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몬의 거짓말 - 로빈 스타인 델루카


11쪽
해제 - 정희진
최재천 교수의 젠더에 관한 강의를 흥미롭게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생물학이 진화와 문화에 관한 학문임을 강조하면서, 미국에서는 생물학적 아버지와 유전자적 아버지를 철저히 구분한다고 주장한다. 한국 사회와는 반대로, 생물학적 아버지의 가장 큰 특징은 문화와 인간의 구체적 활동 즉 양육(nurturing)을 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생물학적 아버지는 자녀를 키운 아버지(biological father)인데, 우리 사회에서 말하는 생물학적 아버지는 실제로 유전자적 아버지(genetical father)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유전자적 아버지를 생물학적 아버지라고 생각한다면, 생물학은 '없는 학문'이라는 호소가 인상적이었다. 

 

31쪽

자신의 분노를 극심한 호르몬 탓으로 돌려버릇하다 보면 여성도 여러 가지 대가를 치르게 된다. 가령 감정의 혼란을 야기하는 진짜 문제를 처리하지 못하고, 자시 인식에 필요한 자신의 감정을 살피지 못한다. 결국 호르몬 신화 때문에 여성은 자신감을 느끼거나 인간관계에서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솔직하며 책임감 있게 살기 어려워진다. ...... 자신의 감정을 받아들이는 여성은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 불행해지는지 이해하고 그 상황을 다룰 힘을 얻게 된다.

 

39쪽
부모는 초경을 시작한 딸아이의 자유를 제한함으로써 성숙해진 몸은 뭔가 위험하고, 그로 인하여 곤경에 처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무심코 보내기도 한다. 또한 생리혈은 본능적으로 불순하다고 여긴다. ...... 이와 마찬가지로 생리 관련 제품의 다지인과 광고 콘셉트는 '은밀함 유지'를 지향하는데 이는 생리가 너무 끔찍한 것이기 때문에 탐폰과 생리대를 비밀스럽게 가지고 다닐 수 있도록 작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풍긴다.​ 

58쪽
이처럼 성별 고정관념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인간이 어떤 모습인지 '기술적'으로 진술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고', '어떤 모습이어서는 안 되는지'를 '규범적'으로 진술하기 때문이다. 

90쪽
마치 걸레질을 하면서 환청을 듣는 한이 있어도 결레질을 한다는 것 자체가 정신이 건강하다는 뜻이라는 듯이.

90쪽
생리전증후군은 여성의 분노와 좌절을 정신병으로 둔갑시키는 수단이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96쪽
사소한 어려움을 흔히 있을 수 있는 일, 무의미한 일로 이해하기보다 거기에 집착하게 만들어 바깥세상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일보다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불평거리로 에너지와 집중력을 돌려버린다. 

164쪽
따라서 임신 기간이 위험천만한 시기이며 완벽한 아이를 낳기 위해서는 늘 경계를 늦춰선 안 된다고 모두가 가정해버리면 끊임없는 걱정만이 유일하게 책임감 있는 태도인 양 되어버린다. 

167쪽
여성이 최고 수준의 의료 시설을 활용하지 않으면 호르몬 신화에서는 그 여성을 무책임하다고 여긴다. 

202쪽
이 사건을 다룬 기사들 대부분, 자유주의진영과 보수 진영 모두 앤드리아한테 산후우울증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는 산후정신병이었는데 말이다. ...... 언론 보도가 계속 이 두 장애를 혼용하는 바람에 대중의 인식까지 흐려졌다. 산후우울증이 오해와 두려움과 낙인의 대상이 되면 누가 상처를 받게 될까? 답은 '모두'다. 

