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 송 여사는 식당 아줌마다. 공장 구내식당에서 요리부터 운영까지 책임지고 있다. 규모는 작아도 식단 구성부터 인력 채용까지 전반적인 업무를 관할해 온 세월이 어언 30년, 전문 셰프 혹은 총괄매니저 수준 그 이상이지만 송 여사는 본인을 그냥 '식당 아줌마'라 칭한다. 식당 안에서나 밖에서나 한결같다.
30년이란 시간은 퍽 길다. 젊은 시절 호텔 총무직, 화원 경영, 부동산 경매 등 다이내믹한 이력을 자랑하는 송 여사가 한 식당에서 30년간 뼈를 묻다니. 게다가 '구내식당'이라는 것. 영업시간을 정해두고 손님을 받는 일반식당과 달리 구내식당은 공장 사람들의 끼니를 책임지는 곳이다. 송 여사는 오전 7시에 제공하는 아침식사부터 정오의 점심식사, 오후 6시의 저녁식사까지를 몽땅 감당한다. 토요일 저녁, 일요일 하루, 설과 추석 연휴를 제외하고는 여름휴가도 없이 그 긴 세월 식당에 인생을 갈아넣었다. 경이롭다!
내 인생은 알바의 연속이었다. 단 한 곳에서 10년가량 소속돼 있던 것을 빼면 짧게는 3개월부터 길게는 3년까지 일하다 쉬다 다시 일하기를 반복했다. 지금은 회사 이름도 기억 안 날 만큼 아무 생각 없이 들락거렸다. 사람이 싫어서, 시스템이 엉망이어서, 문화가 후져서, 때론 이사로 거리가 멀어져서. 그만둘 핑곗거리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었다. 지금 일하는 곳에 몸담은 지도 2년 반. 슬슬 병이 도질 때가 됐다. 한 분야의 전문가란 다른 분야의 젬병이 되는 길이니 거부하겠어, 진정 내가 원하는 일을 찾을 때까지 탐색과 경험을 멈추지 않겠어, 이런 건설적이고 주체적인(으로 보이는) 발상이 신호탄이다.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직무에 적응하는 일은 쉽지 않다. 내향성이 짙은 나의 경우 시간을 꽤나 잡아먹는다. 어영부영 적응 좀 된 듯 싶으면 3개월은 훌쩍이다. 이때부터 의문이 피어난다. 이 돈을 받고 할 만한 일인가? 이 거리를 오가며, 출퇴근 왕복시간을 할애하며 다닐 만한 곳인가? 이 인간들을 참아내야 할 만큼 매력이 존재하는 분야인가? 정의로운 사회, 훈훈한 사내 문화, 능력 개발 및 발휘를 십분 독려하는 회사 시스템이 어딘가엔 존재하리라 믿던 시절에 품던 의문이다.
체념과 포기로 적당히 버무려진 지금, 이제까지와는 다른 이유로 직장 탈출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 나름 발전이라 자부하고 있다. 당분간 어떻게든 매달려 볼 삶의 모토이기도 하다. 이름하여 '직접적인 삶'.
내가 TV 제조 공장에서 일부 부품 생산직을 맡았다 치자. 단순한 일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것도 직업 만족도를 떨어트리는 요인이지만 핵심은 따로 있다. 노동 소외가 발생한다는 것. 나는 해당 부품을 귀신같이 만들어낼 수는 있어도 TV를 만들 순 없다. 심지어 그 TV를 가질 수도 없다. 부품 생산에 관여하지만 완성품의 원리 및 체계를 알지 못하고, 완제품을 구매하기에는 턱없이 적은 급료만을 손에 쥔다. 누가 어디서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알 수 없는 미지의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기계 앞에서 매일 같은 작업을 반복하는 것이다. 만져본 적도 사용해본 적도 없는 그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의문스러울 수밖에 없다. 효용감을 느낄 수 없다. 직접적이지 않은 삶이다.
