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저리
'이별범죄'를 접하고 영화 <미저리>(1990)를 떠올리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사랑할수록 통제한다는 점에서 <미저리>만큼 상징적인 영화도 없다. 벌써 20년이 훌쩍 지난 작품임에도 가장 먼저 떠오를 정도다. 미저리에 등장하는 주인공 애니(Anny)를 통해 이별범죄의 양상을 되짚어보고자 한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 소개된 두 이별범죄 사건은 피의자인 남자와 피해자인 여자 사이에서 벌어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각각 15년, 25년으로 나이차가 크다는 것도 주목할 만한 공통된 특징이다. 이는 단순한 성별 및 연령의 차이가 아니다. 무력을 행사함에 있어 가해자가 여러 모로 유리한 입장에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영화 <미저리> 속 가해자는 물리적 약자인 여자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이별범죄 가해자와 마찬가지로, 피해자를 통제하기 유리한 입장에 있다. 그녀가 폴(Paul)을 처음 만난 건 폴이 교통사고로 팔다리에 장애를 입은 시점이다. 장소 역시 그녀의 집이다. 거동이 자유롭지 못한 폴은 애니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고, 애니의 집에서 간호를 받는다. 그녀의 통제 하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조건이다. 물리적 강자가 벌이는 이별범죄의 비극이 더욱 안타까운 이유다.
▌ 이별범죄의 비극 요인
부정 - 너는 내가 바라는 대로 아름다워야 한다.
사랑은 상대의 있는 그대로를 아끼고 존중하며, 지지하는 것이다. 폴(작가)의 작품에 대한 애니의 사랑은 그녀가 만들어 놓은 틀에 대상을 가두고 있다. 새로 쓴 이야기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자 원고를 불사르는 애니. 그녀에게선 폴과 그의 작품을 일체화시키는 경향도 엿보인다. 폴 곁으로 원고를 가져와 그에게 직접 불을 붙이라며 성냥을 건네는 장면도 눈에 띈다. 단지 원고를 불태우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폴이 직접 자신의 작품에 불지르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는 작가와 작품이 향후 다시 성스러워질 거라 믿고 있다. 애니는 지금 여느 때보다도 진지하다. 사사로운 농담 따위를 할 때가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그녀가 좋아하는 유형에서 작품이 벗어날 때 작품을 아예 부정해 버린다. 나아가 이를 개인의 욕구로 생각하지 않는다. 모두를 위한 의무이자 신의 뜻이라는 믿음에 사로잡혀 있다.
폴에게 새 소설을 요구할 때도 애니는 대상을 부정한다. 주인공 미저리의 죽음을 그녀로선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다. 결국 해당 스토리를 폴의 진심이 아니었다고 판단한다. 폴의 의도를 그녀가 원하는 방향으로 돌리려 할 뿐 아니라, 그 목적이 폴의 진심을 되찾아 주기 위함이라 여긴다. 폴의 작가적 능력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능력을 부정하는 것은 애니의 애정이 갈 곳을 잃기 때문이다. 폴은 영원히 빼어난 재능을 지닌 작가로 존재해야 한다. 애니는 본인이 폴에게 보내는 지지를 정당화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되뇌인다. '당신은 정말 훌륭한 작가에요.'라고.
통제 - 너의 행복보다 중요한 건 내 휘하에 있느냐다.
