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 - 김영민


25쪽
"인간은 본성상 정치적 동물이다." ...... 인간은 본성상 홀로 살 수 없기에, 일정한 집단을 이루어 공적인 일에 종사하게끔 되어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 현자들은 말한다.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고.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운명을 사랑하지 않으면 자기파괴적이 되고 만다고. 단식을 거듭하다가 거식증에 걸릴 수도 있고 ...... 인간이 집단생활을 통해 정치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는 단지 생존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보다 '잘' 살기 위해서다. ...... 정치 참여를 못 했다고 해서 사람이 갑자기 죽거나 그러지는 않는다. 다만 '잘' 사는 데 지장이 있다. 자신의 본성이 충분히 실현되지 않는 것이다. 엄청난 근육을 가진 사람이 무거운 물건을 들어볼 기회가 없이 살다 죽는 것처럼. 엄청난 춤 실력을 가진 사람이 한 번도 무대에 오르지 않은 채 죽는 것처럼. 

34쪽
그러다가 2011년 3월, 마침대 체벌을 금지하는 초중등교욱법 시행령이 통과됐다. 교실에서 폭력이라는 야만을 법적으로 제거한 것이다. 혹은 제거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보기에 따라서는 체벌을 없앰으로써 야만에서 문명으로 진행했다기보다는 한 종류의 야만에서 다른 종류의 야만으로 이행한 것인지도 모른다. ...... 운 좋게 그럭저럭 질서가 유지되는 사회에 태어났다고 해서 안심할 것도 아니다. 인간은 다른 생물과는 달리 고도의 문명을 건설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트럼프 치하의 미국을 보면, 인간은 야만으로 재빨리 회귀하는 능력 또한 가지고 있는 것 같다. 

50쪽
제도, 덕성, 리더십, 권력, 권력의 감시, 소통 등 제반 요소가 균형을 이룰 때 가까스로 바람직한 정치가 이루어진다. ...... 어느 정점에 도달했다고 해서 방심해도 좋은 것이 정치는 아니다. 건강이든 정치든, 늘 적절한 자극을 통해 활력을 유지하고, 활력의 적절한 배분을 통해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하염없는 과정이다. 정치는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다. 

76쪽
실로 놀랍지 않은가. 다수가 소수보다 분명 강할 텐데, 그 강한 다수가 결국 소수의 지배를 받는다. 정치적 허구가 그 놀라운 일을 가능하게 만든다. ...... 국민주권이라는 허구로 인해서 사람들은 자신이 통치받는 게 아니라 대리인을 통해 통치를 하고 있다고 믿는다. 마치 사랑이라는 허구로 인해서 자신의 복종이 타율적이 아니라 자율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처럼. ......성욕을 매개로 번식을 거듭하던 존재가 기어이 사랑이라는 픽션을 만들어냈듯이, 비루함으로 가득 찬 세속에서 기어이 신성을 발명해냈듯이, 허구는 삶으로부터 도피하기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삶을 지탱하기 위해 필요하다. ...... 허구는 사실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단순한 거짓말이나 궤변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허구는 삶의 필요가 요청한 믿음의 대상이다. ...... 허구를 믿고 즐기는 것이야말로 허구와 더불어 살기 위한 첫 번째 방법이다. ...... 허구와 더불어 사는 또 하나의 방법은 허구를 사실로 혼동하지 않는 것이다. 

86쪽
이렇게 작성된 설문지 답안은 자신의 '평소' 생각을 반영한 것이라기보다는 설문지 작성의 필요로 인해 그 순간 발명한 결과에 가깝다. 평소의 자신을 표현했다기보다는 사로운 자신을 창조한 셈이다. ...... 마찬가지로 민심이 설문을 만든 게 아니라 설문지가 민심을 만들었다고 할 만한 경우가 적지 않다. ...... 민심의 창조자는 민뿐 아니라 ...... 손에 잡히는 민심을 원하는 정치인, 모호한 상태로 부유하던 마음을 콕 집어 윤곽을 잡아준 사람, 여론조사로 밥 먹고 사는 사람, 관료적 요구에 맞는 근거를 통해 정책을 정당화해야 하는 사람, 그리고 영덕대게다. 

