 때문이디. 아이들을 학교교사의 권위에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 존재를 아동기라는 범주로 구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75쪽
학교교사와 목사는 한 자리에 잡혀있는 청중에게 설교를 하는 동시에 고객의 사적인 일들을 엿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유일한 전문가들이다.

91쪽
학교가 주입하는 제도화된 가치는 수량화된 가치이다. 학교는 모든 것이 측정되는 세계, 즉 우리의 상상력은 물론이고 인간 자체까지 측정할 수 있는 세계로 젊은이들을 끌어들인다. ......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의 자리에 앉지 못하고, 그들에게 할당된 구멍에 자신을 밀어 넣고, 남이 가르쳐준 틈새에 비집고 들어가고자 애쓴다. ...... 가치가 인위적으로 생산될 수 있고 측정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학교로부터 주입받은 사람은 모든 종류의 등급화를 받아들이기도 쉽다. 단일한 척도로 국가 발전을 가늠한다든지, 아기의 지능을 측정한다든지, 심지어 평화를 향한 진전을 전사자 수로 계산하게 되는 것이다. 학교화된 세계에서는 행복에 이르는 모든 길이 소비자 지표로 포장되어 있다.

97쪽
학교는 성적에 따른 진급이라는 의례 게임을 그 구조로 갖고 있기 때문에 사회적 신화를 효과적으로 창조하고 유지하는 기능을 한다. ...... 학교가 가르치는 것은 바로 이런 게임이며, 그것이 핏속까지 침투해 하나의 습관을 형성하고 있다.   

103쪽
학교는 가르침 받을 필요를 가르침으로써 청소년들로 하여금 그들의 삶을 소외시킬 제도화에 적응하게 한다. 이런 가르침을 일단 받고 나면, 사람들은 독립적으로 성장할 동기를 상실한다.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삶이 제공하는 경이로움에 대해서도 마음을 닫는다. 제도상의 정의가 있어야만 그때서야 관심을 갖는 것이다.

108쪽
사회학자이자 미래학자인 다니엘 벨은 우리 시대의 특징을 문화와 사회 구조 사이의 극단적인 불일치로 규정한 바 있다. 일부는 종말론적 태도에 빠져 있는 반면, 다른 일부는 기술 관료들 의 의사결정에 여전히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수많은 교육 개혁가들의 경우에도 해당한다. 그들은 현대 학교의 특징을 이루는 거의 모든 것을 비난할 수밖에 없다고 느끼면서도, 동시에 또 다른 학교 형태를 제안한다. 

116쪽
바람직한 미래는 우리가 '소비'의 삶이 아닌 '행위'의 삶을 얼마나 신중하게 선택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만들고 파괴하거나 생산과 소비만을 반복하는 생활양식-즉 자원고갈과 환경오염으로 가는 길의 경유지에 불과한 생활양식-이 아닌, 우리를 자발적이고도 독립적이면서 상호 연결된 삶으로 이끌 수 있는 생활양식을 일으키는 데에 미래가 달려 있다는 얘기다. 

126쪽
앞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자동차 제조업체들은 자동차만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에 대한 수요도 생산한다. 그들은 또한 다차선 고속도로, 교량, 유전에 대한 수요까지 생산한다. 

128쪽
고속도로의 필요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낭만적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으로 끝나지만, 학교의 필요성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은 곧바로 매몰차다거나 제국주의자라는 공격을 받는다. ...... 고속도로는 인간이 가진 이동의 욕구와 필요성을 자동차에 대한 수요로 왜곡한 데서 나온 결과이다. 마찬가지로 학교는 성장과 배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자연적 성향을 교욱에 대한 수요로 왜곡한다. 

132쪽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찍이 '제작'(making)과 '활동'(acting)'이 서로 다를뿐더러 너무나 상이한 것들이어서 사실상 한쪽이 다른 쪽을 포함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일은 그 원천이 제작자에게 있는 것이지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제작은 언제나 그 자체가 아닌 것에 목적을 두지만, 활동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선한 활동은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제작상의 완성은 하나의 예술이고, 활동의 완성은 하나의 덕이다."  

