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생각 - 섭리교 - 나르시시즘

 

역경을 딛고 성공한 사람, 어려운 환경에서도 사소하지만 소중한 것들을 지키며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훈훈하고 통쾌한 즐거움을 준다. 반복되는 행운, 무탈한 인생에선 느낄 수 없는 감동이다. 그러면서도 많은 사람들은 정작 본인의 인생에선 좋을 일만 계속되기를 바란다. 장담컨대 그런 인생이란 불가능할 뿐 아니라, 가능하다고 해도 그리 행복하지 않다. 나쁜 일이 없으니 좋은 일도 좋은 일인 줄 모르고, 끊임없이 더 큰 욕심을 부리게 되기 때문이다. 반전과 역전이 뒤섞인 인생은 제삼자의 입장에서 전해 들을 때도, 자신의 일일 때도 흥미롭기 마련이다. 내 인생을 한 편의 재미난 전기 소설이라 생각하면, 지금의 고통이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고통이 심하면 심할수록 더 극적인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고 기대할 수 있다. 스스로 떳떳한 삶을 살았다면 우주의 섭리는 반드시 그에 대한 보상을 내리기 때문이다.

 

적당한 수준의 나르시시즘은 본인의 행복에 도움이 된다. 물론 나르시시즘, 즉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 역시 타고난 성향에 의해 발달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행복해지기 위해 억지로 나르시시즘을 키울 필요는 없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강제와 강요는 부작용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본인에게 자기애 성향이 있다면 이를 억누르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행복해지는 데 상당히 이로운 성향이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즘과 우주의 섭리에 대한 믿음이 결합하면 내 인생은 한 편의 영화가 되고, 나는 그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다. 영화에는 다양한 장르가 있다. 시종일관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가 지속되는 느와르부터 웅장하고 호화로운 액션, 전쟁, 시대극에 이르기까지. 장르는 주인공의 캐릭터에 달렸다. 타고난 기질에 따라, 원하는 분위기에 따라 본인이 만들어 가기 나름이다. 모든 영화가 해피엔드가 아니듯 본인의 인생도 어떤 결말을 맺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 결말이 비극이라고 해도 분명 의의가 있고 감동이 있다. 극적인 사건을 다룬 영화, 잔잔하고 소소한 일상을 그린 영화, 한 인물의 일대기를 표현한 영화, 하루 또는 일주일간의 짧은 시간대를 담은 영화 등 모든 영화는 어떤 식으로든 재미와 감동을 선사한다. 내가 그 영화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면 소소하면 소소한 대로, 극적이면 극적인 대로 재미와 감동을 만끽할 수 있다.

 

분명 떠날 생각이 없었다. 500 30, 그 월세 집에 몇 년간은 죽치고 살 작정이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이 터졌다. 한창 높은 습도와 온도로 고생하던 여름철, 세탁기와 수도꼭지의 연결 부분이 벌어지면서 밤새 집안 가득 물바다가 되어 버린 것이다. 전문가의 손까지 빌려 설치해 둔 터라 무방비 상태에서 겪은, 그야말로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눈 뜨자마자 남편과 함께 방바닥 복구에 나섰다. 장판을 죄 뜯어내고 새로 사다 깔았고, 며칠간 매일같이 보일러와 에어컨을 번갈아 틀었다. 장마로 인한 물난리도 TV에서 본 게 전부인데, 세탁기 수도 때문에 물을 푸고 있자니 참 어이가 없었다. 한마디로, 웃겼다! 이왕 고생하는 거 즐겁게 하자, 괜히 시트콤 부부겠냐며 이사한 놈들 모양 장판을 깔다 말고 짜장면까지 시켜 먹었다. 몸은 고됐지만 저녁 나절엔 유쾌하게 외식을 다녀올 만큼 집도, 마음도 정상화되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건물 주인이 노발대발하면서 시비를 걸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집뿐만 아니라 집 앞 복도, 같은 층의 다른 집까지 부주의로 망쳐 놓았으니 책임을 지라는 것이었다. 이후 한 달에 한 번, 잦게는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찾아와서 엉뚱한 생트집을 잡는가 하면 다른 집 도배, 장판비까지 청구하고 나섰다. 비어 있는 집에 습기가 올라와 보일러를 때야 한다기에, 모든 비용을 감당하겠다고 했지만 그의 넉두리는 끝이 없었다. 정초부터 덕담은 커녕 언제 나갈 거냐는 군소리를 듣고 있자니 더는 안 되겠다 싶어 그날로 이사를 결심했다. 집주인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무지 고마웠다. 덕분에 같은 값에 더 좋은, 우리 부부의 생활 패턴에 딱 맞는 집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새해 첫날 아침 9, 그가 돌연 오만상을 찌푸리며 문을 두들겨 대지 않았다면, 이곳에 새 터를 잡는 일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새해 첫날 아침부터 부동산 사이트를 뒤지기 시작한 나는 그날 곧바로 한 부동산을 찾았다. 9. 남편이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약속을 잡고 한 시간 거리를 달려갔다. 그런데 집주인과 도통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변. 집은 구경도 못하고 헛걸음만 쳤다. 그 주 남편의 휴일에 다시 같은 부동산을 찾았지만 여전히 그 주인과는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다른 집을 보여 주겠다며 나서는 중개인. 그런데 찾아간 부동산에서 막 계약을 처리 중인 집주인과 세입자를 마주쳤다. 운 좋게도 그 주인과 연이 되어 지금의 만족스러운 집으로 옮길 수 있었다. 그때 거기서 마주치지 않았다면 구하지 못했을 집이다. 처음 소개 받기로 한 집주인과 연락이 됐어도 맞지 못했을 행운이다. 중개인이 생각해 둔 집은 다른 집 두 채, 주인이 이 집을 내놓은 곳도 다른 부동산이었다. 이전 집주인의 횡포에도 불구하고 순순히 금전적인 책임을 감당하기로 한 덕분에 악재가 호재로 작용한, 그야말로 섭리의 힘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당시엔 울분을 토할 만큼 답답하고 속상했지만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는 비극에 비하면 그저 평범한 일상일 뿐이다. 집주인의 괴롭힘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에 비하면 또 다사다난한 인생이기도 하다. 생각하기에 따라 다른, 그저 평범한 일상이다. 중요한 건 우리 부부를 주인공으로 생각하고 우주의 섭리에 의해 세상이 돌아간다고 믿음으로써 위안 받고 매사에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혼 이후 매번 월세를 전전하면서도 그때 같은 불상사는 처음이다. 동시에 지금처럼 만족스러운 집도 처음이다. 꼭 짜 놓은 각본처럼 재미나고 훈훈하다.

