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 않는다는 말 - 김연수


​27쪽
달리기는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시작할 때 그렇지 않다면, 끝날 때는 반드시 그렇다.

30쪽
유행가의 교훈이란 이런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가장 좋은 것을 좋아하자. 하지만 곧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나올 텐데, 그때는 그 더 좋은 것을 좋아하자. 물론 더 좋은 것도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다른 더 좋은 것을 좋아하자. 아무튼 지금 여기에서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것만 좋아하자. 그게 바로 평생 최고의 노래만 듣는 방법이다. 그렇다면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최고의 삶이란 지금 여기에서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삶을 사는 것이리라.

102쪽
한 때 여성 잡지사에 다닐 때, 미혼의 여 사장님이 특집 기획안으로 "일 잘하는 여자가 섹스도 잘한다"라는 걸 내놓은 적이 있었다. 좋은 말이었다. 뭐든 잘한다 잘한다 하면 다른 것도 잘하게 되는 법이다. 피그말리온 효과는 주위 사람들이 기대감을 가질 때 가장 크게 발휘되는 것이지만, 여건이 허락하지 않을 때는 스스로 가져도 괜찮다. 그러므로 자신이 하는 일은 우주적 손실을 면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버리자.

119쪽
여행자란 어떤 사람인가? 일어난 일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모든 걸 다 아는 것처럼 넘겨짚고, 현지인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여기는 사람이다. 우린 애당초 그렇게 생겨 먹었다. 내게 여행이란 나 역시 이런 생각을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 뒤, 이 태도를 넘어서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198쪽
기회의 뒤통수에는 머리카락이 없어 지나가고 나면 잡을 수 없다는 말이 있다. 마음에 드는 말이다. 안 잡히려고 뒤통수에만 머리카락을 잘라 낸 기회를 상상하면 비록 그 기회를 놓쳤더라도 어느 정도 위안이 된다. 나 같으면 잡히는 한이 있어도 머리카락을 기르겠다. 기회의 친한 친구가 바로 인생이다. ...... "기회야, 인생아, 나는 늘 늦게 깨닫지만, 그래서 후회도 많이 하지만, 가끔은 너희들의 뒤통수를 보며 웃기도 한단다. 안 잡을게. 그러니 뒤통수에 머리 길러도 괜찮아."

204쪽
사람은 예측한 대로 결과가 나오면 자신의 삶을 통제한다고 생각하고, 그때 제대로 산다고 본다. 우리가 자꾸만 어떤 결과를 원하는 건 그 때문이다. ...... 20대가 지난 뒤에야 나는 어떤 사람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해야만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제야 나는 최고의 작가가 아니라 최고의 글을 쓰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기 시작했다. 최고의 작가가 되는 건 정말 어렵지만, 최고의 글을 쓰는 사람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매일 글을 쓰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나니, 내가 쓴 최고의 글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최고의 작가가 아닐 수는 있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최고의 글을 썼다.

207쪽
누군가를 정말 사랑한다면, 결혼이 아니라 아낌없이 사랑할 수 있기를 원해야만 할 것이다. 결혼은 어려울 수 있지만, 아낌없이 사랑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다. 그건 내 쪽에 달린 문제니까. 마찬가지로 마라톤 완주가 아니라 매일 달리기를 원해야만 한다. 마라톤을 완주하느냐, 실패하느냐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매일 달리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다. 할 수 없는 일을 해낼 때가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을 매일 할 때, 우주는 우리를 돕는다. 설명하기 무척 힘들지만, 경험상 나는 그게 사실이라는 걸 알고 있다.

211쪽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안 한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런 마음으로 스스로 자책하는데, 뭔가 발끝에 차이더니 데굴데굴 굴러갔다. 주워 보니 밤톨이었다. 벌써 가을인 것이다. 그런데 밤이 뭐랄까 좀 다르게 생겼다. 묘사하자면, 음, 울퉁불퉁한 표면에 반쯤은 껍질이 채 형성되지도 않았다. 위쪽에는 거친 표면 사이사이에 하얀 먼지가 묻어 있었다.
그 밤을 손에 쥐고 돌아와 책상 위에 얹어 놓았다. 그냥 제대로 익지 않은 밤이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여름 내내 나무에 매달려 있다가 나름대로 익었다고 생각해서 바닥에 떨어진 녀석인데, 그렇게 말하기는 좀 미안했다. 그러니까 제대로 익지 않았다기보다는 제 방식대로 익었다고 말해야겠다. 

217쪽
결국 중학교 1학년 1학기 교실은 원숭이 우리와 비슷하다. 서열을 정하기 위해서 그들은 매일 원숭이들처럼 싸움을 벌인다. 3월 초에는 싸움을 잘하는 아이들끼리 서로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싸움을 벌인다. 월말이 되면 이젠 중간 순위의 아이들끼리 싸우면서 서열을 정한다.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야"라고 어른들은 말하지만 그건 다 뻥이다. 애들은 싸우면서 서열 정하는 법과 복종하는 법을 배운다. 아마도 어른들은 자란다는 것은 질서에 복종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223쪽
달리기를 하는 사람의 몸과 마음에서는 순간순간 조금 전의 자신을 배반하는 생각들이 오간다. 1시간 동안, 나는 수많은 '나'로 분리됐다가 다시 원래의 '나'로 돌아온다. ...... '오늘은 안 뛰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몸으로 한 시간을 뛰면 누구나 지옥과 천국을 차례로 맛보게 된다.

254쪽
달리기를 하는 이유는 절망과 좌절, 두려움과 공포가 거기 없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다. 거기에는 오직 길과 바람과 햇살과, 그리고 심장과 근육과 호흡뿐이다. ...... 한 달에 200킬로미터 이상을 달리는 대신에 숙면을 보장하는 단순한 삶이 나를 환영했다.

297쪽
진짜 최선을 다하면 그 순간 자신에 얻는 즐거움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즐거움이 얼마나 컸던지 지나가고 나면 그 순간들이 한없이 그립다. 내가 하는 행동과 말과 일을 통해서 내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보여 줄 수 있다는 것. 한없이 투명해진다는 것. 그 누구 앞에서도 어깨를 움츠리지 않는다는 것. 내게 아무리 많은 돈과 명예를 가져다준다고 해도 그처럼 살아갈 수 있었던 순간들과 바꿀 생각은 하나도 없다.


[다음 책] 지지 않는다는 말 -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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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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