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 김원영


183쪽
이들에게 병은 나의 잘못된 습관이나 내가 저지른 '죄'에 대한 인과응보로 이해되기도 하고, 삶 전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가치 있는 경험이 되기도 한다. 해석의 방향은 다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병의 존재는 인생 이야기 전체와 통합된다.

184쪽
아픈 사람이 자신의 질병을 자기 서사의 중심에 놓는 경향이 있다면, 이는 질병을 나름의 방식으로 납득해야만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 우리는 언제나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두려움을 납득하기 위해 그것을 해명하는 이야기(신화) 또는 이론(기상학, 천문학, 물리학, 화학, 역사학, 사회학 등)을 필요로 했다. 우리 개개인도 자기 인생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들을 이해하고 납득하기 위해 이야기를, 이론을 만든다. '단 하나의 최종적인 이야기'로 삶 전체를 설명할 수 있다면, 그 이야기는 아마 가장 우아할 것이다. 뉴턴의 이론이 달의 움직임과 지구 위에서 떨어지는 사과의 움직임을 중력 하나로 설명할 때 보여준 위대함처럼.

185쪽
어떤 사람을 존엄한 존재로 대우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자기 인생의 자율적인 형성 주체, 말하자면 작가/저자author로서 존중함을 의미한다는 견해가 있다. 이는 현대 입헌민주주의 국가의 헌법 질서가 인간의 존엄을 정의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입장이다. 우리나라의 헌법재판소, 독일의 연방헌법재판소를 비롯한 각 나라의 최고 법원은 그와 유사한 견해로 인간의 존엄을 정의하고 있다. 자기 이​야기를 자율적으로 써 내려가는 자기 인생의 저자라는 개념은 우리 모두가 각자 고유한 이야기와 관점을 가진 개별적인 존재임을 강조한다. 우리가 차별로부터 보호되어야 하는 이유 역시 우리가 가진 고유성, 자기 삶을 직접 작성하는 저자성authorship이 침해되기 때문이다. 이때의 '작성'이란 자기 삶의 경로를 자율적으로 선택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자신이 걸어온 길들을 돌아보며 스스로 해명(설명)하면서, 자기 선택을 반성적reflective으로 밀고 나가는 행위까지 포함한다.

189쪽
이들의 복잡하고 고유한 삶의 이야기, 배경, 몸의 경험이 무엇이든 오로지 법은 (효과적이고 강제적이지 않은) 서비스를 받고 싶다면 정신질환자로 스스로를 인정하라고 요구한다. ...... 은 그들의 권리를 보호해주겠다고 나서면서도 사실상 그들을 그 보호의 '필요성' 안에 가둔 채 개개인의 저자성을 존중하지 못하는 우를 범한다.

200쪽
'주류'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요구를 할 때 그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원래 여기서는 이렇게 해"라고 말하면 그만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논리적 근거를 강제하는 대화'에서는 다수자의 입장에서 아무리 당연해 보이는 이야기라도 그것을 말한 '주류 집단' 쪽에서 그 말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를 철저히 제시해야 하는데, 켄지 요시노는 법이 이를 강제하거나 유도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201쪽
각자의 서사를 존중하는 법이라면 "왜 당신은 꼭 그렇게 해야 합니까?"라고 묻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사람이 법에게 묻는다.
"당신은 왜 내가 이렇게 하면 법의 문 안으로 들여보내주지 않습니까? 이게 왜 그렇게 '문지기'인 당신에게 중요합니까?"

217쪽
특정한 세계관은 내밀하고 조용히 세상에 퍼져가다 어느 시점에 이르면 권리의 언어로 결정結晶되어 사람들의 말에 담긴다.

221쪽
건물 앞의 턱이나 지하철역의 계단이 내 몸을 '붙잡는' 듯이 느껴지자, 장애인들은 더 이상 이동의 어려움을 국가 등이 제공하는 사회복지나 배려의 문제가 아니라 신체의 자유가(오줌권이) 침해당하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동하지 못하는 환경에 놓인 장애인들은 더 이상 편의시설을 설치해달라거나 장애인복지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읍소하지 않았다. 대신에 "나를 계단과 횡단보도의 턱에 묶어두지 말라"며, "집 안에 더 이상 가두지 말라"며 외부의 침해로부터 내 몸을 지키기 위한 '방어권'을 행사했다(즉 무엇을 '해달라'가 아니라 '하지 말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이는 장애인 개개인에게는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사고에서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관으로 나아가는 일종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할 만했다. 이동권이라는 새로운 권리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발명된다.

