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꿈치 사회 - 강수돌

43쪽
따라서 유일한 대안은 그 기업이 가는 곳마다 모든 노동자들과 연대하여 통일된 조건을 요구하는 것이다. 경쟁을 그만두는 것, 이것이 '노동조합'의 원초적 존재이유다. 즉 '경쟁과 분열'을 통해 지배와 착취를 강요하는 자본에 맞설 수 있는 것은 노동자 간 '경쟁의 지양'을 통한 단결과 연대뿐이다. 이것만이 노동자의 유일한 무기다. 이런 본질을 모든 노동자들이 꿰뚫어보고 실천하지 못한다면 노사간 힘겨루기는 결과가 뻔하다.​

54쪽
그렇다면 이 자본은 어떻게 해서 몸집을 효과적으로 불리는가? 바로 생존경쟁을 통해서다. 우선 각 나라별로 '국가경쟁력'을 드높이는 경쟁을 시키면 결론적으로 어느 나라가 일등을 하는가와 무관하게 경쟁에 참여하는 모든 나라가 최선을 다해 (허리띠를 졸라매며) 열심히 일할 것이다. 일한다는 것은 수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한편으로는 사람의 정신적, 육체적 노동력을 최대한 짜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의 물리적, 생태적 생명력을 최대한 짜내는 것을 말한다. 그 과정에서 사람과 자연이 훼손되고 파괴되어도 수출 경쟁력만 높인다면 좀 참아야 한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기업가나 정치가가 그렇게 말하고 언론이나 교육이 그 말을 이어받아 온 사회로 전파한다. 마침내 일반 사람들은 그 말을 굳게 믿고 내면화한다. 그렇게 해서 자본의 논리가 사람의 논리인 것처럼 둔갑하게 된다.

78쪽
기득권 그룹은 기득권 자체를 누리면서 중독되어가고, 비기득권 그룹은 기득권 자체를 선망하고 열망하면서 중독되어가기 때문이다. 나는 이를 각기 향유중독과 동경중독이라 부르고 싶다. 결국 상층부건 중하층부건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기득권의 본질이나 원천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기득권을 차지하려는 강박에 사로잡힌 나머지 기득권 중독에 빠진 결과, 우리는 이 잘못된 게임 자체를 바꾸려하기보다는 너도 나도 그 속에 편입되기 위한 게임에 몰두할 뿐이다.

82쪽
요컨대 저항과 억압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성공한 자에 대한 부러움이 한데 섞인 결과, 우리는 '강자 동일시' 심리를 강하게 내면화한다. 많은 경우 우리는 (힘 센 자를) '미워하면서도 닮아가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는데, 이것도 같은 원리에서 나온다. 그리하여 우리는 소통과 연대를 통해 옆 사람과 손잡고 더 나은 구조를 창조하려는 변화의 의지를 속으로 억누르면서, 오로지 기득권 경쟁 구조에 잘 순응하여 개인적으로 성공하고 보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며 경쟁을 내면화하고 만다. ...... 그 결과 역설적으로 사람들을 경쟁하게 만든 극소수 지배자들의 힘은 더욱 강해진다. 

99쪽
오늘날 진정으로 우리가 시험보아야 하는 것은 '이런 시험이 과연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문제다. 기존 시험이란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기억력이 좀 더 탁월함을 뽐내는 데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그 사람 생각의 깊이나 인생관의 진실성이나 올바름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다.

99쪽
입시경쟁이 결국은 기업들이 써먹기 위한 노동력 경쟁으로 연결되고, 노동력 경쟁은 결국 상품경쟁, 생존경쟁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학교는 가르치지 않는다.

99쪽
심지어 생활환경을 정리하고 청소하는 일마저 벌칙의 일부로 만듦으로써, 그것이 마치 죄인들이 하는 일인 양 가르치고 만다.

