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한 날로부터 6005일이 지났다. 만 17년. 친구로 시작해, 연인을 건너뛰고 결혼을 해버린 탓에 '자기야' 같은 아찔한 호칭은 거쳐갈 틈이 없었다. 친구일 땐 이름, 결혼 즈음엔 여보. 우리 호칭의 역사는 심플하다. 시기별로도, 상황별로도. 친구들이나 어른들이 함께한 자리에서도 '이름(실명)'과 '여보'면 무리가 없다. 친구 사이에서 느닷없이 갖다 쓴 여보는 '필요'에 의해서였기에 거리낌이 없었다. 결혼식을 올렸고 혼인신고를 했고, 부부가 되기로 했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일종의 상황극이었다. 신선하고 유쾌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므흣할 만큼 입에 척척 달라붙는 여보를 불러제끼다 보면, 양가 부모는 넉살 좋은 두 녀석을 어이없게 바라보기도 했다. 통쾌함까지 더해지는 순간이었다.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이 진심이었으므로 서로의 부모 앞에서 상대를 지칭하는 단어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다. 호칭은 '여보'로 하되 나는 시댁에서 개똥이를 개똥이라 칭했고, 남편 역시 처가에서 소똥이를 소똥이라 일렀다. 개똥인 감기에 걸려 고생 중이에요, 소똥인 아직 퇴근 전이에요, 이런 식. 사돈 간에도 개똥이 엄마, 소똥이 아빠라 가리킬 정도로 형식보다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친숙하게 부르곤 했으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토끼 같은 자식들이 똘망똘망 있어 주었다면 토끼 엄마, 토끼 아빠를 번갈아 썼을까마는 아이라곤 없으니 그저 내리, 개똥, 소똥이다.

 

양가 부모 앞에서도 거리낌없이 입에 올리는 이름과 여보. 정작 고민이 되는 건 다른 순간이었다. 바로 소똥이가 소똥이인 줄을, 그 이름을 모르는 지인들에게 소똥이 이야기를 꺼낼 때. 편한 사이라면 이름을 알거나 말거나 무작정 소똥이로 밀어붙이면 그만이다. 마누라라는, 우리끼리 흔히 쓰는 호칭도 만만히 꺼내든다. 그런데, 직장 상사처럼 '애매한' 상대 앞이라면 말 그대로 애매해진다. 마누라. 우리끼리는 존중의 뜻을 담은 구수한 호칭이라지만 낮잡아 부르는 느낌이 없지 않아 망설여진다. 아내라 하자니 양복이라도 입고 왔어야 하나 싶을 만큼 무게를 잡는 것 같아 부담스럽다. 처, 맙소사, 사극인가. 집사람, 안사람 역시 구시대적이거니와, 집안 살림을 도맡을 것 같은 이 단어는 역할로나 차지하는 공간으로나 영 지칭 대상과 어긋난다. 사전을 뒤져본다. 각시, 부인 정도가 남았다. 남았다고 할 수 있겠나 어디. 각시는 어쩌고? 증조부가 손자의 배우자를 찾을 때나 등장할 법한 각시.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부인, 줄을 서시오 부인, 이토록 사극.

 

이도 저도 마뜩지 않은 건 나만이 아닌가 보다. 여자 배우자를 가리키는 여러 우리말을 두고 '와이프'가 등장한 걸 보면 말이다. 와이프는 격식을 너무 차린 것 같지도, 너무 무시하는 것 같지도 않다. 속없이, 영어 자체의 세련된 이미지에 기대는 모양새다. 20대부터 어르신들까지 나이를 불문하고 가장 무난한 표현으로 꼽는 듯하다. 연예인, 정치인은 물론 방송에 등장하는 일반인, 회식에서 만난 동료들도 와이프로 싹 통일하는 분위기다. 짜장면처럼, 너도나도 사용하면 곧 표준어 사전에 올릴 수 있다는 생각인 걸까. 짜장면만큼 마음이 동하지 않는데, 이를 어쩌나.

 

돌고 돌아, 아내. 남편이 나를 가리킬 때 나는 다음을 추천한다. 소똥이 혹은 아내. 이름이 최고다. 여의치 않다면 아내. (마누라를 간절히 넣고 싶으나 뺐다. 일종의 우리만의 은어인 데다, 아뿔싸, 대칭을 이루는 개똥이 호칭이 없다.) 나는 개똥이 혹은 남편 중 골라 쓰고 있다. 배우자도 나쁘지 않다. 여자가 남자를 일러도, 여자가 여자를, 남자가 남자를, 남자가 여자를 일러도 손색없다는 점에서 훌륭하다. 성별, 나이, 상하 관계를 배제한다는 점에서 얼핏 '짝꿍'도 그럴듯해 보였으나 너무 귀여운 게 흠

 

호칭은 중요하다. 관계를 규정하고 서로를 대하는 자세를 돌아보게 한다. 한결같은 혹은 변화무쌍한 상대의 의미를 간직하는 수단이 된다. 호칭이 그밖의 언어를 부르고, 그밖의 언어가 존재를 구성한다. 사실, 바람직한 호칭이 따로 있지 않다. 그러므로 통일할 필요도 없다. 다만 배경은 곰곰 생각해 볼 일이다. 영어로 신사 흉내내며 허세 부리기에 딱 좋아 갖다 쓰는 와이프는 아닌지. 발음도 쉽겠다 순우리말이라 흠잡을 데 없는데도 괜한 바른생활 느낌에 거부하는 아내는 아닌지. 상대방 이름 석 자란 생각만 해도 가슴 떨려, 대신 아이들 이름 넣어 퉁치는 건 아닌지. 본인 기분에 따라 왔다갔다. 호칭으로 상벌 내리는 갑질 중은 아닌지.

 

50대 여성이, 내가 개똥(가명, 당시 30대 초반 동갑내기)이를 개똥이라 하는 것을 나무라며, 본인 배우자를 두고 신랑이라 해서 놀란 적이 있다. 신혼부부처럼 알콩달콩 지내서였을까. 자식도 있었던 걸 보면 실제 신혼은 아니었던 듯싶은데. 미처 물어보지 못한 그 배경이, 사뭇 궁금하다. 혹시, 신부님?

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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