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넘어 인문학 - 조정현


58쪽
전래동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중국 신화에서 묘사하는 혼돈의 생김새는 여러 모습이지만, 구멍이 없다는 것만은 같습니다. 한번 생각해 볼까요? 인간에게 구멍이 하나도 없다면? 눈이 없으니 보지 못할 것이요, 귀가 없으니 듣지 못할 것이요, 입이 없으니 먹지 못할 것이요, 항문이 없으니 배설하지 못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런 인간은 없습니다. 생물도 없습니다. 삶을 영위하는 생명이란, 아주 간단히 정의하자면 외부로부터 흡수한 것을 다시 외부로 배출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은 타고난 일곱 개의 구멍을 어떻게 운용하는가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배출하지 못하면 인간답게 살기 힘들겠죠. 전래동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는 바로 이런 이치에 대해 말해 줍니다. 
...... 우리는 인간이고, 인간은 항상 환기가 되어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음식과 공기와 물이 몸 안과 바깥을 드나드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말도 내 몸의 안과 밖으로 들고 나야 합니다. 

84쪽
신영복 <더불어 숲>
우리가 흔히 찬란하다고 말하는 로마가 만일 우리 땅을 침탈했다면 그래도 우리는 로마를 동경할 수 있을까요? ...... 개선장군과 정복의 역사만이 자랑스럽다고 생각한다면, 일제강점기를 자랑스러워할 일본인에게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신영복 선생의 말씀처럼 누군가 개선문을 자랑스럽게 지날 때, 그 뒤에는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를 불태운 땅이 있기 마련입니다. 누군가의 영웅이 누군가에게는 악마가 되는 것이죠.

128쪽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사랑의 근본적인 모순은 '하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서로 '다른' 존재임을 자각하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사랑만큼 어려운 문제도 없습니다.

130쪽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지나치게 이상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상대가 나를 예쁘고 잘생겼을 때만 사랑한다고 느낄 때, 나의 돈과 능력 때문에 나를 소중히 여긴다는 생각이 들 때 쓸쓸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168쪽
프랜시스 버넷 <소공녀>
자본주의 초기 부르주아 사회에서 태어나 자란 작가답게 그는 어린이 노동을 특별히 나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비판은 다만 '좋은 주인'이냐 '나쁜 주인'이냐를 향할 뿐입니다. ...... 세라의 환경에서 변한 것은 경제 상황뿐입니다. 세라는 여전히 고아이고, 후견인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많은 일이 세라 앞에 벌어질 것입니다. 작가는 경제적 어려움을 벗어나자마자 세라의 행복을 단언했지만, 세라는 왠지 동의할 것 같지 않습니다.

181쪽
그림 형제 <백설 공주>
새 왕비의 거울은 그녀를 비추는 자성적 물건이 아니라, 그녀를 비판하는 외부인의 시선입니다. ...... 그녀는 거울의 목소리를 통해, 다시 말해 외부인의 시선에 의해 최고라고 평가를 받을 때에만 만족감을 느낍니다. ...... 마법의 거울은 백설 공주와 새 왕비에게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텔레비전을 꺼야 하는 이유입니다. 거울의 목소리는 신뢰를 가장한 억압이므로. 텔레비전을 끄면 우리는 좀 더 자신의 진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면 내가 진짜 원하는 삶, 내게 잘 어울리는 이미지를 스스로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217쪽
한스 안데르센 <미운 오리 새끼>
그런데 어른이 된 후, 가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걔는 왜 오리인 채로는 행복하지 못했을까? ...... 다른 것 = 미운 것. 위의 등식은 명백한 오류지만, 현실에서 여전히 유효합니다. ...... 백조가 된 새끼 오리는 '백조가 오리보다 더 아름답다"는, 다시 말해 상류 사회에 속한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행복을 느낍니다. 

219쪽
한스 안데르센 <미운 오리 새끼>
당시 부르주아는 사회를 지배하는 세력이면서도 귀족보다 아래였고, 프롤레타리아로 불린 하층 계급보다 한 수 위였습니다. 이들은 귀족에게는 근면과 성실로 자신들의 우위를 내세웠고, 하층 계급에게는 고상한 예법, 교양과 너그러움을 내세워 내려다보았습니다. 프롤레타리아였던 안데르센을 후원한 콜린 집안은 이런 부르주아의 표본이랄 수 있습니다. ...... 평생토록 자신을 타인의 눈으로 보게 만드는 것, 타인의 눈에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최고의 성취라고 믿게 하는 것, 그 성취를 위해 고난과 역경을 참고 견뎌야 한다는 교훈은 부르주아 사회가 그 구성원을 지배하는 방식입니다.

227쪽
페터 비에리 <삶의 격>
새끼 오리처럼 누군가에게 사랑이나 인정을 받기 위해 길을 떠나는 것은 정답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타인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떠난 여행은 끝이 없을 뿐더러, 누구도 나에 대해 나만큼 고민해 주지 않기 떄문이죠. 그러니 타인의 시선에 삶이 흔들린다는 것은 무책임한 타인에게 자신의 존엄성을 심판에 달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228쪽
페터 비에리 <삶의 격>​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 혼밥, 즉 혼자 밥 먹는 횟수가 가장 많은 계층이 초등학생이라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 아이들이 혼자서 부실한 밥을 먹는 이유는 단 하나, 학원에 가기 위해서였습니다. 공부를 위해 한 끼 정도는 소홀해도 된다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물론 아이들의 선택이 아니라 어른의 선택이었겠죠. ...... 자신의 몸을 존중하고, 키우고, 단련하는 법이야말로 가장 어린 시절에 배워야 하는 기초가 아닐까요? 한 끼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고, 그 시간을 충실히 누리는 법을 배우는 것도 기나긴 인생을 위한 수업이 아닐까요? ...... 자신의 손과 발을, 눈과 코와 입술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머리에 새기며 자신과 사귀어야 합니다.

248쪽
한스 안데르센 <벌거숭이 임금님>
어른이 되어서는 이야기의 다음 장면이 궁금했습니다. 왕은 어떻게 그 상황을 무마하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을까? ...... 벌거벗은 임금에 감정이입이 되는 것은 왜일까요? ...... 평범한 우리가 특별한 사람에게 감정이입을 하면서 특별한 사람의 성취를 목표로 삼다 보니, 작은 성취 같은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커다란 목표를 바라보니 자신은 늘 제자리, 실패자인 것만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 내면은 스스로 관객이 되어 평범한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합니다.

264쪽
엘리너 파전 <보리와 임금님>
동네 바보를 어떻게 대하느냐가 그 마을의 품격을 말해 준다고 생각하니까요.

290쪽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모든 인간이 거리에서 춤추면 질서를 어떻게 유지하겠다는 거야? 아이들을 사회화시키는 건 당연한 거지. 개성을 내세우는 인간만 있으면 그 사회가 제대로 굴러가겠어?'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하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개성을 질서의 대척점에 놓게 하는 그 생각 또한 우리의 개성을 말살하려는 이데올로기일 수 있습니다. 개성이란 자아의 발현이고, 그로부터 인간은 자기 삶의 진실을 찾아갑니다.​


[네이버 책] 동화 넘어 인문학 - 조정현

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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