107쪽
우리가 갖는 불안감의 뿌리도 우선은 여기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앞에 말한 확신의 근거라는 면에서 첫째, 남들이 다 가지 않는 '독특한' 길을 가려는 데서 오는 것, 둘째, 통상적으로 성공한 사람을 모델로 하지 않아 '불확실한' 길을 가려는 데서 오는 것이다. ...... 남들이 간다고 나도 덩달아 가는 것은 겉보기에는 '안심'이 되지만 속으로는 늘 (가장 중요한) '2퍼센트 부족', 즉 '공허함'을 느낄 뿐이다.

111쪽
기득권층은 기득권에 중독되어 변하지 못하고 비기득권층은 기득권을 동경하고 강박적으로 집착하기에 변하지 못한다. 이 모든 현상은 개인적 차원이나 사회적 차원에서 우리 모두가 병들어감을 암시한다. 경쟁의 승자가 겉보기에는 폼 나는 승리에 도취될지 모르나 그것은 일시적이며, 진정한 내면의 평화나 행복의 관점에서는 결코 '인생 성공'이 아닐 수 있다. 남들을 다 누르고 자신이 최종 승자가 되려는 과정에서 남들을 울리고 자신을 억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갈수록 정도는 심해진다. 그러니 경쟁의 성공 또는 성공에 대한 집착은 승자나 패자 모두를 아프게 하고 병들게 한다. 개인도 변해야 하지만 시스템도 같이 변해야 한다.

112쪽
또한 나 혼자만 하면 불안하지만, 더불어 같이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상담하고 토론하고 같이 실천하면, 불안감이 아니라 기쁨이 커진다. 생태유아교육운동, 참교육운동, 동화읽는어른모임, 어린이책시민연대, 어린이도서관연대, 참교육학부모연대, 평등교육학부모연대, 대안교육연대, 대안교육부모연대, 사교육없는세상, 각종 인문학모임, 작은도서관연대, 학벌없는사회 등 풀뿌리 모임들이 무수히 생성되는 것도 바로 그런 까닭이다. 오늘 당장 주변에 그런 모임들이 없는지 온라인, 오프라인에서 찾아보라.

127쪽
자본주의 기업의 목적은 이윤추구다. 이를 부정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의 경제활동이 모두 이윤추구를 기본원리로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 예컨대 말로 모건이라는 미국의 백인 여성 의사가 쓴 <무탄트 메시지>에서 호주의 원주민 부족 중 하나인 참사람 부족은 이렇게 말한다. "원래 비즈니스란 사람들이 잘 먹고사는 데 필요한 재료들을 조달하기 위해 생겨난 것인데, 오늘날 비즈니스들은 그 자체의 유지와 존속이 목적이 되어 변질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127쪽
하나는 자본주의 생산성은 근본적으로 '파괴성'이라는 점이다. 둘째는 자본주의 기업은 본질적으로 '이익은 사유화하되 비용은 사회화'한다는 점이다. 셋째는 자본주의 경쟁은 '너 죽고 나 살자' 식의 적대적 성격을 가지며, 일등부터 꼴찌까지 자본의 논리에 모두 지배당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131쪽
소수의 승자와 다수의 패자로 갈라지는 게임이 자본주의다. 일관되게 양심적인 기업은 다수의 패자에 속하기 쉬운 현실이야말로 사회적 낭비의 극치가 아닐까? 이런 면에서 기업들은 그 '기업의 사회적 책임'도 경쟁력이나 이미지 향상에 도움이 되는 만큼만 수행할 수밖에 없는 근원적 한계를 갖고 있다.

152쪽
당시(2012년) 이명박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했는데, 독일 노동자와 시민들(교포 포함)이 대통령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하며 반대 시위를 했던 모양이다. 대통령 경호원들이 시위자를 한국식으로 마구 저지하려 하자 독일 경찰이 그 경호원들을 체포했다는 것이다. 이게 선진국다운 모습이다.

152쪽
일하는 사람들, 사회의 곳곳에서 땀 흘리는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도록 하자는 것이 경제민주화다.