208쪽
여성들이 산후기분장애로 도움을 청하는 데 주저하는 가장 강력한 이유는 '모성 신화'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모성 신화란 모성이 '자연스럽고 쉬우며 언제나 기쁘기만 한 것'이라는 통념이다. 여성은 아이를 돌보는 데 소질이 있고 아이를 돌보면서 매 순간 즐겁기만 해야 한다는 관념은 여러 문화권의 공통적인 가치관이다. ...... 엄마는 품위 있고 우아해야 한다는 중국의 기준은 힘세고 유능해야 한다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기대만큼이나 혹독하다. 몸과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 우울증의 정서적 증상(슬픔, 절망, 체념, 쾌감 상실, 눈물)은 어떤 상황에서도 견디기 힘들지만 산후우울증은 대부분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모순까지 초래한다. ...... 산후기분장애에는 세 가지 유형, 즉 산후우울감, 산후우울증, 산후정신병이 있다고 언급했다.

227쪽
신생아를 돌보며 녹초가 될 정도의 육체노동에 시달리고, 잠은 부족하고, 기대는 자꾸 어긋나고, 이런 것들이 모두 새내기 부모의 좌절과 분노를 초래할 수 있다. ...... 우울, 불안, 수면 박탈, 분노는 유해한 조합이다. 

228쪽
우선 우리의 관점부터 바꾸면 된다. 신생아의 출생을 사적인 상황으로 여기기보다 공동체의 도움이 필요한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다. ...... 이러한 접근법의 핵심은 모성에 대해서 현실적인 시각을 갖는 것이다. 그 말인즉슨 호르몬 신화의 생물학적 당위성도 잊고, 여성은 생물학적으로 이타적인 양육 기계로 만들어졌으므로 엄마 노릇에 대한 선천적 본능과 충동을 타고났다는 발상을 거부해야 한다는 뜻이다. 

238쪽
의학계는 완경을 두고 여성의 신체 건강과 정신 건강을 당사자의 안녕을 위한 중요한 측면으로 보기보다 이때는 물론 이후에도 남편의 행복을 위해 여성성을 유지해야 하는 시기라는 데에 더 주목했다. 

243쪽
1990년대 광고에서는 의사가 나와 "완경기와 그 이후 건강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의사에게 문의하십시오"라고 말하기도 했고, 여성의 건강에 해를 끼칠 수도 있는 약을 여전히 팔아먹으면서 요즘은 작전을 바꿔 여성에게 완경을 지배하라는 수작을 부리고 있다. 이런 태도는 1980년대와 1990년대 내내 완경을 끔찍한 질병으로 제시하던 우리의 문화와 자기 계발서와 대중매체에 뿌리를 내렸다. 

287쪽
의사들이 정보 자료집을 약 패키지에 넣는 데에 반대한 이유는 간단하다. 그렇게 되면 환자가 알아도 되는 정보의 양을 정할 수 있는 자신들의 자주권이 위축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의사라면 그토록 중대한 위험 사항을 환자가 알길 바랄 거라고 생각하고 싶겠지만 당시 의사들은 환자와의 관계에서 권위주의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권위를 잃는다는 건 의사들에게 큰 위협이었다. 

297쪽
1980년대와 1990년대 여성건강운동가들이 씨름했던 문제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의학 연구에서 여성을 툭하면 제외하는 관행이었다. 연구자들은 여성의 생리 주기가 연구 결과를 더 복잡하게 만들어서 약이나 치료제의 효능을 확증하기가 더 어려워질까 봐 걱정했다. 이는 곧 질병, 치료제, 예방법에 관한 포괄적 일반화가 남성만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근거하여 여성에게 적용되었다는 말이다. 

322쪽
우리는 현실을 실제보다 단순하게 개념화하는데 만일 우리가 접촉하는 모든 것이 지닌 복잡한 본질을 모조리 파악하려고 하면 뇌가 먹통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일반화하고 범주화하는 능력은 필수이자 장점이다. 그러나 인간을 성별에 따라 대충 범주화한다면 개개인의 특징은 하찮아진다. 범주가 그 범주에 배정된 인간보다 중요해져버리면 인간이 고통받는다. 

327쪽
성별에 적합한 행동에 대한 보상과 성별에 위배되는 행동에 대한 처벌이 오랫동안 이어지다 보면 사람들은 더 이상 타인의 단속을 받을 필요가 없게 된다. 내면의 단속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성별 규범을 내면화하고 그것을 준수하기 위해 자기를 규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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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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