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멸감(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 - 김찬호


6쪽
한국의 게시판 댓글에서 악플 대 선플의 비율은 4대1로, 1대4인 일본, 1대9인 네덜란드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21쪽
'생각이 엔진이라면, 감정은 가솔린이다.' 프로이트의 말이다. 

29쪽
감정의 의식은 수면 아래서 나를 계속 움직인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나는 누구인가. 그 '타자'의 정체를 탐구함으로써 나다운 삶에 한 발자국씩 다가갈 수 있다. 

41쪽
한국인들은 사소한 차이들에 집착하면서 위세 경쟁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러다 보니 여러 가지 이유로 모멸을 주고받기 일쑤다. 

41쪽
제도가 모멸을 줄 때도 많다. 날로 복잡하고 거대해지는 관료제는 인간이 지닌 실존적인 개별성을 인정하지 않을 때가 많다.

57쪽
동기는 가볍지만 결과는 중대할 수 있다. '유희'와 '희롱', '노는 것'과 '놀리는 것' 사이의 간격은 의외로 좁다.

58쪽
상대방이 진정으로 변화하기를 원한다면, 결함을 지적하고 꾸지람을 하되 그가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주어야 한다.

61쪽
가령 개에게 먹이를 줄 때 휙 던져서 주든, 그릇에 잘 담아서 얌전하게 놓아주든 개는 개의치 않는다. 

64쪽
여기(브레네 브라운의 설명)에서 수치심은 본인의 잘못이나 결함에 대한 타인의 지적을 받아들이면서 느끼는 부끄러운 감정이고, 모욕감은 상대방이 나를 대하는 방식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 화가 나는 감정으로 대비되고 있다. 즉, 수치심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친 자기의 모습에서 유발되는 감정이라면, 모욕감은 다른 사람이 자기를 대하는 태도나 방식에서 느껴지는 감정이다. 따라서 수치심에는 죄책감이나 미안함이 섞일 수도 있지만 모욕감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모욕감을 유발한 사람이나 집단에 대해서 분노나 원한 같은 감정을 갖게 된다.

67쪽
모욕감을 느낄 경우, 그 감정을 유발한 사람을 분명하게 지목할 수 있다. 반면에 모멸감은 누군가가 나를 직접 모욕하지 않았다 해도 느낄 수 있다. 또는 어떤 상황 자체가 모멸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67쪽
흥미롭게도 감정심리학의 연구에 따르면, 누군가를 경멸할 때는 심장박동이나 혈압 또는 뇌의 신경전달물질 등 생리적인 반응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상대방에게 모멸감을 주는 데 별로 힘이 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무시하는 표정이나 비웃는 눈빛, 퉁명스런 말투로도 간단하게 그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크고 작은 모멸감을 불러일으키며 살아가지 않는가.

67쪽
순전히 나의 낮은 자존감 때문에 모멸감을 느끼기도 한다는 점이다. ...... 그들은 상대방의 범상한 언행에서 자기가 무시당했다고 느끼고, 그로 인한 인지 부조화와 자괴감을 타인에 대한 공격으로 표출한다. 모욕을 쉽게 주는 사회 못지않게 위험한 것이 모멸감을 쉽게 느끼는 마음이다. 그것은 또 다른 모멸감을 확대 재생산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74쪽
사회학자 고프만Erving Gofman의 개념을 빌리면 '훼손된 자아'가 반작용을 일으키면서 자아를 증명하려는 마음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76쪽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수치심을 일으키는 원인이 무엇인가이다. 객관적으로 '사소한' 일로 인해 수치심을 느낄수록, 그런 느낌에 사로잡혀 있는 자신의 모습이 다시 수치심을 증폭시키고 그것을 감추고 싶은 마음도 커지게 된다. 

80쪽
사람의 정신을 파괴하는 것은 자신이 맞는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자유의지에 반해 굴복한다는 느낌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정혜신 강연 "폭력 트라우마와 체벌 없는 교육"의 내용 정리. <경향신문> 2011년 3월 29일자)

83쪽
직장인들이 가장 스트레스 받는 상황은 일은 똑같이 하는데 동료가 더 많은 연봉을 받을 때가 3분의 1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돈은 거래와 저장의 수단일 뿐 아니라 가치를 측정하는 기능도 지니고 있다. ...... 직장인들에게 봉급은 생활비이면서, 조직 내에서 위신의 상징이기도 하다.  