폴은 애니가 꾸민 작업실에서 글을 쓰기 시작한다. 단순히 타자기를 두드리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애니가 원하는 대로 '미저리를 살리는' 스토리를 전개해야만 한다. 그녀의 바램에 어긋날 시 득달같이 달려와 이렇게 말한다. 'I'm sorry Paul. This is all wrong.' 폴은 전부 다시 써야 한다. 보통은 이렇게 말한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글'이라고. 애니는 이렇게 말한다. '잘못됐다'고. '당신답지 않은 글'이라고. '훌륭한 작품'을 원한다고 표현하지만, 그녀가 실제로 바라는 것은 '그녀의 입맛에 맞는 작품'이다. 상대에 대한 부정이 통제욕으로 변질되는 순간이다. 이는 우리가 흔히 범하는 실수 하나를 떠오르게 한다. 자기가 생각하는 기준이 일반적, 당위적 기준인 양 말하는 사람들. 쉬운 예로, '다르다'와 '틀리다'를 혼동하는 경우다. 말장난처럼 사소해 보이지만, 꽤 심오한 철학이 담긴 쟁점이다. '다른 사람'과 '틀린 사람'에는 큰 차이가 있다. 애니와 같은 오류를 피하기 위해선 이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애니는 그녀의 바램과 '다르게' 이야기를 전개한 폴을 '틀렸다'며 다그친다. '내 뜻'이 '신의 뜻'이고 '올바른 뜻'이라는 착각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위험한 발상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이별범죄자의 기분은 상대를 통제하고자 하는 욕구에 의해 상쾌한 상태와 우울한 상태를 오간다. 일종의 조울 증세를 보이는 것이다. 통제 여부에 따라 나타나는 격한 감정은 주위 사람들을 불안하게 할 만큼 위태롭다. 기분이 어느 쪽이든 불안하기는 매한가지다. 탈고를 앞두고 있는 폴에게 애니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처음 여기 왔을 때까지만 해도 작가로서의 폴 쉘던을 사랑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젠 당신의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됐다. 나도 알고 있다.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거짓말할 생각은 마라. 당신은 멋진 외모에 뛰어난 재능, 유명세까지 모두 갖췄지만 난 보잘 것 없는 여자니까. 연인을 잃게 될까 두려운 심정, 당신은 아마 모를 거다.' 애니는 우울하다. 모든 의욕과 희망을 상실한 듯 보인다. 또한 위태롭다. 말을 마치고 꺼내든 건 권총이다. '책도 끝나가고 다리도 나아지고 있으니, 곧 여길 떠나겠지.' 애니는 폴이 그녀의 통제에서 곧 벗어날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아프다. 책을 완성하고 건강을 회복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겐 행복이지만, 본인에겐 불행인 것이다. 그녀에게 중요한 건 상대의 행복이 아닌 통제 여부일 뿐이다.
상대가 통제에서 벗어나고자 할 때, 이별범죄자의 분노가 폭발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배적인 의견이다. 지난주 방송된 '그것이 알고 싶다'의 두 번째 피해자 C 씨가 남편의 폭력을 피해 쉼터로 피신했을 때, 남편이 보인 반응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제삼자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시점부터 폭력 수준이 극심해진다는 특징 때문에 주위로부터 도움을 받기 어렵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애니 역시 같은 양상을 보인다. 애니를 수상하게 여긴 보안관이 그녀의 집을 찾았을 때다. 애니는 폴을 지하에 숨긴다. 예리한 보안관은 폴을 찾아낸다. 폴이 구출될 수 있겠다는 기대를 품기 무섭게, 애니는 보안관을 총살한다. 폴이 보안관에게 손을 뻗은 바로 그 순간에.
보상 - 사랑한다. 너도 어서 사랑한다고 말해라.
애니가 폴에게 말한다. '남편은 갑자기 떠났다. 난 아무런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너무 힘들었다. 미칠 것 같았다. 일에 몰두하며 슬픔을 이겨냈다. 밤낮으로 일했다. 병원 야간 근무는 외로운 작업이다. 많은 책을 읽으며 외로움을 달랬다. 미저리도 그때 처음 봤다. 미저리는 나를 참 행복하게 했다. 모든 시름을 잊을 수 있었다. 모두 당신 덕분이다. 난 미저리를 읽고 또 읽었다.' 남편에 대한 사랑이 폴에 대한 집착으로 변질된 시점을 설명한다. 남편과의 이별은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다. 그때 접한 폴의 미저리 이야기는 그녀의 슬픔을 상쇄시켜 주면서 이야기의 작가인 폴에 대한 왜곡된 애정으로 번진 것이다.
애니에게 있어 폴과 그의 작품은 상실감을 보상 받는 수단이었다. 고마운 마음에 열혈 팬을 자처했다. 빙판길에 사고를 당한 폴을 손수 집으로 데려와 보살폈다. 이제 다시 그녀가 보상을 받을 차례다. 폴이 휠체어를 탈 수 있을 만큼 회복되자 애니는 테이블과 타자기를 방에 들여 놓는다. '난 당신의 생명의 은인이니 날 위해 최고의 소설을 써 달라'며 집필을 강요한다. 그녀가 준비한 최고가의 인쇄 용지도 자랑스레 꺼내 보인다. 폴은 '그 용지는 글자가 번지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애니의 보상 심리는 분노로 치닫는다. '먹이고 씻기고 입히고, 폴을 위해 뭐든 다 하고 있는데 종이를 잘못 사왔다며 문제를 지적하는 폴'이 심히 못마땅하다. '당최 감사를 모르는 인간'이라며 비난한다. '원한다면 상점을 통째로 갖다 주겠다'고 소리치는 등 엇나가는 양상을 보인다. 순수한 사랑이 아닌 경우 철저한 계산이 깔린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왜곡된 사랑이 보상을 기대한다고 해서 거창한 걸 바라는 건 아니다. 경제적, 금전적 보상보다는 심리적, 정신적 보상을 기대한다. 가시적이고 고무적인 보상이기도 하다. 애니가 폴의 글에 한껏 도취돼 있을 때 폴이 건넨, '돌아온 미저리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함께 저녁 식사를 하자. 당신 없인 해내지 못했을 일이다'라는 말은 그녀에게 충분한 보상이 되었다. 그에 대한 감사 표시도 잊지 않는다. '오, 폴! 정말 영광입니다.' 상대의 보답을 당연시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분명 그녀는 내내 보상을 기대하고 있다. 보상을 받으면 격하게 감동하고, 보상이 없으면 극심한 분노를 터뜨린다. 격한 감동은 자칫 순수하게 보일 수 있지만, 그 이면의 위험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후유증 - 죽여서라도 너를 가지고 말 테다.
