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생각 - 섭리교 - 나르시시즘
종교에 의지하는 많은 사람들이 절대자인 신의 '빽'에도 불구하고 행복하지 못한 데는 한 가지 공통적인 이유가 있다. 대부분의 종교가 '신에 비하면 인간은 너무도 하찮은 미물'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이를 주입하고 되뇌어서 스스로를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인 양 착각하게 만든다. 자존감을 있는 대로 떨어뜨리는 것이다. 그래야만 종교 지도자, 신앙 생활, 그리고 신의 아우라에 철저히 의지하는 동시에 모든 걸 바칠 각오를 하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이단도, 정통이라 불리는 세계적인 종교 집단도 모두 마찬가지다. '당신은 대단한 존재요, 얼마든지 행복할 자격이 있는 존재다'라는 명제에서 출발하는 종교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종교란 본래 주도권을 쥔 자가 신이라는 발상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심적으로 의지하며 사는 사람은 평소에는 든든할지 몰라도 결정적인 순간, 극단적인 순간에는 그에 대한 원망과 분노로 몇 배의 고통을 치를 수밖에 없다. 불상사로 인한 고통에 믿었던 존재에 대한 배신감까지 더해지기 때문이다. 믿었던 대상이 사람이든 신이든 마찬가지다. 암 진단을 받고 새삼 종교 생활을 시작하는 경우도 있지만, 독실한 종교인이었다가 자식이 유괴돼 살해 당한 후 신을 버리는 경우도 있다. 고통이 크면 클수록, 신앙심이 깊으면 깊을수록 배신감과 회의감도 같이 커져서 최악의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면 신에 대한 환상이 깡그리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가장 안타까운 경우는 신을 떠나지도, 계속해서 믿고 의지하지도 못하는 탓에 끊임없이 번민에 시달리는 경우다. 믿음에는 '적당히'가 없다. 반(半)만 믿는 게 아니라 하루에도 수십 번을 오락가락한다는 말이다. 잠시나마 신을 원망했다는 사실에 무릎 꿇고 회개했다가 자기도 모르게 치밀어오르는 분노에 또다시 신을 원망하고 나선다. 혼란과 자책감이 뒤섞인, 그야말로 안타까운 모습이다.
반대로 자기 자신을 믿고 존중하면서 스스로가 인생의 주체임을 확실히 해 두면, 즉 한 단계 발전된 나르시시즘을 생활화하면, 그리고 우주의 섭리를 받아들이면 인생은 보다 행복해질 수 있다. 나르시시즘에 섭리교가 더해지면 치명적인 불상사가 닥쳤을 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방식의 생산적인 발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첫째 우주의 섭리로 인한 불상사인 만큼 그 일이 곧 다른 행운이 되어 돌아올 거라 기대할 수 있다. 둘째 그 일이 가진 긍정적인 측면을 찾아 종국의 행복에 보탬이 되도록 꾀할 수 있다. 셋째 신이 내린 재앙이나 누군가의 해코지가 아닌, 과거 자신의 소행이 초래한 마땅한 결과임을 인정할 수 있다. 뜻하지 않게 불상사를 자초했다는 생각은 배신감에 치를 떠는 것보다 훨씬 더 빨리 떨쳐 버릴 수 있는, 생산적인 판단이다.
닥친 사고만으로도 난국을 헤쳐 나가기 힘든 마당에 원망과 배신감까지 얹어 마음고생을 자처할 필요는 없다. 남을 미워하는 마음, 굳게 믿었던 대상으로부터 외면 당했다는 배신감이 치미는 것만큼 괴로운 일도 없는 법이다. 나르시시즘과 섭리교를 통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이유다. 갑자기 이사를 결심하게 된 위기를 겪으면서도 위의 세 가지 생각 덕분에 속 끓이지 않고 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다. 우린 집주인을 원망하거나 평소 건물의 청결을 위해 들인 노력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그 대신 다른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오히려 정초 집주인의 노발대발이 고마워질지 모른다고, 그날의 물난리가 우리의 실수인 건 분명하다고, 현명하고 유쾌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고비를 넘겼다.