88쪽
돈 벌면서 받은 '천대'를, 돈 쓰면서 받는 '환대'로 덮어씌우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또한 만만치 않다. ...... 특히 한국처럼 타인과의 비교에 집착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 대안이 있다면 자기보다 못한 이들과의 차이를 부각시키는 것이다. 소비의 규모와 수준에서, 다른 사람들이 쉽게 섞여들 수 없도록 만드는 '구별 짓기'가 그것이다. ......우리는 남들을 열등하게 만들면서 자신의 위신을 세우려 한다. ......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그 절대적인 기준이다. 경제의 수단으로 고안된 돈이 삶의 목적이 된다. 그 결과 삶 자체가 수단이 되어버린다. 사용설명서specification의 약자인 '스펙'이 경력 및 자격증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92쪽
대부분의 감정노동자들은 고객의 환심을 사기 위해 밝은 얼굴을 보여주어야 하지만,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채권 추심원은 험한 인상을 지으면서 위협적인 분위기를 조성해야 하고, 장의사는 유족의 아픔에 공감하며 슬퍼하는 표정을 지어야 한다. 문제가 되는 감정노동은 늘 미소를 짓고 상냥함을 드러내야 하는 분야들에서 주로 수행된다. 

93쪽
'감정노동'은 사회학자 앨리 러셀 혹실드가 처음 내놓은 개념으로, 이를 다룬 책의 제목 "The Managed Heart"에 핵심이 담겨 있다. ...... 타인을 위해 마음을 길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 혹실드는 이를 가리켜 '감정 부조화emotive dissonance'라고 하는데, 감정과 표현을 억지로 분리하는 것을 말한다. ...... 무엇보다 치명적인 것은 노동자가 자신의 감정에서 소외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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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쪽
한국인들이 그런 느낌에 거듭 사로잡히고 '억울하다'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는 것은 역사적 상황이나 사회적 현실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크고 작은 힘에 휘둘려 손해를 입거나 불리한 처지에 놓였다고 여겨지는 일이 많은 것이다. 그 힘이 정당하지 않고 그것을 행사하는 사람이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되기에,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과 결과에 동의할 수 없다. 그럴 경우 부조리한 권력에 맞서거나 개선을 도모해야 마땅하지만, 많은 경우 그와 비슷한 권력을 획득하려고 애를 쓴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은 그렇나 사고방식을 단적으로 표현한다. 

113쪽
마찬가지로 '못산다'를 영어로 번역하면 'poor'가 된다. ...... '잘사는 것'을 경제적인 부유함으로 등치시키는 어법에는 한국인의 생활 경험과 가치관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124쪽
신분제의 와해에 결정타를 매긴 것은 6.25 전쟁이다. 이에 대해서는 역사학과 사회과학계에서 이견이 거의 없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엄청난 살상이 자행되면서 기존의 질서가 통째로 뿌리 뽑혔다. ...... 권력의 시스템이나 사회 구조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거나 논쟁하지 못했고, 새로운 세계를 향한 비전을 창조하면서 현실과 맞붙어 싸운 경험이 박약했다. 그 결과, 겉으로 보이는 신분제도는 사라졌으나 신분의식은 온존하게 되었다. ...... 다만 그 틀이 전근대적인 신분 질서가 아닐 뿐이다. 그 대신 학력, 빈부, 외모, 지위 등이 강력한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141쪽
개인주의는 여러 속성을 지니고 있지만, 자신의 존재 가치를 스스로 매긴다는 긍정적 측면이 있다. 한국에는 그런 의미에서의 개인주의가 뿌리내리지 못했다. 남에 대해 신경을 너무 곤두세운다. 그것은 두 가지 차원으로 나뉘는데, 한편으로 타인에게 필요 이상의 관심을 보이면서 참견하고 타인의 영역을 침범한다. 다른 한편으로 자기에 대한 타인의 평가와 반응에 너무 예민하다. ...... 사회적 결속이 느슨해지고 사적인 영역에서도 친밀한 관계가 어려워지는 상황, 그렇다고 개인주의적 세계관이 형성된 것도 아니어서 타인의 시선에 늘 전전긍긍하는 삶은 모멸감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145쪽
한 가지 사회적인 징후로, 언제부터인가 '굴욕'이라는 표현을 남용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유명인이 어정쩡한 옷차림으로 등장하면 '굴욕 패션'이라고 명명하고, 잘 팔리던 명품의 매출액이 급감하자 '굴욕적인 현상'이라고 묘사한다. 그냥 스타일이 어수룩한 것이고 단순히 판매가 부진한 것뿐인데, 거기에 자존심을 결부시키면서 모멸감을 강요하고 있다. 그런 풍조가 만연하면서 사람들은 타인을 쉽게 업신여긴다. 