116쪽
우리가 증명사진을 '뽀샵질' 할수록 보다 선명해지는 것은 원본의 모습이 아니라 '뽀샵질'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의 욕망이다. ...... 사람들이 재현을 통해 원하는 것이 진실보다는 자기 욕망의 실현이라면 이미지를 볼 때 상상해야 할 것은 재현 대상이 된 원본이 아니라 그 재현물에 묻은 욕망이다. 

123쪽
몰입하지 않는 이가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 그는 상황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소외된다. ...... 그는 어떤 상황에도 몰입하지 않기 때문에 몰입이 주는 쾌감을 누릴 수 없다. ...... 그에게는 몰입의 쾌감 대신 아득한 피로와 슬픔이 있다. 그것이 전체를 생각하는 리더가 치러야 하는 대가다. 

131쪽
나오는 질문들은 정답을 얻기 위한 질문이라기보다는 그 정치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려고 던지는 미끼에 가깝다. 유능한 정치인이라면 자신의 매력을 발휘할 기회로 그 미끼를 활용할 것이다. 유머를 섞거나 질문을 재창조하기도 할 것이다. 관건은 정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반응을 보여주는 것이다. 

163쪽
관람은 전시물을 볼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전시장으로 걸음을 옮길 때 이미 시작된다.

169쪽
현실이 힘겨운 사람들은 현실의 가장자리인 해변으로 간다. 거기서 더는 나아갈 수 없는 인간의 한계와 현실의 강고함을 인지한다. 잠시나마 현실을 떠나고 싶은 사람들은 서핑 보드라는 최소한의 도구를 가지고 파도에 직접 부딪친다.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다시 현실의 육지로 돌아온다. 

172쪽
시게루가 그토록 육지를 떠나고 싶었던 이유를 상상한다. 여느 사람에게는 파도 소리가 높아서 아무것도 들을 수 없는 세계, 시게루에게는 귀가 들리지 않아 그저 무음 처리된 세계. 그 파도 속에서는 아무도 말하고 들을 수 없어, 누구나 공평하게 귀가 먹는 세계. 시게루가 파도에서 본 것은 그가 경험한 세계 중에서 가장 공정한 세계가 아니었을까. 

185쪽
삶은 예측 가능하지 않기에, 좋은 일도 있다. 삶의 아이러니는 좌절할 이유도 되지만 버틸 이유도 된다.

209쪽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선택하는 존재라지만 사실 인생에서 진정한 선택은 많지 않다. 자고 먹고 배설하는 생리 활동은 엄격한 의미에서 선택이 아니다. 사회가 주입한 욕망을 실현하는 것 역시 진정한 선택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에 비해 아이를 낳아 기르지 않겠다는 결심은 좀 더 '주체적 선택'일 가능성이 높다. 
아이를 낳겠다는 선택은 대개 성욕을 매개로 한다. 그런데 성행위는 얼마나 인간의 주체적 선택일까. ...... 반면, 피임하는 사람은 숙고하는 사람이다. 충동적으로 성행위를 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았어도 충동적으로 피임을 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성행위에 비해 피임은 종종 보다 주체적인 선택이다. 피임이 하나의 선택지가 되면서 재생산도 선택이 되었다. 

