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쪽
딸아이 친구 엄마들과 몇 차례 아이들을 데리고 만나는 과정에서 재미난 현상을 하나 목격했지요. 간식을 푸짐하게 주문해서 식탁에 차려 놓자, 딸아이들은 자연스레 자기들이 하던 것을 멈추고 식탁 주변으로 모여들어 엄마들 곁에서 간식을 먹었고, 시선은 엄마들을 향했지요. 그런데 남자아이들은 자기들이 하던 게임이며 놀이를 중단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어요. 더욱 놀라운 일은 엄마들이 자연스럽게 간식거리를 집어다가 아들들 입에 가져다 넣어 준 것입니다. ...... 함께 모인 자리에서 여자아이들은 엄마를 중심으로 관계를 형성했다면 남자아이들은 놀이, 즉 자기 자신에게 더 몰입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18쪽
아들이나 남편은 그나마 타자, 어떤 대상으로 존재한다면 딸은 엄마에게 어떤 대상이기보다 마치 자신과 같은 존재들이지요.
19쪽
남자아이처럼 좀 더 충족된 내 상태에 엄마를 포함시키는 것이 아니라, 여자아이는 내가 없이 타인인 엄마의 상태에 나를 포함시킵니다. 이처럼 많은 여성들은 타인의 감정을 자기 것으로 여기기에 타인을 충족시키거나 타인의 만족을 구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만족시키거나 충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36쪽
아이들이 자신을 돌봐 줄, 보호해 줄 대상을 위해 자신을 포기하고 순응할 수 있는 것처럼, 여성들은 자신의 헌신과 희생을 감수해서라도 보호해 줄 누군가를 찾습니다. 아이들은 보호를 받는 것을 곧 사랑을 받는 것으로 인식하고, 여성들은 보호해 주는 것을 사랑을 주는 것으로 인식하지요.
38쪽
의존성이 강한 엄마들은 대부분 피해자와 약자 위치에 자신을 놓습니다. 내 욕구를 타인이 채워 주어야 하는 것이고, 그로 인해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도 타인이기에 늘 피해자일 수밖에 없지요. ...... 또한 스스로 책임지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책임질 수 있는 역량과 자원이 없다고 생각하고, 어떤 결정과 선택을 하기를 두려워하지요. ...... 자신의 문제에 집중하고 사색하며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하고 책임을 지는 과정은 매우 고단하고 외롭기 때문이지요. 의존성이 강한 사람이라고 해서 결코 게으르지는 않습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지만, 모든 에너지와 시선은 외부를 향해 있습니다. 오직 외부에서 원인을 찾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고단한 노력을 멈추지 않지요. 배우자나 가까운 가족, 외부 자원에 위임하는 것이 훨씬 안전하고 편의적인 방법 중 하나이지요. ...... 의존성을 선택하여 편의성을 얻는 대신, 육체적 희생과 헌신이라는 대가가 따라붙습니다. ...... 이렇게 희생하고 참고 헌신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결핍과 좌절인 경우, 원망과 원한이 차곡차곡 쌓입니다. 간혹, 통제적인 남편과 함께 살면서 지긋지긋해하고 늘 피해자로서 고통을 호소하지만 은근히 그 통제를 유지하려고 하고, 심지어 즐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 의존이 만들어 내는 헌신과 희생의 목표 지점은 내가 원하는 보호와 울타리입니다. ...... 때로는 의존성을 유지하기 위해 비현실적인 불안을 불러오기도 하지요.
41쪽
엄마들은 아이가 엄마와 떨어지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하기 쉽지만, 실은 엄마가 아이와 떨어지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아이는 감각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이지요.
63쪽
병아리가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을 지켜보고 견디는 일은 어미 닭이 겪어야 하는 두 번째 과제입니다. 첫 번째 과제는 비록 알을 품는 시간 동안 힘겨웠지만 동시에 함께 누리기도 했던 만족감을 포기하는 일입니다. 즉, 상실을 허용하는 것이지요.
