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재능 - 난이도

 

같은 일이라도 누군가는 더 어렵게, 누군가는 더 쉽게 느낀다. 경력이나 실력의 차이 때문이 아니다. 전문 분야와 관련이 없는, 지극히 일상적인 일에 대해서도 어떤 사람은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절대로 맡고 싶지 않을 만큼 버거워 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그 차이는 타고난 기질에서 비롯된다. 남편과 내가 집안일을 어떻게 분담하는지,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어떤 점에 주목하고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 가는지에 대해 <# 다른 콤비 - 강약의 하모니>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같은 맥락이다.

 

한때 스튜어디스는 많은 여자들이 되고 싶어 하는 직업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다. 지금도 일부 남자들은 스튜어디스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여성상으로, 아나운서 이전에 스튜어디스가 꼽혔던 것이다. 10년도 더 된 얘기다. 당시 나는 대학생, 20대 초반이었다. 주위에도 학원을 다니며 스튜어디스를 준비하던 친구가 더러 있었다. 뭘 배우는지는 몰라도 학원까지 다니며 참 열심이었다.

 

많은 이들이 꿈에 그리는 직업 스튜어디스. 그때나 지금이나 난 그들의 꿈을 '그럴 수 있다'고 인정은 하지만 여전히 이해하긴 어렵다. 비행기만 탔다 뿐이지 음식점이나 옷가게에서 손님 시중 드는 것과 다를 바 없어 보여서다. 특히나 서비스 마인드를 강조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영 못할 짓이란 생각이다. 스튜어디스는 항공사에서 월급을 받고, 항공사는 고객에게서 이용료를 받는다. 결국 스튜어디스가 버는 돈은 고객의 주머니에서 나온다. 당연히 고객이 갑, 스튜어디스가 을이다. 갑의 횡포가 심한 우리나라에서, 을에게 갑의 비위 맞추기를 철저히 요구하는 우리나라에서, 스튜어디스는 대표적인 '감정 노동자' 중 하나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다. 지금도 스튜어디스는 지성미를 대표하는 직업군일 뿐 아니라, 숱한 학원들은 홈페이지 대문에 합격자 명단을 당당히 공개하며 성업 중이다.

 

항공사 유니폼을 입고 외국어를 유창히 구사하는 멋드러진 겉모습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시중을 드는 직업이란 생각 때문에 내가 스튜어디스에 대한 선호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시중'에 재능이 없어서다. 시중 드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되묻는다면 사전을 찾아보라고 말하고 싶다. '시중'의 유의어는 '서비스'. 바꿔 말하면 '접대'. 상대가 필요로 하는 것을 채워 주고 챙겨 주는 일이다. 누군가는 서비스 마인드를 타고나서 무의식 중에도 접대성 멘트를 날리며 웃어 보이고, 노력하지 않아도 상대의 필요를 파악할 수 있지만 내 경우는 다르다. 일단 남의 요구에 민감하지 못하다. 상대가 요청하기 전에 알아채기는 커녕 알고 나서도 별로 응하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긴다. 나 역시 남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는 일이 거의 없다. 독립적인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거지꼴을 하고서라도 각자 하는, 개인적인 일이 편하다. 유니폼이나 사회적인 인식은 전혀 중요하지가 않다.

 

본인의 경우 접대와 독립 중 어떤 성향이 더 발달했는지가 궁금하다면, 집에 손님이 찾아왔을 때를 떠올려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접대에 능한 사람은 자동적으로 묻는다. 음료, 과일, 식사 가운에 어떤 종류를 원하는지. 사실 원하는 걸 말해도 반영은 안 된다. 전부 다 내오기 때문이다. 이제 막 밥을 먹어서 배부르다고 얘기해 봤자, 처음엔 차만 내오더니 어느새 과일을 깎기 시작한다. 빵인지 과자인지 주전부리도 한 움큼이다. 차라리 밥을 먹는 게 나을 뻔했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번 방문 땐 아예 처음부터 '식사!'라고 답한다. 더 큰 실수다. 식사 후에 전에 먹었던 것들을 고스란히 또 먹어야 한다.

 

나도 누군가가 방문하면 차나 음료를 내야 한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사회생활에서 배운 소중한 '지식' 중 하나다. 몸에 밴 습관이나 성향이 아닌, 머리로 기억한 지식을 떠올려 몸울 움직이는, 후천적으로 터득한 바다. 어떤 걸 원하는지 상대의 의견을 묻지도 않는다. 그냥 한 잔 준비해서 말없이 슬그머니 가져다 둔다. 가까운 사이에선 이마저도 없다. 주의를 기울여야 접대가 가능한데, 막역한 사람을 대하면서는 지식을 동원하지 않기 때문에 접대도 없는 것이다. 주기 싫어서, 줄 게 없어서가 아니라 달라고 하기 전까지는 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다. 필요한 게 있으면 그때그때 요구하는 내 사고방식을 상대에게 그대로 적용하기 때문이다.