165쪽
엄밀히 말하면, 자본은 늘 위기에 놓여 있으며, 역설적으로 자본은 사람들의 '위기의식'을 먹고산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위기의식을 강하게 느껴 생존경쟁에 몰입할수록 자본은 사람과 자연의 엑기스를 더 효율적으로 짜낼 수 있기 때문이다.

174쪽
특히 자본 입장에서는 노동력의 유연한 투입을 위해, 그리고 취업자의 노동통제를 쉽게 하기 위해서라도 실업자들이 늘 많으면 좋다.

179쪽
돈벌이나 경쟁력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나 삶의 질 차원에서 꼭 있어야만 한다면, 이를 일자리로 인정하고 그에 걸맞은 교육훈련을 실시해야 한다.

189쪽
부자들은 자기 정당을 확실히 아는데 서민들은 자기 정당이 뭔지 잘 모른다. 서민들의 의식 수준도 문제이고 서민들에게 "우리가 확실한 당신의 정당"이라며 나서는 정당도 없다. 안타깝게도 힘이 있으면 생각이 없고, 생각이 있으면 힘이 없다.

192쪽
이 진퇴양난의 상황을 돌파하는 진보적 대안은 '모두 일하되 조금씩' 일하는 것이다. 정규직을 원칙으로, 모든 이의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가 우리 모두의 구호가 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이것이 경쟁과 분열의 노동현실을 극복하고 소통과 연대의 미래로 가는 지름길이다.

194쪽
자본과 권력은 경기가 좋으면 "위기에 대비해야 한다"고 겁을 주고 경기가 나쁘면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며 겁을 준다. 사람들은 경기가 좋아도 힘들고 나빠도 힘들다. 이에 우리의 과제는, 위기감이나 두려움에 기초한 선전선동의 허상을 낱낱이 벗겨내는 것이다.

203쪽
경찰청 치안본부와 안기부가 일종의 경쟁 관계에 놓여 있었던 셈이다. 검찰이나 보안사도 또 다른 경쟁자였다. 물론 그들이 소박하게 원하는 건 '한 건' 올려서 보너스와 승진이라는 보상을 받는 것에 불과했다. 실은 그들도 먹고살기 위해 직장에 충실할 뿐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조직 간 경쟁 관계를 통해 권력자들은 상부에서 더욱 효율적으로 정보를 수집, 조작하고 그를 통해 전 국민을 더욱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권력자들은 무대 뒤에서 자본이 던져주는 떡고물을 받아먹으며 대체로 경제성장과 자본축적 논리에 순응하는 방향으로 국정을 운영한다. 내가 '경쟁은 지배를 위한 효과적 도구'라든지 '경쟁과 지배는 동전의 양면'이라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과 맞닿아 있다. 경쟁은 결코 인간의 논리가 아니며 자본의 논리에 불과하다.

216쪽
대개 우리는 공동체를 정의할 때, 언어나 지역, 혈연을 중심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이런 '집단' 중심의 정의는 배타성을 내재한다. 결국에는 다른 공동체의 시기, 갈등, 전쟁, 폭력을 필연적으로 초래하게 마련이다. 식민주의, 제국주의 이래 오늘날까지 관찰되는 국제관계가 바로 그것 아닌가? 그러나 공동체 개념의 정의엔 집단 중심이 아니라 '관계' 중심의 정의가 필요하다. 즉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관계,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 그 자체로 선물이 되는 관계, 바로 그것이 진정한 공동체 아닌가. 따지고 보면 공동체라는 말의 어원이 그렇다. 즉 공동체(Community)란 서로(com) 선물(munus)를 나누는 관계다.