73쪽
내가 나의 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의문을 갖고 의심할 수는 있어야 합니다. '이 감정은 무슨 감정이지? 내가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거지? 나는 왜 내 생각과 달리 이렇게 아이에게 말하고 행동하고 있는 거지?'
83쪽
아이는 엄마가 내놓는 정답이 아니라 엄마가 삶을 대하는 태도를 체화하는 법입니다.
103쪽
엄마가 보기에 아이가 왜곡되거나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거나 생각하고 있다면, "네 생각과 감정은 그렇구나."가 끝이어야 합니다. 그 생각에 가치와 평가가 들어가는 순간부터 아이는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기 어려워집니다. 나 자신을 수용하지 못한다는 것은 타인을 수용하지 못한다는 말과 같지요.
117쪽
이 말은 분석 과정 중에 거론되는 내용은 한 개인이 실제 그것을 경험했느냐, 아니냐보다 왜 그렇게 기억되는지, 그 기억을 붙들거나 그 기억이 만들어 내고 있는 환상과 욕망이 무엇인지, 그 욕망의 방향이 어디인지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한 개인의 진실과 그 개인이 좇고 있는 진리를 말해 주기 때문이지요.
118쪽
우리의 기억은 기표가 아니라 가장 영향을 많이 준 부모나 주변인이 부여한 기의, 의미에 따라 형성되고 차곡차곡 쌓입니다. ...... 자크 라캉은 한 개인에게 부여되고 새겨져 있는 의미들을 기표 중심으로 새로운 의미로 만들어 가는 것을 주요한 치료 과정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상처나 흔적을 무턱대고 없애거나 지워 버리는 작업이 아니라, 그 의미와 무게를 재해석해서 지금까지 나에게 상처로 새겨진 나무라는 기표에 새로운 의미를 써 나가는 일을 말하지요. 무의식의 재구성이고, 심리 구조의 재구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분석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122쪽
좋은 엄마가 아니라 자신이 구체적으로 경험한 엄마와의 관계가 내재화되어야 합니다. ...... 좋은 엄마란 없습니다. 내 모습인 채로 충분히 내 아이와 개별적이고 독특한 관계를 맺으면 그것으로 충분하지요. ...... '나는 네가 상상하는 엄마는 아니지만 네 엄마로서 충분히 너를 사랑하고 있고, 너도 엄마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충분히 사랑받아 마땅하다'라는 것을 아이와 엄마가 관계를 통해 경험해야 하지요. ...... 나쁜 것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좋은 것만 보려는 회피를 통해 어둠은 더 커져 갑니다.
155쪽
엄마가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은 사회가, 세상이 만든 환상이고, 모성 신화이기도 합니다. 사실 부모와 자식만큼 조건적 사랑이 있을까도 싶습니다. 희생한 만큼의 보상을 은밀하게 요구하고, 말과 신체로 직간접적으로 호소하기도 합니다. ...... 내 안의 상처들을 이해하고 나를 깊이 알아 갈수록 여성이 가지고 있던 모성이 제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새로운 모성을 발굴하고 제 기능을 찾아 힘과 빛을 발하게 됩니다.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무엇을 보호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지요. 더불어 나와 아이뿐만 아니라 타인을 지킬 줄도 알게 됩니다.
164쪽
내가 무엇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있는지 의식하지 못하면, 그 대가는 가까운 누군가가 치르게 됩니다. 가족은 무조건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일반화된 지식에 갇혀서 '사랑'을 의심하지 않으면 문제가 깊어집니다. 설마 엄마가, 딸이 서로를 질투하고 방해할 리가 없다고 굳게 믿으며 무의식적으로나마 은폐하고 보지 않으려는 데서 일어나는 왜곡과 폐해가 독이 되는 것이지요.
207쪽
"넌 늘 아빠 편이구나"라는 한마디는 딸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고 엄마 자신을 약자, 피해자의 위치에 놓습니다.