시간을 단축하고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한 지금의 업무 시스템은 직접적이지 못한 삶이라는 치명타를 낳았다. 진정한 소통 대신 브랜드화한 서비스 품질 경쟁도 노동 소외의 일등공신이다. 고객응대 콜센터 직원은 제품에 대한 전문지식으로 고객 불만을 해결하는 데 힘쓰는 것이 아니라, 고객 응대 시스템 안에서 친절한 안내 멘트만 반복 구사한다. 건물 미화원은 내가 소속한 회사 건물이 아닌, 뭘 하는지도 모르는 옆 동네 으리으리한 건물 회의실을 쓸고 닦는다. 점심 피크 때 하루 세 시간, 식기세척기와 개수대에 붙어 한 평 남짓 공간에서 설거지 씨름만 벌이다 퇴근하는 알바도 흔하다. 요리를 담당하는 자영업장 사장님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본점에서 보내오는 고기, 면, 양념을 매뉴얼대로 지지고 볶아 메뉴를 완성한다. 키오스크가 결제를 대신하기 때문에 맛에 대한 평을 듣기 어렵고, 들었다 한들 매뉴얼이 떡하니 존재하기 때문에 손님의 요구를 반영하기도 어렵다. 부품을 조립하듯 조리할 뿐이다. 재미도, 의미도, 안타깝지만 없다.
송 여사는 고추장을 직접 담근다. 30년 기록은 그래서 가능했을까? 고추장뿐이랴. 된장, 게장, 김장, 식혜, 막걸리까지. 종가집 며느리가 아니다. 한정식집 명인도 아니다. 외국인 노동자 포함, 한 끼 몇 십 명의 식단을 책임지는 공장 구내식당 책임자일 뿐이다. 몇 십 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많게는 100여명일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30여명이 고작이란다. 양이 줄었을지언정 하는 일은 꾸준하다. 김치를 담그기 위해 때깔 좋은 고추를 고르고, 전라도 단골집에서 액젓을 공수한다. 맛이 있고 없고는 나중 문제다. 이렇게 일일이 직접 챙겨 만드는 음식들은 송 여사를 '소외'로부터 지켜낸다. 음식은 타지로 보내지지 않고 송 여사의 눈앞에서 소비된다. 퇴식구에 식기를 반납하는 이들에게서 생생한 후기를 듣는다. 각자의 식기에 남긴 찬을 스캔하면 누가 무엇을 얼마나 남겼는지, 어떤 찬이 인기인지 즉시 피드백이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송 여사는 본인이 작업한 결과물을 직접 '취'한다.
음식 관련 방송 프로그램이 넘쳐나는 요즘,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육수, 양념, 면발 등에 공을 들이는 주인장들을 심심치 않게 목격한다. 한때는 의심스러웠다. 방송의 재미를 위한 과장 내지는 홍보를 위한 쇼이겠거니. 다른 가능성을 발견했다. 직접 만들지 않고서는, 장시간을 들여 일일이 작업하지 않고서는, 본인의 오감을 거치지 않고서는, 고된 밥벌이를 견뎌낼 도리가 없어 부여잡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 편하자고 한 단계 건너뛰어버리면 손님 앞에서 예전만큼 뿌듯함을 만끽할 수 없기 때문에 고된 작업이 고된 것에서 그쳐버리고 만다. 두 번 짤 오이지 세 번 짰더니 손가락은 욕 나올 만큼 쑤시지만, 이 한 마디에 살 맛이 난다. 이번 오이지 어쩜 이렇게 아삭아삭, 꼬들꼬들 예술입니까?
내가 만들고, 직접 사용해보고, 다른 사용자들의 후기를 듣고, 반영하여 더 나은 것을 만들어내는 작업. 그러한 노동으로 꾸려가는 직접적인 삶. 노동 소외 없는 충만한 삶을 그리는 이들에게 훌륭한 모토가 될 수 있으리라. 벌써, 설렌다. 막걸리를 담글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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