227쪽
'법치주의'는 본래 민주주의에 따라 사회가 급격하게 변할 때 생기는 예측 불가능성을 제어하여 정치 공동체가 최소한의 안정을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

231쪽
장애인이 자신의 이동할 권리를 발명하고, 이를 법제도에 진입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스스로 이동해서 거리로 나와야 했던 것이다. 이는 권리가 법제도 안에서 국가권력의 힘을 통해 인정되어야만 실질적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권리를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 자신의 신체나 정신 혹은 처한 사회적 상황의 문제를 권리의 언어로 표현하고 집단적으로 공유하고 법제도 안으로 진입시켜 실질적인 힘을 갖도록 정치적, 도덕적, 헌법적 의미를 부여하는 활동 자체가 '잘못된 삶'들의 존엄성이 사회적으로 승인되는 과정이다.

240쪽
합리적/정당한 편의 제공은 결국 ...... '논리적 근거를 강제하는 대화'의 원칙과 연결된다. 우리 개인이 가진 구체적인 삶의 이야기, 몸의 특성, 복잡다단한 고유성을 주류 집단이 간단히 무시해버리지 않아야 하며, 만약 그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왜 그러한지 그들이 직접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는 원칙이 곧 합리적/정당한 편의 제공의 전제다. 
...... 누군가에게 의존해야만 하는 상황은 '정당한 편의 제공'으로 인정받기 어렵다. 그런 방식은 장애인을 사무실로 들어가게는 하지만, 그가 휠체어를 자기 몸의 일부로, 일종의 '스타일'로 삼아 오랜 기간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사람으로서 자기 이야기를 만들어왔다는 점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255쪽
만약 우리가 '잘못된 삶'이라는 낙인에서 벗어나는 힘의 주된 근거가 법률, 도덕, 교양, 인권 감수성에만 있다면, 이는 마치 우리의 삶에 개입하여 친구들을 회유하고 달래주던 어머니에게 기대어 얻은 '거짓된' 우정과 같지 않은가.

261쪽
장애인의 신체에 부여된 아름다움, 즉 일종의 '숭고미'에 대한 관심은 '타자'의 숭고함에 대한 관조와 사색의 과정이다. 관조가 가능하려면, 그 대상이 내 삶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절대로 허락해서는 안 된다. ...... 이들이 장애인의 신체에서 어떤 아름다움을 느낀다면, 그런 종류의 미적 경험은 그 대상이 전적으로 '타자'일 때에만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262쪽
한 사람의 세계가 궁금해서가 아니라 그의 신체를 소유할 생각만 한다. 하지만 이런 소유하고 싶은 성적 욕망보다 위에서 언급한 '미적 숭배'가 딱히 더 나은 점이 있는가?

267쪽
장애인이나 병에 걸린 사람들이 우리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며 성금을 보내고, 구세군에 거금을 쾌척하면서도 막상 그 신체와 5분도 같이 앉아 밥을 먹지 못하고, 그 신체가 버스에 올라타는 잠깐의 시간을 기다려주지 못하고, 그 신체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를 짓는 일에 반대한다면 그 자체로 혐오이며 다른 해명이 필요하지 않다.

267쪽
근육병과 골형성부전증에 따라 붙는 거창하고 낭만적인 운명 '서사시'에 매혹되어 종교적 감수성을 느낀다고 한들 이는 그 존재에 대한 사랑과는 관련이 없다. 몸을 욕망해야 한다. 종교나 도덕, 정치가 뭐라고 하든 너의 '신체'와 함께하고 싶다는 선언이야말로 타인을 향한 욕망이고, 곧 사랑이다.

268쪽
타인의 몸에 대한 욕망에서 출발하는 일은 자연스럽고 문제될 것이 없다. 중요한 것은 거기서 출발해 그 욕망이 어디로 나아가는가이다. 몸에서 시작해 그 몸을 가진 개별자에 대한 사랑으로 에로스가 확장될 때 그것은 우리가 닿고자 하는 '사랑'의 이상에 가까워질 것이다.

