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쪽
인성 검사는 기업이 입사를 거절하거나 해고한 뒤 '부적합'하다는 말로 합리화할 수 있도록 예의 바르게 처신하는 방편의 의미가 더 크다. "우리는 개개인에게 딱 맞는 고유한 직무가 있다고 보는데 당신의 경우에는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을 따름입니다."라고 말하는 셈이다.
54쪽
"하지만 이력서를 보면 내 나이를 집작할 수 있잖아요. 대학 졸업 연도를 보면요(미국 노동법에는 채용 시 지원자의 나이를 밝히지 못하게 규정되어 있다-옮긴이)."
64쪽
상사의 감독을 받듯 자신을 관리해야 한다는 데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개념적 문제를 낳는다. 자신을 '판매'하는 것이 교묘하게 자신을 '대상화'하는 것이라면 자신을 '관리'하는 것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정신 복제의 영역에까지 이르게 된다. 지금까지 나는 바버라를 컴퓨터 앞에 앉아 일자리를 찾는 '노동자 바버라'와 살 사람을 찾아야 하는 '상품 바버라'로 양분해서 생각했다. 이제는 여기에 더해 이 둘을 감독할 책임이 있는 '감독자 바버라'까지 등장했다.
116쪽
이런 얘기를 듣다 보니 파시즘이 왜 호소력을 갖는지 파헤친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떠올랐다. 일부러 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누군가에게 상사 역할을 맡기려 하는 것 이상으로 명백한 자유 혐오의 징후가 있을까?
134쪽
로버트 재콜의 책에는 기업 세계에서는 옷차림이 단순히 몸을 가리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기능을 한다고 나와 있다. "외양을 적절히 관리하는 것은 다른 종류의 적응에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강점을 보여주는 신호다." 올바른 옷차림과 적절한 액세서리는 다른 방식에도 순응하겠다는(명령에 따르고 기존의 '문화'에 녹아들어 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는 뜻이다.
143쪽
하지만 전문가의 손길로 화장을 마친 내 얼굴에는 설명할 수 없는 창백함이 떠돌았다. 인간에서 물건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중간 단계로 일종의 죽음을 거쳐야 하는 것일까?
274쪽
화이트칼라 실업자를 겨냥한 책, 코칭 프로그램, 네트워킹 행사에는 구직자들이 자신의 처지를 보다 넓은 사회적 맥락에서 이해하려는 데에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는 이데올로기가 존재한다.
278쪽
법에서는 기업을 법인이라고 해서 '한 사람'처럼 다루지만 실은 수백 수천의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단어의 본래 뜻 그대로 기업(corporation)을 '공동의(corporate)' 조직으로 만드는 것은 이 부분이다. 기업의 이 공동적 혹은 집단적 성격은 이제 도저히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버렸다. 돈을 버는 합법적인 방법은 2가지다. 매출을 늘리든지 비용을 줄여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기업의 운영 경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건비가 비용 절감의 일차 대상이 된다. ...... 생물학적으로 거칠게 표현하면 기업은 포식자의 세상으로 변한 셈이다. 다른 사람의 일자리를 없애야 전진할 수 있다.
281쪽
기업 세계를 향해 다가가면서 그곳은 사무적이고 논리적이며 난센스 같은 건 없을 줄 알았다. ...... 그렇지 않고서야 극심한 경쟁 속에서 기업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나는 사실과 논리에 기반을 둔 세상과는 상관없는, 말하자면 과학이나 저널리즘과는 무관한 억측으로 얼룩진 문화에 맞닥뜨렸다. 그곳은 검증되지 않은 관행에 집착하고, 순응으로 마비되어 있고, 주술적 사고로 가득 찬 세상이었다. ...... 내가 맞닥뜨린 기업 세계의 여러 측면 가운데 가장 기묘했던 것은 '성격'과 '태도'를 무한 강조하는 것이었다. ...... 기업 세계로 향하는 길에는 성격을 개선하라는 경고 표지판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코치들은 쾌활하고 호감을 주는 성격이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하면서 인성 검사를 받게 한다. ...... 인성 검사란 본래 성격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기업의 입맛에 맞는 성격은 딱 하나, 항상 쾌활하고 열정적이며 복종적인 성격뿐이다. ...... 쾌활함, 낙천성, 순응성, 이 3가지는 부하의 자질이다. ...... 기업 세계의 격동을 감안할 때, 좋은 성격을 가지라는 것은 아무 것도 모르고 천진하게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되라는 뜻이다.