세상을 '나'와 '우주의 섭리'라는 두 개의 개체로 인식하는 순간, 신에 대한 원망은 물론 다른 사람에 대한 원망도 사라진다. 아니 애초에 원망이란 자체가 생겨나질 않는다. 하느님이든 부처님이든 나에게 닥친 불행이 그분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신을 원망할 이유가 없는 데다가, 누군가가 앙심을 품고 저지른 일이 아닌 그저 섭리상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관련된 사람을 탓하고 미워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당연히 복수심에 괴로울 일도 없다. 우주의 섭리가 알아서 응징을 하든 포상을 하든 모든 사람, 모든 일을 정당하고 공정하게 처리할 텐데 굳이 본인이 나서서 어떻게 이 고통을 대갚음하나 고민하며 골머리를 썩일 필요가 없다. 그저 우주의 섭리를 믿고 뱃속 편히 지내면 그만이다. 우주의 섭리가 증명해 보이는, 참으로 마땅하게도 굴러가는 세상사를 감상하고 감탄하면 그만이다. 지금껏 내가 겪은 불행, 내가 베푼 선행, 내가 품은 온당한 마음의 자세가 앞으로 어떤 행운으로 되돌아올지 기대하고 감사하면 그만이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혹시나 오해하는 이가 있을까 싶어 덧붙인다. 분명 다른 좋은 일로 마땅한 보상이 주어질 테니 괴로운 일이 있어도 무던히 참고 견디라는 말이 아니다.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으니 어떤 고통도 순순히 감내하라는 뜻도 아니다. 이는 우주의 섭리만 받아들인 어리석은 경우다. 자기 자신을 아끼고 존중하는, 섭리교 못지 않게 중요한 나르시시즘을 빼먹고서는 행복도 반쪽짜리 행복밖에 누릴 수 없다. 섭리 때문만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 자체가 충분히 행복할 권리가 있기 때문에 '나'와 '우주의 섭리'가 맞물려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주의 섭리를 따른답시고 자기를 희생시킨다거나 하찮게 여겨선 안 된다. 그런 식으로는 온전한 행복을 누릴 수 없다.
섭리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자신의 가치를 분명히 인식하고 존중해야 한다. 마땅히 벌어진 결과가 아닐 때, 우주의 섭리라고 보기에는 영 부당하거나 불필요한 고통이라고 판단될 때, 이때는 자기 자신에 대해 찬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섭리에도 맞지 않고 내가 못나거나 자격이 없는 것도 아닌데 어떤 상황이나 사람이 계속해서 나를 괴롭힌다? 이는 자기 자신에 대해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본인이 어디에서 만족감을 얻는지, 무엇을 잘하는지, 어떤 성향의 사람과 잘 어울리는지를 간과했거나 착각했다면, 혹은 제대로 파악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면 사는 건 그 자체가 고역일 수밖에 없다. 맞지 않는 옷을 입으면 불편할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 중요한 건 옷에 이상이 있거나 몸이 비정상이어서 불편한 게 아니라 단지 사이즈가 맞지 않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본인 사이즈만 정확하게 파악해 두면 문제는 곧바로 해결된다. 사이즈는 무지막지하게 다양하다. 본인이 얼마만큼 주의를 기울여 파악했느냐에 따라 완벽하게 들어맞는 옷을 고를 수도, 완전히 어긋난 선택을 할 수도 있다. 불행한 일상을 우주의 섭리려니 생각하고 억지로 적응하려 애쓰거나, 고통에 고스란히 노출된 채 시달리고 있을 필요가 전혀 없다. 우주의 섭리만큼 '나' 또한 대단하고 소중한 존재다!
행복계발 시트콤 MONZA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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