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쓰게 된다 - 김중혁


11쪽
우리는 세상을 관찰하면서, 동시에 세상을 관찰하는 나를 관찰한다. 세상을 관찰하는 나를 관찰하는 동안 우리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간다. ...... 자신을 관찰하는 일은 천천히 바라보는 일이다. 

30쪽
애플의 가장 큰 장점은 '창작'에 있는 것 같다. 이상한 이야기 같겠지만 윈도우를 쓰면서는 주로 '감상'을 했는데, 애플을 쓰면서부터 '창작'을 하게 됐다. 애플 컴퓨터에서는 모든 걸 쉽게 만들 수 있다. 글을 쓰는 것도 쉽고, 영상을 만드는 것도, 음악을 만드는 것도 간편하다. 애플에서 만든 아이폰 역시 마찬가지다. 다른 휴대전화가 '더 좋은 화질'과 '더 빠른 속도'로 '다른 사람이 만든 콘텐츠'를 감상할 수 있다고 광고할 때, 아이폰은 뭘 자꾸 만들게 한다. 뭔가를 기록하고, 영상을 찍고, 편집하게 만든다. 

31쪽
노트북과 컴퓨터의 모니터 화질이 점점 좋아지고 있어서 문제다. 종이에 인쇄된 것처럼 깨끗하니까 대충 쓴 글도 잘 쓴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글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고, 심각한 착시 효과를 일으킨다.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나쁜 화질의 컴퓨터 개발이 절실하다. 아니면 화질이 나빠 보이게 하는 프로그램이라도 하나 있어야 한다. 

37쪽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무언가 한다는 것'과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의 차이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결과만 조금 다를 뿐이다. 사람들은 결과만 바라보기 때문에 그런 차이가 생기는 거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걱정은 할 필요 없다. 

38쪽
좁고 깊은 것보다는 얕고 넓은 편이 좋다. 글을 쓰지 않을 때에는 그래야 한다. 산책하듯 느긋하게 이리저리 둘러보고 기웃거린다. 어떤 일에도 깊이 관여하지 않고, 어떤 생각도 깊이 하지 않는다. '이제 곧 가을이 오겠네'라고 생각만 할 뿐 가을이 정확히 언제 오는지는 알려 하지 않는다. 얕고 넓게 기웃거리다가 중요한 순간이 되면 파고드는 거다. 집요하게 글을 쓰는 거다. 끈질기게 물고늘어지는 거다. 아주 지긋지긋하게 감정을 파헤치고, 말의 방식을 여러 번 고치고, 사건의 순서를 제대로 맞추는 거다. 좁게 깊어지려면 일단은 얕게 넓어야 한다. 그러니까 드라마를 다 보고 난 다음에는 책을 읽어야지. 글을 쓰는 건 내일로 미루자. 

59쪽
글은 결코 완성될 수 없다. ...... 후회가 든다. 돌이킬 수 없다. 손을 놓아야 한다. 평생 한 가지 이야기를 쓰고 있을 수는 없다. 같은 이야기를 새롭게 하거나, 다른 이야기를 똑같은 방식으로 한 번 더 하거나, 어쨌든 다시 써야 한다. ...... 글쓰기는 쉽게 끝나지 않는다. 

65쪽
나는 책을 읽으면서 점점 더 모르는 상태가 지속되길 바란다. 여전히 잘되지 않지만, 책에서 읽은 것들을 세상에서 써먹고 싶어 좀이 쑤시지만, 내가 아는 게 진짜 알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한 번 더 물어보려고 노력한다. 두 번 읽으면서 계속 물어보려고 한다. 

68쪽
메모는 씨앗을 심는 일이다. 메모로 적은 생각에 매일 물을 주지 않으면 곧 말라버린다. ...... 붙잡아두면 생각은 썩어버린다. 붙여두기만 해서는 생각이 자라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의 포스트잇을 떼어버리고 머릿속의 어딘가에 포스트잇을 붙이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생각하는 대신 스크랩을 한다. ..... 그저 모아둘 뿐이다. ...... 메모를 할 때의 나보다는 메모를 판단할 때의 내가 더 믿음직스럽다. 

75쪽
최선을 다할 수 없으므로, 모든 글쓰기의 첫 문장은 대충 쓰는 게 좋다. 어차피 우리는 최선의 문장을 쓸 수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좋은 문장을 쓸 수 없다면 아무 문장이나 쓰면 된다. ..... 가상의 모니터에 쓰인 첫 문장을 한참 들여다보면, 문득 그게 첫 문장감이 아니란 걸 깨닫게 된다. 그 문장을 지우고(아니면 아래로 내리고, 혹은 문장 저장소에 넣어두고) 첫 문장을 다시 쓴다. 이번에도 대충 쓴다. ...... 그렇게 여러 개의 문장을 첫 문장으로 써보면, 어느 순간 더 이상 바꿀 수 없는 첫 문장이 나타난다. 그 문장이 최선을 다한 문장이어서가 아니라 '하는 데까지 해본 문장'이라서 그렇다. ...... 첫 문장과 함께 돌은 굴러가기 시작한다. ...... 첫 문장은 수수께끼이다. ...... 두 번째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는 이 수수께끼를 푸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 ...... 쓰다 보면, 첫 문장이 제대로 된 역할을 못할 때가 많다. 수수께끼여야 하는데 알고 보니 선언이었다든지, 수수께끼여야 하는데 다시 보니 해답 풀이였다든지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써야 한다.​ 

82쪽
우리는 글을 쓰면서 내가 어떤 나인지 알 수 있고,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무엇인지, 내가 무의식적으로 피하고 싶은 것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 평소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들에 대해서 판단해야 하고, 결정을 내려야 한다. 