287쪽
'열정'의 강조는 기업 제국의 지배 영역이 신민들의 시간과 정신으로까지 확장되었음을 나타낸다. ...... 모든 시간이 회사의 것이다.
289쪽
화이트칼라들이 갖지 못한 것 중에 일자리의 안정성 이상으로 핵심적인 문제가 있다. 바로 존엄성이다. 의사는 자신의 기술과 노동을 판매한다. 이런 점에서는 블루칼라나 핑크칼라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다. 트럭에 짐을 부리는 창고 노동자, 다리를 설계하는 엔지니어는 자신의 노동과 임금이 직접 교환된다고 생각할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다. ....... 그런데 기술과 노동뿐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판매해야 하는 화이트칼라 직종에는 이런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 정장을 빼입은 화이트칼라가 육체노동자를 얕볼지 모르지만 사실은 육체노동자들보다 훨씬 강압적인 심리적 요구에 시달린다. 화이트칼라가 사는 세상은 음모와 정체불명의 기대치, 조작과 심리 게임이 횡행하는 곳이며, 성격과 태도 같은 자기표현이 업무 수행 능력보다 더 중요한 곳이다.
290쪽
화이트칼라가 고립된 채 취약한 상황에 놓인 것은 전면적, 무제한적으로 자신을 고용주와 동일시해야 한다는 조건 탓이다. 의사나 과학자는 자신을 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인식하지 근무하는 병원이나 실험실과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반면 화이트칼라는 현재 '임원실'을 차지한 이들에게 완전한 충성을 서약해야 한다.
299쪽
19세기에 마르크스는 일자리에서 밀려나 빈곤에 시달리는 '산업예비군'의 존재가 노동계급을 유순하게 길들이는 채찍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는 이 산업예비군 병력이 축소되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쨌든 일자리를 갖고 있다. 대신에 갑작스러운 해고 위협이 채찍 역할을 맡았다.
301쪽
미국 기업의 경쟁력을 위협하는 요인이 있다면 그것은 직원에 대한 인간 본연의 배려가 아니라 기업 내부의 방종 문화와 그로 인해 필연적으로 빚어진 무능이다. ...... 합리적 기업은 창의성, 혁신, 비판적 사고를 장려해야 한다. 하지만 화이트칼라에게 이런 능력은 경력을 끝장낼 자해 무기다.
...... "틀을 벗어나 생각하면 찬바람 부는 바깥으로 내쫓깁니다. 회사가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진실을 말하면 부정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으로 찍힙니다. ...... 요즘 직장에서 살아남는 진짜 마법의 주문은 '남들이 하는 식으로 해라.'입니다."
...... 화이트칼라에게는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고객은 바로 당신의 상사'라는 게 상식이다. 상사가 '고객'이라면 그에게 팔 상품은 뭘까? 아부인가?
303쪽
정리 해고의 피해자들이 이처럼 침묵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기업 문화는 의기양양하게 자축 분위기에 휩싸여 있다. ...... 일자리를 잃은 화이트칼라는 자신의 상처를 수치스러워한다. 현재 처한 상황에 아무런 책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명을 뒤집어쓴다. ...... 언제든 처분 가능한, 그리고 이미 처분당한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이 뭉쳐 자신들의 존엄성과 가치를 주장하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바라건대 그 과정에서 블루칼라 노동자와도 연대했으면 한다.
292쪽
고립된 절망에서 집단행동으로 나아가려면 태도와 마음의 변화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 변화는 커리어코치들이 권하는 방식과는 다르다. 실업자와 불안한 취업자인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호감'을 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손을 뻗쳐 공통의 문제로 끌어들이는 능력이다.
[네이버 책] 희망의 배신 - 바버라 에런라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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