220쪽
예컨대 아이를 잉태하거나 낳는 행위(정자/난자 은행, 산부인과 병원), 아이를 키우는 행위(유아원, 놀이방, 학교, 학원), 식의주 등 살림살이 행위(식당, 세탁소, 주택 시장). 어려울 때 돕기(금융, 사채, 보증 보험), 문화 향유(콘서트, 콩쿠르), 여가(여행, 관광, 엔터테인먼트), 소통(정보통신, 전화 인터넷), 그리고 심지어 사랑 행위(성매매, 전화방, 섹스 쇼)까지도 온통 '서비스 경제' 속으로 편입되고 말았다. 그 결과 서비스는 있되 참된 봉사는 없고, 학교는 있되 참교육은 없다. 또 고급 아파트는 있되 참살림은 없고, 레스토랑은 있되 참 먹을거리는 없다. 사실이 이럼에도 오늘날 주류 경제학에서는 서비스 경제, 즉 3차산업이 발전할수록 '선진국'이라는 잘못된 관념이 지배하며 현실 삶을 피폐하게 한다. 따라서 지금부터라도 이런 환상에서 탈피하여 삶의 자율성, 삶의 친밀성, 삶의 직접성을 복원해야 한다.

228쪽
1983년 도린이 예전 척추 수술 때(1965) 엑스레이 촬영을 하다 혈관조영제의 부작용으로 치명적인 암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사실을 '인정'한 고르는 도린을 성심껏 돌보고자 함께 '생계노동'을 하던 파리를 떠나 시골로 간다. 도린이 없으면 "다른 모든 것이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기에, 고르는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기 위해 비본질적인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다. 그리하여 "삶을 미래로 자꾸 미루지 말고" 가능한 한 "매순간마다 완전한 삶을 살기 위해" 고르는 초심으로 돌아간다. 이제 검소한 살림, 유기농 자급자족, 여유로운 시간, 나무 가꾸기, 진솔한 대화, 저술 활동, 친교 활동, 이런 것이 그들의 삶을 재구성했다. 생태주의는 그들에게 삶의 방식이자 일상적 실천이 되었다. 도린은 "우린 가난하게 살지만 결코 추하게 살진 않는다"고 했다. '삶이 최고의 부'이기 때문이다. ...... 그들에게 사랑과 저작, 생활, 죽음은 모두 같은 뜻이었다.

236쪽
더 이상 '일류대학'이나 '일류직장'을 목표로 삼아선 안 된다. 우리가 진정 추구할 것은 '일류인생'이다. 그것은 꿈의 발견, 실력 증진, 사회 헌신의 3요소로 구성된다. 일류대학이나 일류직장은 소수만 성공하지만 일류인생은 누구나 할 수 있다.

243쪽
새로운 해결책이란 것도 또다시 '정-반-합'의 과정을 거치며 또 새롭게 진화를 해야겠지. 중요한 것은 그러한 성찰과 문제제기, 새로운 시도와 민주적 토론, 이런 과정들이 아니겠니? ...... 삶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란 걸.

251쪽
상대적 경쟁은 필연적으로 승자와 패자를 가르고 일등과 꼴찌를 가른다. 그리하여 우월감과 열등감을 양산한다. 우월감에 젖어 살건 열등감에 눌려 살건 모두가 비인간화하기는 마찬가지다. 따라서 학교나 회사에서 상대 경쟁을 없애고 절대 경쟁을 지향해야 한다. 최소한의 기준치, 예컨대 60점이란 기준만 제시하고 그것만 넘으면 합격점을 주어야 한다. 그 이상은 본인에게 맡기면 된다. 그러면 스트레스도 줄고 오히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분야에 몰입하게 되어 전체적으로는 개성과 다양성이 넘치면서도 수준 높고 실력 있는 사회가 된다.

253쪽
새로운 세상을 향한 공동의 꿈이 있으며, 그를 이루기 위한 공동의 발걸음이 하나씩 내디뎌질 때, 바로 이 행복한 과정이 우리의 집단적 트라우마에 대한 가장 좋은 치유제가 된다. 결코 심리상담소에서 완성될 수 없는 사회적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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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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