257쪽
디보티devotee란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성적으로sexually 끌리는 사람들을 지칭하며, 이들이 장애에 대해 보이는 태도와 욕망을 '디보티즘devoteeism'이라 부른다. 스티브는 다리 부분이 절단된 장애 여성이라는 사실 외에 앨리슨이 어떻게 생겼는지, 전반적으로 어떠한 사람인지를 전혀 모르지만 그녀에게 매력을 느낀다.
...... 학자들은 디보티즘을 성적 도착이나 병리적 수준의 페티시즘으로 이해한다.​

270쪽
앨리슨은 ...... '디보티 예외주의devotee exceptionalism를 발견한다. 이는 디보티들이 오로지 자신들만이 절단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혐오가 아닌 욕망을 느낀다는 점을 강조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 이들의 문제는 신체에 대한 욕망에서 그 사람의 개별적 존재에 대한 사랑으로 나아가지 않고, 결국 '예외적으로 장애인을 사랑해주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 그친다는 것이다. 이들을 타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결핍 있는 타자를 사랑하는 자신'에게 도취된다. 과연 디보티들만 그럴까?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에게서도 이런 그림자를 가진 사랑을 확인한다.

273쪽
배우 조인성이나 엠마 왓슨이 휠체어에 앉아만 있다면, 화면이나 사진 속에서 그들은 여전히 아름다울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오랜 시간 장애를 가지고 살아온 사람들은 근육의 편중된 사용으로 인한 신체의 불균형한 발달, 척추의 뒤틀림, 팔다리의 대칭성 붕괴 등을 겪을 수밖에 없다. ...... 한마디로 '우아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사진이 아니라 초상화라면 어떨까? 초상화는 사진과는 다른 양의 시간을 구현한다.
...... 우리가 한 사람을 '본다'고 할 때 그 행위는 사진을 찍는 행위보다 초상화 그리기에 가깝다. 특히 당장 내 앞에 있는 그 삶을 볼 때가 아니라 기억을 떠올릴 때 더욱 그렇다.

276쪽
<왕좌의 게임>에서 '티리온' 역으로 등장하는 배우 피터 딘클리지는 연골무형성증을 가진 장애인이다. ...... 7년이라는 시간 동안 시청자들은 티리온의 삶 전체를 따라가며 스냅사진 같은 한순간이 아니라 그의 연기가 만들어낸 오랜 시간을 캐릭터의 외모에 통합한다. 

284쪽
장애인들은 많은 경우 사진 속에 (정치인들과 함께) 등장하지만 '초상화'를 만날 기회는 거의 없다. ...... '매력차별금지법'은 불가능하지만 '아름다울 기회 평등법'은 가능하다. ...... 이 모든 실천은 자기를 표현하는 데 제약이 많은 사람들이 인간이라는 '화가'들 앞에 자기 초상화를 맡길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다. ...... 아름다울 기회의 평등이 있다면 적어도 당신과 나의 신체도 얼마간은 아름다울 수 있다.



296쪽
이른바 '난쟁이'로 불리는 연골무형성증을 가진 장애 아동의 삶을 떠올려보라. 그 아이가 자기 신체를 정체성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그 결단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을 존중하며, 자기의 삶을 '잘못된 삶'이 아니라고 변론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차라리 자기 신체를 '잘못된' 것이라 인정한 뒤 많은 돈을 모으거나 높은 지위를 획득해 그 '잘못된 신체'를 보완하고 타인을 무시할 수 있는 권력을 추구하는 쪽이 더 쉬울지 모른다.

301쪽
당신이 장애아를 낳든, 장애인으로 태어나든, 어느 날 갑자기 장애인이 되든, 혹은 그 밖의 복잡한 사정들로 인해 당신이 오로지 '개인적인' 세계 안에서 외롭게 굴을 파 내려가고 있다고 믿는다면, 조금은 각도를 틀기 위해 애써봐도 좋다. 완전히 수직으로만 내려가지 말고 단 1도라도 방향을 틀어보라. 어느 순간 당신은 다른 동굴과 만날 텐데, 그곳에 예측하지 못했던 정체성의 서사가 존재할 것이다.

310쪽
자신을 수용하고 돌보려 노력하지만 결코 완전하지는 못할 이 '취약함'이야말로, 각자의 개별적 상황과 다른 정체성 집단에 속해 있는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공통분모일 것이다.

313쪽
존엄의 순환은 그렇게 시작되고, 그 순환 속에서 존엄은 더 구체화되고, 더 강해지고, 더 중요한 가치가 된다. 

 

 

[네이버 책]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 김원영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실격당한 인생이라 불리는 이들도 그 자체로 존엄하고 매력적인 존재다!1급 지체장애인인 변호사 김원영이 우리 사회에서 잘못된 삶, 실격당한 인생이라 낙인찍힌 이들의 삶을 변론하는 『실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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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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