207쪽
배우자인 남편의 흉을 끊임없이 쏟아 놓으며 딸을 감정받이로 사용하는 엄마는 단순히 감정을 받게 하는 것이 아니라, 딸이 훗날 남성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을 겪게 만듭니다. ...... 물론 이것은 아버지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지요.
208쪽
언어와 인간의 몸, 그리고 정신은 결코 따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 아이의 발달 단계를 보면, 엄마와 아이가 온전히 융합되어 있는 상태인 영아기를 지날 무렵 언어가 유입되고, 그 언어에 의해 억압이 시작되면서 무의식이 출현합니다. ...... 유아에게 언어가 유입된다는 것은 쾌락적 존재이기만 했던 아이가 더 이상 쾌락과 충동만을 추구할 수 없는 금지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우리는 모두 내면 안에 로고스(Logos, 말씀)를 가지고 있습니다. 융 심리학에서 말하는 남성성, 즉 아니무스가 곧 로고스입니다 .칼 융에 따르면, 여성 안에도 남성성인 이 로고스가 존재합니다.
229쪽
부모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면서 아이에게 끝없이 마음을, 곁을 내주지만 '네 삶에 대해서만큼은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어'라는 무능의 자세가 아이를 생동감 있게 살도록 만들 것입니다.
244쪽
엄마가 아이를 믿어주고 불안해하지만 않는다면, 상처를 받지 않는 아이가 아니라 상처를 잘 견뎌 내는 아이로 성장해 나갈 것입니다.
265쪽
아감벤의 책에서 말하듯, "나태의 그리스 어원은 무관심"입니다. ...... 우리가 가까운 사람들과 관계하면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 특히 부모와 아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는 사소한 것에 대한 '관심'과 관련이 있습니다. ...... 주의와 관심을 충분히 쏟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도 그것이 내가 기울이고 싶은 부분에만 집중적으로 치우쳐 있다는 사실을 어렵잖게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도 편의성이 들어갑니다. 열심히 하지만 좀 더 나태한 방법으로 열심히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의존이 편의성의 이면이라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입니다. 아이들의 요구와 상태에 주의를 기울이는 노력은 역시 꽤나 피곤합니다. 아주 단순하게 풀어 이야기하면, 무심한 엄마는 나태한 엄마라는 것이고, 이것은 물리적 나태를이야기한다기보다 정서적인 나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려는 태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지요. 물리적 부지런함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역설적이게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지런하면서 나태한지요. 우리는 자신에게서 혹은 자기 접촉과 사색, 성찰에서 멀어지기 위해 극도의 부지런함, 즉 육체적 희생을 자처합니다.
267쪽
우리가 누군가를 나 자신보다 더 챙길 때는 그 대상을 통해 나를 확인하려는 욕구가 앞서기 때문입니다.
271쪽
나를 찾아가는 두 가지 방법
첫째는 믿을 만한 분석가를 찾아 자신을 언어화하는 일입니다. ...... 둘째는 자기 글쓰기를 하는 일입니다.
278쪽
우리는 트라우마도, 나쁜 기억도 그것이 없었던 상태로 돌아가 온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품고서도 충분히 회복될 수 있습니다.
[네이버 책] 딸은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 - 박우란
'몽자크의 책갈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잡기-2023-069] 아버지의 해방 일지 - 정지아 - 별 셋 - 1204 (0) | 2023.12.04 |
---|---|
[책잡기-2023-068] 지지 않기 위해 쓴다 - 바버라 에런라이크 - 별 - 1203 (3) | 2023.12.03 |
[책잡기-2023-066]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 정희진 - 별 다섯 - 1129 (0) | 2023.11.29 |
[책잡기-2023-065] 희망의 배신 - 바버라 에런라이크 - 별 둘 - 1125 (0) | 2023.11.25 |
[책잡기-2023-064] 1시간에 1권 퀀텀 독서법 - 김병완 - 별 셋 - 1122 (1) | 2023.1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