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콤비 - 두 개의 구슬 - 무언
연락이 뜸한 친구나 연인에게 서운해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경우는 둘 중 하나다. 상대가 본래 연락을 자주 취하는 사람인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 전자일 땐 우정이든 사랑이든 일방적인 감정을 그 즉시 접는 게 상책이다. 그래야 더 큰 화를 막을 수 있다. 상대가 자주 연락하는 성격이 아닌 후자일 땐 스스로 결단을 내려야 한다. 본인이 잦은 연락을 선호하는 쪽이라면 ① 상대의 성향을 감안하고 받아들이거나 ② 관계를 끝내는 것이다. 상대를 바꿀 생각은 애초에 안 하는 게 낫다. 따라서 보기에도 없다. 두 개 중에서만 골라야 한다.
다소 극단적인 논리이긴 하지만 뒷날의 행복을 생각하면 백 번 천 번 다시 생각해도 지당한 얘기다. 잔소리와 강요, 혹은 애절한 부탁과 앙증맞은 애교로 본인이 원하는 만큼 자주 연락을 취하게 할 순 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상대는 이내 지쳐 나가떨어질 것이고, 본인 또한 괴로워질 수밖에 없다. 계속해서 요구한 바를 따른다면 다른 방식으로 보상을 바랄 게 분명하기 때문에 방심했다간 큰코다치기 십상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각자 사회생활을 시작하면 매일같이 붙어다니던 친구들과도 연락이 뜸해지기 마련이다. 졸업한 지 3년쯤 지나면 날을 잡거나 행사가 있지 않는 한 얼굴 보기가 점점 더 힘들어진다. 딱 그때, 20대 중후반에 있었던 일이다. 대학 시절 한창 어울리던 친구 셋이 있었다. 어느 날 그중 하나인 최 양에게서 문자가 왔다. 결혼 날짜가 잡혔다는 것이다. 철부지 캐릭터인 최 양. 결혼 선물로 뭘 원하는지도 똑 부러지게 밝혔다. 오랜만에 받은 연락이었지만, 전화도 아닌 문자메시지였지만, 어떤 표정, 어떤 말투로 보낸 문자인지 금세 알 수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축하 문자로 답장을 보냈다. 며칠 뒤, 만나서 그간의 회포를 풀자며 약속을 잡았다.
그런데 홍 양이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유 양에게서 전해 들은 말은 충격적이었다. 얼굴 본 지가 언젠지도 가물가물한데 일생일대의 사건인 결혼 소식을, 청첩장도 없이, 달랑 문자메시지 한 통으로 전한다는 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데다가 선물까지 요구한 게 기분이 나빴다는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당사자인 최 양보다 내가 더 흥분하고 나섰다. 최 양과 홍 양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홍 양이 그런 사람이라면, 그렇게 친구의 본심을 오해하는 사람이라면, 나 또한 그녀와의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겠다고 판단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홍 양과 나는 그날로 친구 관계를 청산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끊으려면 생각보다 큰 결단이 필요하다. 일대일로 맺어지는 관계보다 다수가 얽혀 있는 관계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친구가 그런 경우다. 한 사람과의 관계를 끊으려다 자칫 여럿을 잃게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놓은 이유는, 그녀와의 관계가 기쁨보다는 부담을 주는 사이가 돼 버릴 수 있겠다는 염려와 함께 그동안 쌓은 신뢰가 한낱 보잘것없는 수준이었다는 깨달음이 동시에 치밀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련이 전혀 없진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도 단연 '굿 초이스'였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지금, 최 양, 유 양과는 1년에 한 번 얼굴을 볼까 말까 하지만 그래도 둘은 여전히 가장 소중하고 편한 녀석들이다. 홍 양이 끼어 있었다면 지금처럼 편하고 돈독한 관계로 발전하지는 못했을지 모른다. 몇 개월 동안 연락 한 번 없다가 SNS로 결혼을 통보해 와도 아무 거리낌이 없는 녀석들. 이것이 내 생애 최고의 우정이다.
분명히 해 둘 문제가 있다. 홍 양이 틀렸다는 게 아니다. 그저 그녀와 내가 쌓아 가는 우정의 방식이 달랐을 뿐이다. 한쪽이 틀려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관계를 접은 게 아니라는 말이다. 서로 간에 취하는 방식과 가치관이 다르면 같은 일로 반복해서 갈등을 빚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럴 바에야 차라리 문제의 뿌리를 뽑아 버리는 편이 나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잘못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개인의 취향이고 성향이기 때문에, 상대를 원하는 대로 바꾸기 위해 들이는 노력은 대부분 허사로 돌아가고 만다. 왜 바꿔야 하는지도 모른 채 상대의 비위 맞추기에 급급한 관계란 두터워 봤자다.
"상대의 신뢰를 얻었다고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은 지나칠 정도로 친밀한 태도를 보이거나 필요 이상으로 자주 연락을 취한다. 이미 서로 신뢰하는 사이라면 친밀한 감정을 애써 드러내 증명할 필요가 없다. 그런 태도를 무기로 삼지도 않는다." '친구'에 대한 니체의 생각이다. 상대가 지나치게 자주 연락을 해 온다거나 긍정적인 감정을 과장된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려 든다면, 그의 속셈이 무엇인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환심을 사려는 억지일 수도 있고, 무언가를 얻어 내려는 계산일 수도 있다. 본심이 순수한 사랑이든 이해타산적인 꿍꿍이든, 반드시 원하는 바가 있기 마련이다. 니체의 말처럼, 진정한 친구나 연인, 부부 같은 동지 사이에선 그 따위 감정 '표현'에 기댈 이유가 전혀 없다. 허울에 의지하고 그 허울로 위안 삼는 어리석은 짓은 하루빨리 청산하는게 현명한 처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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