<미저리>의 결말은 이렇다. 애니와 폴의 몸싸움 끝에 애니는 죽고, 폴은 살아남는다. 그렇다고 <미저리>를 해피엔딩으로 보면 큰 오산이다. <미저리>는 그저 '조금은 다행스러운, 하지만 안타까운 결말'의 영화다. 이별범죄에 있어 해피엔딩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1년 반이 흐른 뒤 폴은 새 책을 발간한다. 당연히 애니의 이야기는 아니다. 폴의 저작권 대리인은 애니와 그 집에 관한 이야기를 써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폴은 단호히 거부한다. 그렇게 끔찍한 일로 돈을 벌자는 데 동의할 수 없어서다. 여전히 폴은 당시의 고통을 잊지 못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대리인과 만난 폴에게 식당 종업원이 다가온다. '실례합니다만, 폴 쉘던 씨 아닌가요? 저 쉘던 씨의 광팬입니다.' 예전과 달리 폴은 팬들의 지지를 달가워할 수만은 없게 됐다. 이별범죄의 후유증이다. 폴은 애니가 숨진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애니가 살아 돌아와 그를 해칠 것만 같은 두려움이 엄습하곤 한다.
실제 이별범죄를 겪은 피해자의 후유증은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이미 확인된 바 있다. 2년이 지난 지금, 사건 ①의 A 양은 자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자기 몸에 몇 차례나 자해를 가했다. 화상 흉터 못지 않게 안타까운 상처다. 누군가는 A 양이 범한 잘못을 지적할지도 모르겠다. 처음 가해자 B 씨를 만나면서 미성년자임에도 불구하고 스무 살로 나이를 속였다는 점을 들먹이면서. 이는 분명 A 양의 잘못이다. 그러나 그녀가 입은 피해는 저지른 잘못에 비해 너무 가혹하다. A 양도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고 있다. 2년 뒤 제작진이 제공한 심리 상담 자리에서 그녀는 누구보다도 자신을 탓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더는 A 양이 상처 받지 않도록, 그녀의 잘못을 보듬어 줄 필요가 있다.
피해자인 A 양은 스스로를 탓하며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가해자인 B 씨는? 태연히 A 양에게 연락하고 접근한다. <미저리>의 피해자 폴은 가해자의 죽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겨우 3개월 형을 받고 출소한 B 씨의 소식에 A 양이 느낄 공포는 감히 짐작하기 어렵다. 실제로 그녀는 보복이 두려운 나머지 집이 아닌 타지에서 숨어 지낸다. 많은 성폭력 사건 후 피해자가 가해자를 피해 다녀야 하는 어이없는 실태를 상기시킨다. 이별범죄가 폭력으로 시작해 살인으로 치닫는 점을 감안할 때, 가해자의 반성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그리고 그들의 집착이 얼마나 집요한지 유념해야 한다. 사건은 일단락된 듯 보이지만, 피해자는 가해자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여전히 피해를 당하고 있다.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폴의 신간에 각 처의 호평이 이어지고 수상 조짐도 보인다. 하지만 폴은 더 이상 외부의 평가에 호들갑 떠는, 스타 작가 희망자가 아니다. 애니를 통해 겪은 비극이 진정한 작가의 기쁨을 깨닫게 한 덕분이다. 우리는 상대의 호감을 얻기 위해 진정한 나를 외면한 채 살아가는 이들을 흔히 본다. 배우자를 선택할 때도 '내가 사랑할 만한' 상대를 찾기보다는 '누구나 인정할 만한' 대상을 찾는다. 남들이 생각하는 훌륭한 배우자와는 행복을 누리기 어렵다. 장래를 계획할 때도 그렇다. '남 보기에 그럴 듯한' 직업은 남들에게 내세우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나의 행복에 보탬이 되지는 않는다. 폴이 애니를 통해 깨달은 것처럼, 우리도 이별범죄를 통해 깨달아야 한다. '외부의 시선'에 휘둘릴 것이 아니라,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을 좇고 '나 스스로 사랑스러운 내'가 되어 갈 때 낙이 온다는 것을.
시나리오 메시지 MONZA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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