86쪽
글을 쓴다는 것은 '최초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정리된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86쪽
글을 쓰기 위해서는 언제나 두 가지 마음을 동시에 품어야 한다. 끊임없이 자신을 분리시키고 싸우게 만들고 대화하게 만들고 중재해야 한다. 글쓰기의 시작은 두 개의 마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인정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문장이 한 사람의 목소리로 적어가는 것이라면, 문단은 두 개의 마음이 함께 써내려가는 것이다. 

95쪽
세상에는 작가의 수만큼 문단을 나누는 다양한 방식이 존재한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문단은 세계관의 반영이기도 하다. 세계를 어떻게 표현하고 싶어하는가가 문단의 길이와 리듬에서 드러난다. 문단은 영화의 테이크(take)와도 비슷하다. ...... 영화든 문학이든 짧은 글쓰기이든 논문이든, 문단은 그 사람이 편집하고 싶은 세계의 단위다. ...... 단어와 단어의 흐름보다는, 문장과 문장의 조응보다는, 문단과 문단의 리듬이 더욱 중요하다. ...... 어떤 영화는 감정의 문단을 툭 자른 다음 별다른 설명 없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어떤 영화는 이미 설명이 끝난 감정에 대해 끊임없이 부연한다.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의 리듬을 계속 들여다보면 자신에게 어울리는 문단의 길이를 찾을 수 있다. 

119쪽
'하우 투'를 싫어하면서도 '창작의 비밀'이라는 부제를 단 책을 출간한다는 게 이상해 보일지 모르지만, 두 가지 마음이 함께 존재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가능할 뿐 아니라 두 가지 마음이 함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창작의 비밀을 알아내려는 마음과 창작의 비밀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는 마음 사이의 에너지가 글을 쓰는 동력이 되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많다. 

123쪽
우리는 글을 통해 끊임없이 어떤 명제를 만들거나 정의를 내리고 싶어 한다.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글을 쓰지만, 그 글로 자신이 온전하게 표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단언하듯 문장을 만들지만 그 문장이 얼마나 불안정하며 바보 같은 것인지도 알고 있다. ...... 우리는 그 속에서 흔들리며 글을 쓴다. 

137쪽
말은 뱉으면 그만이지만, 글은 발표하기까지 수십 번 수백 번 고칠 수 있다.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지만, 글은 고쳐낼 수 있다. 말에 비해 글은 훨씬 더 전략적이다. 우리는 글쓰기를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어쩌면 글쓰기 속에서만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글쓰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208쪽
수상 연설은 재치와 침묵과 웅변과 사생활과 철학이 곁들여지는 기묘한 장르다. 때로는 인터뷰보다 더 솔직한 대화가 이뤄지기도 하고, 때로는 아무도 묻지 못할 질문에 대해서 스스로 자문자답하기도 한다. 수상 연설이란 작가에게 가장 솔직한 대화의 형식일지도 모르겠다. 

219쪽
"글로 써보면 알겠지." 작가라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말이 아닌가 싶다. 어떤 이야기든 말로는 모든 걸 설명할 수 없다. 써보면 알게 된다. 뒤집어 말하면, 써보기 않고는 아무것도 단정할 수 없는 법이다. 주인공은 왜 배신을 할 수밖에 없는지, 왜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었는지, 어째서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없는지, 써보면 알게 된다. 작가는 '만약'과 '체험'이라는 두 가지 날개를 달고 글을 쓴다. ...... '만약 지구를 향해 거대한 혜성이 날아들고 있다면?'이라는 이야기를 풀어나갈 때, 중요한 것은 지구와 혜성이 아니라 지구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257쪽
나쁜 묘사는 최대한 포즈를 취한 후 어색한 미소로 찍는 사진이고, 좋은 묘사는 친한 친구들과 놀다가 자연스럽게 찍히는 사진이다. 

272쪽
그렇지만 인간의 중얼거림은 (인공지능이) 절대로 흉내 낼 수 없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말하지 않은 것들, 말했지만 말하지 않은 것들, 중얼거리지만 들리지 않는 것들, 들리지만 이해할 수 없는 말들 같은 것이야말로 인간적인 것은 아닐까. ...... 웅얼거리고 마는 실패의 기록이 성공적인 이야기보다 더욱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285쪽
나는 사람들이 좀 더 창작에 몰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뭔가 만드는 사람들은, 그렇게 거칠어질 수 없다. 강해질 수는 있어도 험해지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에게 '창작'이나 '창의성', '상상력' 같은 단어는 배부른 소리처럼 들릴 수 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고, 먼저 해결해야 할 현실적인 문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현실을 피하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 만드는 일은, 현실을 껴안는 일이다. ...... 나는 지금이야말로 더 많은 사람이 새로운 걸 만들어야 할 시점이고, 창작해야 할 시점이고, 서로가 만든 창작물을 들여다봐주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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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쪽
우리의 임무는 세상을 정리정돈 하는 게 아니다. 더 어지럽게, 더 헝클어뜨려서 더 많은 것들이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마음껏 어지르자.​ 

286쪽
특별할 필요가 없다. 오래 하다 보면 특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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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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