210쪽
물론, 여전히 태어나는 일은 자신의 선택이 아니다. ...... 마치 고깃집 불판 위에 올라가는 일이 삼겹살의 동의 여부와 무관한 것처럼. 인간은 '낳음을 당해서' 살아간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존재에게 왜 사느냐고 묻는 것은 디소 실례다. ...... 그런 질문을 받으면 시시포스의 기분이 나빠서라기보다 돌을 굴리는 일은 운명이고 운명을 반복하다 보면 별 생각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214쪽
...... 출산 거부는 점점 더 의식적이고 주체적인 선택이 되어간다. 삶의 근본적인 부조리함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선택일 수도 있고,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신 만나지 말자"는 선언일 수도 있고, 열악한 삶의 조건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배려일 수도 있고, 자기 인생을 더 자유롭게 누려보겠다는 판단일 수도 있고, 불공정한 사회에서 육아를 하지 않겠다는 거부일 수도 있다. ...... 국가의 관점에서 인구 감소는 문제일지 몰라도 재생산을 거부하는 개개인에게 인구 감소는 문제라기보다는 나름대로 문제에 대처한 결과다. 사람에 따라서 출산 거부는 삶의 난관에 대한 하나의 주체적인 해결책일 수 있다. 그러한 각성에 이른 인간은 1억을 빌려준다고 해서 낳지 않으려던 애를 갑자기 낳거나 그러지는 않는다.

232쪽
유랑하는 도적이 불규칙적으로 찾아와서 돈을 뜯는 게 좋을까, 아니면 아예 정주하는 도적이 착취하는 게 좋을까? 미국의 경제학자 맨슈어 올슨에 따르면, 후자가 주민 입장에서 낫다. 정주하면서 해당 지역을 독점하는 도적은 유랑 도적과는 달리 주민들을 시도 때도 없이 가혹하게 착취하지 않는다. 대신 안전을 보장해주고 자릿세를 뜯을 뿐이다. 그들이 착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그래야 더 오랫동안 자릿세를 뜯어갈 수 있으니까 그럴 뿐이다. ...... 올슨이 보기에, 이런 정주형 도적은 국가와 유사하다. 

250쪽
그들이 이렇게 모여 있는 모양새 자체가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이유는 그들이 평소에는 한자리에 있을 수 없는 처지라는 데 있다. 이들이 이렇게 모이고 단결할 수 있었던 것은 소나기라는 일시적인 위기에 의해 비로소 가능했다. 

258쪽
조직의 장이 되겠다는 사람은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일까지 책임지겠다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나 조직의 장이 된 사람은 책임을 지기보다는 보신에 힘쓰는 경우가 많다. ...... 모든 대안은 그 나름의 부작용이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는 사람, 일에는 비용이 따른다는 것을 감안하고 있는 사람, 기회비용까지 고려하고 있는 사람, 일시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고 말하는 사람, 그러기에 다음 세대만큼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끔 양질의 선택지를 마련해주려는 사람 말을 경청해야 한다. 

260쪽
물론 그 한 사람이 분투한다고 해서 세상이 갑자기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그의 존재를 통해 세상이 그래도 참고 살 만한 곳이라고 위안할 수 있다. 세상이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서사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 

284쪽
주먹을 휘두르느냐 말을 휘두르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복싱과 코미디는 모두 자멸의 스펙터클이다.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을 두들겨패서 남들에게 구경거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복싱과 코미디는 쌍둥이처럼 닮았다.

291쪽
우리가 건축한 현대는 부실 건물이었다. 허겁지겁 베껴온 제도들은 헛돌고 있다. 시민이 대거 출현하는 데 마침내 실패했다. 자신들이 추구할 공동선을 종교하게 정의하는 데 기어이 실패했다. 우리의 성취는 꼭 성취가 아니었다. 

295쪽
한국이 방역에 상대적으로 성공한 것은 선진국이어서가 아니라 헬조선이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인적, 물적 자원을 갈아 넣을 수 있는 곳, 원하면 통신사 기지국을 통해 시민의 동선을 샅샅이 복구할 수 있는 곳, 와불처럼 달관하는 대신, 보란 듯이 살아남고야 말겠다는 결기를 가지고 너나 할 것 없이 추노꾼처럼 전력 질주하는 곳, 이곳에 안온한 선진국형 게으름과 권태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 ...... 사람들은 여전히 밥을 사냥하듯이 먹고, 자신이 굴릴 돌을 앞장서 고르는 시시포스의 심정으로 직장을 고른다. 


[네이버 책]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 - 김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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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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