134쪽
소비재 수요를 자극한다는 말은 만들고, 소비하고, 낭비하고, 재활용할 수 있는 끊임없이 새로운 물품들의 목록을 점점 더 많이 제공하는 경제로 나아간다는 뜻이다. 서비스 수요를 자극한다는 말은 덕성 있는 활동마저도 '서비스' 제도의 생산물로 '제작'될 수 있게 한다는 뜻이다. 이런 시도는 학교교육을 배움과 동일시하고, 의료서비스를 건강과 동일시하며, TV 시청을 오락과 동일시하고, 속도를 효과적인 이동과 동일시하게 만든다. 이런 선택지를 오늘날에는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142쪽
마찬가지로 많은 평화운동과 저항운동 역시 그 지지자들이 흑인이든 여성이든 청년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상관없이 국민총생산(GDP)의 증대를 통해 정의를 추구하라고 강조하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148쪽
우리의 현재 교육 제도는 교사의 목적에 봉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필요로 하는 문법적 관계망은 모든 사람이 배움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또 다른 사람의 배움에 기여할 수 있는 그런 형태여야 한다.

158쪽
좋은 교육 시스템은 세 가지 목적을 가져야 한다. 첫째,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나이와 관계없이 필요한 자원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자신이 아는 것을 나누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에게서 배우고자 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공적으로 어떤 문제를 제기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그 도전을 알릴 기회를 가져야 한다. ...... 실제로 이 기구는 전문직이 시장에 내놓고 싶어 하는 서비스의 범위 내로 대중의 학습 기회를 제한한다. 그와 달리 좋은 교육 시스템은 현대 기술을 이용해 표현의 자유, 집회의 자유, 보도의 자유를 더 널리 보장하고, 이런 자유를 교육에 충분히 활용하는 것이어야 한다. 

165쪽
현재 우리는 사물에 접근하고 그로부터 배움을 얻는 데 있어 부유한 아이와 가난한 아이 사이의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 ...... 그러나 좀 더 근본적인 관점에서 보면, 도시의 부자 아이나 가난한 아이 모두 주변의 사물 대부분으로부터 인위적으로 격리되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 산업 디자인은 그 본질을 파악하기 어려운 사물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고, 학교는 풍부한 의미들로 이루어진 사물의 세계로부터 학습자를 내쫓고 있다. ...... 비전문가들은 시계가 똑딱거리거나 전화벨이 울리거나 전동타자기가 작동하는 이유를 알아내려고 할 때마다, 그렇게 하면 고장이 날 것이라는 경고를 받고 낙담한다. 그는 트랜지스터라디오의 작동 원리에 대해 배우기는 하지만 스스로는 그것을 알 수 없다. 이런 형태의 디자인은 창의력을 잃은 사회를 만들기 쉽다. 그런 사회에서는 전문가들이 그들의 전문 지식 뒤에 숨어서 타인의 평가를 쉽게 회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180쪽
기술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전수하는 데서 이익을 얻기보다는 기술의 희소성에서 이익을 얻으려 한다.

184쪽
최악의 학교 수업은 학생들을 한 교실에 몰아넣고 수학과 사회와 철자법을 천편일률적으로 가르치는 것이다. ...... 체스 고수는 대등한 상대를 찾으면 언제나 즐겁고, 초보자는 초보자대로 비슷한 상대를 찾으면 즐겁다. 이것이 바로 클럽의 존재 이유이다. ...... 학교의 역(逆)은 특정 순간에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에게, 그들이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든 간에 서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제공하는 제도일 것이다. 

196쪽
심지어 지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사가 자신에게 해준 가장 중요한 서비스가 우연한 만남이나 개인지도 시간에 들었던 충고나 조언이라고 한다. 학교 없는 세상이 되면 교육자 역시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고, 좌절한 교사들이 오늘날 하고 있는 척하는 일을 실제로 할 수 있을 것이다. 

215쪽
태초의 악들을 퇴치하기 위해 고안된 각각의 제도들은 안전장치로 인간을 자동 봉인하는 관이 되었다.

216쪽
현대 농업은 토양을 오염시키고 고갈시킨다 .'녹색혁명'이 종자 개량이라는 수단을 통해 단위면적당 수확량을 3배로 늘렸다고 하지만, 이것은 비료, 살충제, 물, 화석에너지를 더 높은 비율로 투입한 결과일 뿐이다. 이처럼 제조업이 된 농업은 다른 모든 상품 제조와 마찬가지로 바다와 대기를 오염시키고 대체 불가능한 자원들을 고갈시킨다.



