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쪽
어린 시절 이불에 오줌을 싸고 일어나서 느끼는 공포와 자기모멸의 기억을 되살려 보세요. 전통적인 징계 수단인 키를 쓰고 소금을 얻으러 마을을 돌아다니게 하는 방법은 형벌의 본질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 고안한 가혹한 형벌이라 생각됩니다. 인간이란 자기의 잘못과 치부를 공개적으로 지적당하고 멸시받는 경험을 하면 자아의 일부분이 파괴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78쪽
재미있는 것은 흔히 기사 댓글에서 보는 반응과 실제로 국민참여재판에 참여한 배심원들의 양형 의견은 무척 다르다는 점입니다. 여러 건의 국민참여재판을 진행해 보았지만 배심원들이 법관의 의견과 전혀 다른 중형을 주장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상보다 관대한 처벌을 주문해 놀란 적이 많았습니다. 대체로 연령이 높고 사회 경험이 많을수록 관대한 의견을 내는 경우가 많았고요. 그만큼 나이가 들수록 인간이라는 존재의 나약함과 실수 가능성에 대하여 이해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재판을 마친 후 배심원들에게 소감을 물어보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이, 언론보도를 통하여 몇 줄로 사건을 접할 때와 직접 하루 종일 재판에 참여하면서 피고인을 직접 보고 범행 동기와 전후 사정을 들을 때의 느낌은 너무나 다르다는 것입니다.
100쪽
법원 지원으로 하버드 로스쿨에서 연수를 받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석사과정 학우 중에는 부탄 왕국의 공주님이 있더군요.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공주의 나라는 참 재미있는 나라였습니다.
1인당 국민소득은 2천 불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교육과 의료를 국가가 보장하고 있고, 국민행복Gross National Happiness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 중의 하나랍니다. 옥스퍼드에서 공부한 계몽 군주인 그녀의 부왕은 국정 기본 철학을 국민소득이 아닌 국민총행복 극대화로 여기고 있고, 국가 경영 전략은 의도적인 저속 성장과 개발 지연이라는 겁니다. ...... 또한 태초 그대로 보존된 국토 대부분의 아름다운 자연을 관광 산업과 건설 산업의 탐욕 아래 파괴하고 싶지도 않다는 거죠. 성장은 추구하지만 다 같이 서서히 성장하길 원한다고요.
놀러 갈 테니 왕궁에서 재워 주겠냐고 농담 삼아 물어보니 선뜻 오케이하면서도 덧붙이기를, 자기네 왕궁은 검소한 목조주택에 불과하다나.
103쪽
사회는 소수만이 승자가 될 수 있는 경쟁이 아닌 모두가 누릴 수 있는 다양한 행복의 가치를 존중해야 합니다. 먼 훗날 남들이 부러워하는 부자가 되어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를 타며 행복하겠다는 희망이 아니라 지금 내가 선 바로 이 자리에서 소박하나마 가족, 이웃과 함께 누리는 소소한 행복이 누구에게도 폄하되지 않고 존중되는 그런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113쪽
2002년 7월, 우리나라 최초로 성전환자의 성별을 변경하는 호적 정정을 허가했습니다. 이후 전국 곳곳의 법원에서 같은 취지의 결정이 잇따랐고 결국 2006년에 대법원 2006. 6. 22. 자 2004스42 전원합의체 결정으로 성전환자에 대한 호적 정정을 허용하는 역사적인 대법원 결정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2009년에 이르러 또다시 고종주 부장판사에 의해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을 전환한 성전환자에 대한 강간죄를 유죄로 인정하는 판결이 최초로 선고되었고, 이 판결이 대법원에서 확정됨으로써 이 문제에 관한 매듭이 맺어졌습니다.
114쪽
제가 선고한 것은 아니지만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언젠가 기회가 되면 꼭 소개하고 싶은 판결문이 하나 있습니다. 서울북부지법 2004. 10. 22. 선고 2004고합228호 사건(재판장 박철 부장판사) 판결문입니다. ...... 이 판결문을 소개하는 이유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문체나 형식이 천편일률적인 딱딱한 기존 판결문 형식을 탈피하여 재판부의 깊은 성찰과 문제의식을 진솔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암호 같은 법률용어와 형식적 문구의 방패 뒤에 숨어 정말 중요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해 주지 않는 안전한 판결문보다 비록 비판을 받을지라도 재판부의 고민과 결론을 솔직히 드러내는 판결문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201쪽
또 설령 자기 결론이 틀렸다고 비판받더라도 그건 그 결론이 틀렸다는 것이지 나라는 존재를 비난하는 것은 아니니 자기 방어적으로 대응할 필요도 없습니다. 상대방 이야기를 들어 봐서 수긍이 가면 바로 쿨하게 시인하고 결론을 바로 수정하면 되지요.
240쪽
일상이 생존을 위해 견뎌야 할 무엇이 아니라, 놀이와 놀이 사이의 가슴 설레는 준비 기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244쪽
세상에 신경 끄고 쿨한 개인주의자로 내 인생이나 행복하게 살든지,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낫게 바꾸기 위해 성실하게 헌신하며 살든지, 뭐 둘 중 하나로 정리되는 성격이면 편하겠는데 이건 본질은 전자인 주제에 후자를 감기처럼 가끔 주기적으로만 앓고 사니 남는 건 자기모멸일 때가 많습니다.
[네이버 책] 판사유감 - 문유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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