 

사람들은 소설이나 영화 속 반전을 즐긴다. 뼛속까지 악질인 사람보다 독실한 종교인, 평범하거나 소심한 사람이 저지르는 범죄에 더 흥미를 느낀다. 공감대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상 밖의 사건이라는 점에서 재미를 더하기 때문이다. 나는 픽션을 접할 때처럼 내 인생에서도 반전을 환영한다. 처음부터 줄곧 좋은 집에서 부족함 없이, 남들과의 갈등도 없이 무탈하게 승승장구한 삶을 산다면, 죽는 날까지 주어진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행복을 추구하면서 목적을 잊지 않고 산다면, 지금의 어려운 상황도 그저 과정일 뿐이라는 여유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다. 당연히 인생은 과정이다. 과정이 행복해야 죽는 날에도 행복할 수 있다. 오늘은 과정일 뿐이니 크게 생각지 말고 넘기자는 게 아니라, 이런저런 우여곡절 자체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제대로 까발릴 필요가 있겠다. 전 집은 반지하, 이 집은 옥탑이다. 30대 중후반의 결혼 8년차 부부가 반지하에서 옥탑으로 이사했는데 좋다고 난리다. 보수 비용으로 앞으로 얼마를 더 떼일지도 모르는데, 새 집이 너무 좋다며 행운, 감사를 운운하고 있다. 다분히 골이 비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우린 훗날 지금을 추억할 수 있으리란 확신에 그저 재밌기만 하다. 반지하에서도 살아 보고, 옥탑에서, 방 한 칸짜리 집에서 부대끼며 살아 본다는 건 꽤 드라마틱한 인생이다. 정작 이곳에 살고 있는 우리는 현재를 시트콤의 한 장면처럼 즐기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가 측은한 눈길을 보내도, 안타깝게 바라봐도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다.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분명한 이유와 목적이 있으면 남들의 무시 따윈 '무시'해 버릴 수 있다. 영화 속 주인공으로서의 나르시시즘이 갖는 긍정적인 측면이다.

 

나르시시즘과 이기주의를 착각하는 건 금물이다.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과 자신에게 관대한 것은 엄연히 다르다. 다른 사람들에겐 철저하게 원칙을 내세우면서 본인의 일에는 이런저런 핑계와 예외를 두는 것은 자기애 발휘가 아닌 그저 이기적이고 비합리적인 처사일 뿐이다. 무조건적으로 자기를 사랑하라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TV 볼 시간에 차라리 책을 읽으라고 자식에게 잔소리하면서 하루 종일 TV만 보는 엄마, 본인은 밥 먹듯 지각하면서 부하 직원에게 지각만큼 나쁜 습관도 없다고 훈계하는 상사, 저녁마다 친구들과의 술자리를 가지면서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라고 아내를 구워삶는 남편, 하나같이 씨알도 먹히지 않는 소리를 하고 있는 꼴이다. 같은 조건이라면 똑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정당성과 설득력을 얻을 수 있는 법이다.

 

 

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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