옮긴이 해설


230쪽
특히 한국의 학교교육은 수월성이라는 이름 아래 쭉정이 골라내기 교육이 되어, 한편으로는 능력주의 사회의 탈락자들을 양산하는 기능을 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입시 경쟁을위한 엄청난 사교육비-성공 확률이 희박한 도박판의 판돈 같은-로 가정 경제를 갉아먹는 주범이 되었다.

232쪽
제도교육이 강제적이고 획일화된 교육과정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시민의 창의성보다는 기존 시스템에 끼워 맞출 수 있는 부품을 공급하는 것이 국가와 경제에 더 도움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237쪽
인간은 최소한의 도구를 만들어서 스스로 땅을 일구며 생존을 도모하는 존재였고, 또 자연은 적절한 한도 내에서 인간에게 충분히 만족할 만큼의 혜택을 베푸는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필요(needs)란 산업 체제가 생산한 상품의 소비를 위해 인간에게 원래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불가피한 조건인 양 덧씌운 것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사실 우리가 꼭 필요하다고 여기는 생산품들은 그것을 보기 전까지는 우리에게 필요한지 몰랐던 것들이 대부분이다. 근대 경제학은 이처럼 한편으로는 자연의 희소성을, 다른 판현으로는 인간의 필요를 지어냄으로써 생산과 교환의 시장경제가 인간에게 본래적인 것처럼 주장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해왔던 것이다.
일리치에게 필요의 경제가 문제인 것은 무엇보다 인간의 자급자족 능력 곧 자연의 혜택에 의지하여 스스로 생계를 꾸려갈 수 있는 본연의 능력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 친구들과의 즐거운 오락보다는 TV의 볼거리가 훨씬 자극적 쾌감을 주고, 비닐 포장에 담긴 새 메뉴의 음식이 흙 묻은 식재료로 차려낸 한 끼 식사보다 더 인정을 받는 사이, 우리는 내 손으로는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무능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특히 학교, 의료, 교통은 인간의 삶을 근대 산업 체제에 포획하기 위한 대표적 제도들인데, 일리치는 <학교 없는 사회>, <의료의 한계>,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등에서 이 제도들의 문제를 통렬히 비판한다.

240쪽
그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대량생산과 소비를 통해 자신을 유지하고 끝없는 성장을 도모하지만, 내부로부터의 모순으로 인해 결국 자신을 악화시킬 처지에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바로 역생산성 때문이다. 역생산성이란 상품과 서비스의 생산이 일정 한도를 넘어서면 포화와 정체를 일으켜서 만족이 오히려 저하되는 것을 말한다. 편리하려고 탄 자동차가 도리어 이동 시간을 훨씬 더 많이 소모한다든지, 최신 기기들에 밀려 간단하고 쓸모 있는 옛 도구들이 모조리 사라진 것이 그러하다. ...... 도시 밀집이 슬럼을 낳고, 고속도로가 유령마을을 만드는 것도 상품과 제도적 서비스가 만들어낸 결과라 할 수 있다. 

241쪽
대량생산과 소비로 자연을 끝없이 낭비하면서도, 사람들에게는 자연을 직접 이용할 수도, 상품을 통해 충분한 만족을 얻을 수도 없게 하기 때문이다. 역생산성의 효과 때문에 아무리 필요를 충족해도 사람들은 늘 좌절과 불만의 빈곤한 상태를 견뎌야 한다. 

241쪽
일리치는 이와 대비되는 인간 삶의 이상적 형태를 공생공락(conviviality)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꽤나 어려운 이 단어는 함께(con-) 즐겁고 활기찬(vivere) 상태를 말하는데, 일리치는 '에우트라펠리아'(eutrapelia)라는 그리스 어원의 단어로 이 말을 풀이한 적이 있다. 친구들끼리 악의 없는 조롱을 건네며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잔치석상의 분위기를 가리키는 말로, '절제된 즐거움'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252쪽
가난의 현대화, 근본적 독점, 역생산성은 이반 일리치가 우리에게 남겨 놓은 귀중한 통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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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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