 

성향의 차이는 일상에서 걸핏하면 오해를 빚는다. 그저 독립적일 뿐이지만 서비스 정신을 타고난 사람에게는 무뚝뚝하고 차가운 사람으로 비춰진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독립적인 사람이 볼 때 접대에 능한 사람은 '가식적이다' 내지는 '도대체 무슨 꿍꿍이속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직장에서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오해를 살 수 있다. 똑같은 서비스를 제공하더라도 누군가는 전혀 힘들지 않게 하면서 좋은 평가를 받는가 하면, 누군가는 온갖 노력을 기울여도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핀잔을 듣는다. 어려운 일과 쉬운 일은 단정할 수 없다. 직장에서야 업무상 필요한 기능이니 본인이 판단할 일이지만, 일상에서는 각자의 성향을 존중해 줘야 한다. 자기에게 쉬운 일이라고 해서 모두에게 쉬운 일이란 법은 없다. 다를 뿐이지 덜떨어진 게 아니다.

 

파블로 피카소, 알버트 아인슈타인, 톰 크루즈, 셋의 공통점은 난독증을 앓았던 유명인이라는 것이다. 난독증이란 '듣고 말하는 데는 별다른 지장을 느끼지 못하지만 철자를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하는 증세'를 말한다. 일종의 학습 장애로 분류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미술, 과학, 영화의 각기 다른 분야에서 난독증을 극복하고 이름을 떨치는 데 성공했다. 난독증은 '다른' 것과 '틀린' 것을 구분해야 하는 필요성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한다.

 

2007년작인 인도 영화 <지상의 별처럼>은 난독증 탓에 부모에게까지 천덕꾸러기로 낙인찍힌 어린이 이샨과 선생, 그리고 그의 부모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에는 선생이 부모에게 중국어가 적힌 종이를 내밀며 읽어 보라고 다그치는 장면이 등장한다. 부모는 당연히 중국어를 모른다. 해당 언어를 모르는 사람이 볼 때 외국어는 글자라기보다는 일종의 그림 같기만 하다. 읽어 볼 엄두조차 내지 못할 뿐 아니라 그대로 따라 쓰는 데만도 한참이 걸린다. 인도 사람에게 중국어란 우리나라 사람에게 아랍어나 태국어처럼 묘하기만 한 글자다. 부모는 선생에게 이걸 어떻게 읽냐며 반문한다. 부모가 이샨에게 했던 것처럼 선생은 똑같이 부모를 나무란다. 읽어 볼 시도도, 노력도 하지 않는다며 태도가 불순하다고 다그친다. 당황한 부모는 이내 깨닫는다. 노력이나 마음가짐과는 상관없이 자신이 중국어를 아예 읽을 수 없는 것처럼 이샨에게도 영어가 구분되지 않는 기호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깨달은 것이다.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도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게 한 결과, 단박에 현실을 인식시킬 수 있었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그리고 피카소, 아인슈타인, 톰 크루즈의 성공담을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야기를 접하는 내내 답답함에 가슴을 쳤을지 모른다. 안타까운 건 영화로 포장된 아름다운 이야기나 성공으로 끝을 맺는 위인의 일대기에 대해서만 '다름' '틀림'을 구분할 줄 안다는 사실이다. 본인의 일상에서는 다른 건 무조건 틀린 것으로 간주하는 한심한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밥은 오른손으로 먹어야 한다거나 주요 과목을 잘해야 한다는 등 틀린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시정을 요구하고 같은 방식을 강요한다.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을 눈엣가시로 낙인찍고, 다른 길을 가는 사람을 무능하다고 간주한다. 이샨은 어디가 모자란 게 아니라 글자를 인식하기 어려웠을 뿐이다. 문제의 답은 알고 있지만 문제를 읽을 수도, 답을 제대로 쓸 쑤도 없어 성적이 저조했을 뿐이다. 일반적인 시험 방식으로는 그의 지식 수준을 판가름할 수 없었던 것이다. 대다수가 같은 방식으로 시험을 치른다고 해도, 누군가에게 그 방식이 적합하지 않다면 배려하고 인정해 줄 필요가 있다. 적어도 부모, 친구, 부부간에는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테스트의 목적이 글자 해독이 아닌 지식 수준에 있다는 것만 기억하면, 즉 목적이 무엇인지만 기억한다면 많은 문제가 의외로 쉽게 풀린다.

 

 

Posted by 몽자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