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 - 김영하


16쪽
그런 의미에서 작가의 여행에 치밀한 계획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여행이 너무 순조로우면 나중에 쓸 게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느 나라를 가든 식당에서 메뉴를 고를 때 너무 고심하지 않는 편이다. 운 좋게 맛있으면 맛있어서 좋고, 대실패를 하면 글로 쓰면 된다.

18쪽
대부분의 여행기는 작가가 겪는 이런저런 실패담으로 구성되어 있다. 계획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성취하고 오는 그런 여행기가 있다면 아마 나는 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재미가 없을 것이다.

55쪽
모든 인간에게는 살아가면서 가끔씩은 맛보지 않으면 안 되는 반복적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가까운 사람들과 만나 안부를 묻고 마음을 나누는 시간을 주기적으로 갖는다거나, 철저히 혼자가 된다거나, 죽음을 각오한 모험을 떠나야 한다거나, 진탕 술을 마셔야 된다거나 하는 것들. '약발'이 떨어지기 전에 이런 경험을 '복용'해야, 그래야 다시 그럭저럭 살아갈 수가 있다. 오래 내면화된 것들이라 하지 않고 살고 있으면 때로 못 견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이런저런 합리화를 해가며 결국은 그것을 하고야 만다.

​58쪽
그런데 인물의 내면 부분에서 내가 제일 고민하게 되는 항목은 '프로그램'이다. 노아 루크먼은 '가지고 있는지조차 모르지만, 인물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일종의 신념'으로 '프로그램'을 설명한다. 인간의 행동은 입버릇처럼 내뱉고 다니는 신념보다 자기도 모르는 믿음에 더 좌우된다. 모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된다. ...... 작가가 미리 생각해둔 프로그램이 인물의 대사가 되어 배우의 입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되는 순간, 관객은 그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를 분명히 알게 된다.

​76쪽​
리베가 솔닛은 걷기와 방랑벽에 대한 에세이에서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생각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은 방랑하지 않을 수 없다고 적고 있다. 철학자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들, 이를테면 사상은 옥수수 같은 곡물과 달리 안정적인 수확을 기대하기도 어렵고 모두가 좋아하는 것도 아니어서 한곳에 머물기 어렵다는 것. 인맥이나 터전에 얽매인 직업, 대표적으로 정치인이나 농민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79쪽
언어는 쉴새없이 변하고, 언어에 민감한 이들은 시시각각 낡아가는 언어들을 금세 감별한다. 모국어의 바다를 떠나면 이런 변화가 잘 느껴지지 않고 언어의 신선도에 덜 민감해진다. 작가는 우렁한 목소리보다는 작은 속삭임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자신 없는 음성으로 낮게 읊조리는 소심한 목소리에 삶의 깊은 진실이 숨어 있을 때가 많다. 그런 웅얼거림을 잘 들으려면 발화자 가까이에서 귀를 기울여야 한다.

​81쪽
무슨 이유에서든지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은 현재 안에 머물게 된다. 보통의 인간들 역시 현재를 살아가지만 머릿속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후회와 불안으로 가득하다. 

​109쪽​
내가 여행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우리의 현재를 위협하는 이 어두운 두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하는 동안 우리는 일종의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된다. 낯선 곳에서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먹을 것과 잘 곳을 확보하고 안전을 도모해야 한다. 오직 현재만이 중요하고 의미를 가지게 된다.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이 거듭하여 말한 것처럼 미래에 대한 근심과 과거에 대한 후회를 줄이고 현재에 집중할 때, 인간은 흔들림 없는 평온의 상태에 근접한다.

​92쪽
그리고 끝없이 이동하는 인류의 운명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했다. 유전자에 새겨진 이동의 본능. 여행은 어디로든 움직여야 생존을 도모할 수 있었던 인류가 현대에 남긴 진화의 흔적이고 문화일지도 모른다.

​102쪽
일본의 한 코미디언이 비싼 포르셰를 샀지만 막상 자기가 운전을 해보니 포르셰가 달리는 모습을 볼 수가 없더라, 그래서 친구에게 포르셰를 운전하라고 시킨 뒤 택시를 타고 따라갔다는 얘기가 떠오른다. ...... 여행도 마찬가지. 멋진 곳에 가서 놀라운 것을 경험하지만 본질적으로 그것은 일인칭의 경험이다. ...... 그런데 <알쓸신잡> 같은 여행 프로그램의 출연자가 되면 나는 '여행을 하는 나'를 삼인칭 시점으로 보게 된다.

​112쪽
바야르는 오히려 필리어스 포그의 이런 태도는 여행지의 디테일에 함몰되지 않고 총체적 시각을 갖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 쥘 베른 <80일간의 세계일주>
* 피에르 바야르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

​117쪽​
내가 직접 경험한 여행에 비여행, 탈여행이 모두 더해져 비로소 하나의 여행 경험이 완성되는 것이다. ...... 세계와 우리 사이에는 그것을 매개할 언어가 필요하다. 내가 내 발로 한 여행만이 진짜 여행이 아닌 이유다.

147쪽
환대는 이렇게 순환하면서 세상을 좀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그럴 때 진정한 가치가 있다. 준 만큼 받는 관계보다 누군가에게 준 것이 돌고 돌아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세상이 더 살 만한 세상이 아닐까. 이런 환대의 순환을 가장 잘 경험할 수 있는 게 여행이다.

179쪽
실뱅 테송의 말처럼 여행이 약탈이라면 여행은 일상에서 결핍된 어떤 것을 찾으러 떠나는 것이다. 우리가 늘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뭐하러 그 먼길을 떠나겠는가. 여행지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여행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사회적으로 나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때로 감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러 떠나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183쪽
허영과 자만은 여행자의 적이다. 달라진 정체성에 적응하라. 자기를 낮추고 노바디가 될 때 위험을 피하고 온전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

193쪽
여행이 길어지면 생활처럼 느껴진다. 마찬가지로 충분한 안정이 담보되지 않으면 생활도 유랑처럼 느껴진다.

197쪽
인간은 이야기를 읽으며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과 대면한다. 어린아이들이 고아 이야기에 빠져드는 것은 부모를 잃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기 때문일 것이다. ......
이야기를 통해 인간은 현실에서 무질서하게 일어나는 여러 일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배운다. 죽음과 재난, 사랑과 배신 같은 일들이 우리 의지와 무관하게 닥쳐올 때,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지켜내야 하고 그럴 때 이야기가 우리에게 심리적 틀을 제공하는 것이다.

203쪽
어둠이 빛의 부재라면, 여행은 일상의 부재다. ...... 소설은 재미있는 일들을 집어넣는 게 아니라 무의미한 사건들을 배제하면서 쓰인다.

 

 

[네이버 책] 여행의 이유 - 김영하

 

여행의 이유

여행이 내 인생이었고, 인생이 곧 여행이었다!여행의 감각을 일깨우는 소설가 김영하의 매혹적인 이야기 『여행의 이유』. 꽤 오래전부터 여행에 대해 쓰고 싶었던 저자가 처음 여행을 떠났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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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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