165쪽
예를 들어 배설물 고문을 들 수 있다. 수감자들이 배변을 하지 못하도록 심한 몽둥이질로 통제하는 것이다. ...... 결국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오는 배설물은 옷과 침대에 묻고, 결국 다른 사람의 몸에도 옮겨가기 때문이다. 왜 그런 학대를 했을까. 테렌스 데 프레는 2차 세계대전 때 만들어진 수용소에서의 인간 본성을 분석한 <생존자>라는 책에서 그 효과를 두 가지로 분석한다. 첫 번째는 수감자들의 정신이 황폐해지고 서로를 혐오하게 된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상대방의 배설물이 내 몸에 묻는다면 인간적인 유대감을 유지하기 어렵다. 그렇게 파괴된 관계 속에서는 수감자들이 힘을 합쳐 통제 시스템에 저항할 가능성이 지극히 낮아진다. 두 번째는 수용소를 지키는 독일군들이 수감자들을 짐승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몸에 배설물이 묻어 악취가 나는 사람들을 자기와 동일한 인간으로 여기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별 죄책감 없이 잔혹한 행위를 할 수 있다. 

228쪽
프랑스의 'Le Seuil'(문턱)라는 단체는 법무 당국과 협의하여,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가야 하는 청소년들에게 3개월 동안 2천 킬로미터를 걸으면 무조건 석방시켜주는 제도를 운영하는데, 거기에 참여한 청소년들의 재범율은 20퍼센트(일반 범죄 청소년은 80퍼센트)에 불과하다고 한다. 

229쪽
신경건축학이라는 독특한 분야를 개척한 에스더 M. 스턴버그는 <공간이 마음을 살린다>라는 책에서 흥미로운 사례를 제시한다. 똑같은 수술을 하고 나서 일주일 정도 입원하는 환자들의 경우, 창밖으로 숲을 볼 수 있는 병실의 환자가 그렇지 않은 병실의 환자들에 비해 하루 일찍 퇴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29쪽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의 처절한 경험들 가운데 프리모 레비의 증언을 빼놓을 수 없다.  ...... 물 한 컵을 배급받았을 때 그것을 모두 마셔버리는 사람과 일부를 아껴서 몸을 닦는 데 쓰는 사람이 있었는데, 후자의 생존율이 더 높았다고 한다.

237쪽
돈을 아무리 많이 받는다고 해도 내어줄 수 없는 것이 많다. 그 목록이 길수록 잘사는 사람이라고 말해도 좋겠다.

238쪽
"신부님께서 제게 돈이든 집이든 일이든 그냥 베푸셨더라면 아마도 저는 다시 자살을 시도했을 겁니다. 제게 필요한 것은 살아갈 방편이 아니라 살아야 할 이유였기 때문입니다."(<단순한 기쁨> 아베 피에르, 마음산책)

263쪽
미술사학자 오스카 코코슈카는 이 그림이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램브란트의 마지막 자화상을 보았다. 추하고 부서진, 소름끼치며 절망적인, 그러나 그토록 멋지게 그려진 그림을. 그리고 갑자기 나는 깨달았다. 거울 속에서 사라지는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그릴 수 있다는 것. 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가." 

<자화상> 렘브란트, 1668 - <모멸감> 김찬호, 262쪽


286쪽
어떤 감정이 일어날 때 거기에 매몰되지 말고, 감정 자체를 주시해보자. 내가 지금 이렇게 느끼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스스로의 감정과 거리두기가 가능해진다. 어떤 사건이나 상대방의 언행이 나의 반응(행동)을 즉각적으로 불러일으키도록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그 상황에서 생겨나는 감정을 객관화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떻게 반응할지를 선택할 수 있다. 

299쪽
비교 속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그것을 인정받는 게임에 몰두하다 보면, 행복과 불행의 양극을 오가는 진자운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내게 행복감을 주는 바로 그 점이 불행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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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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