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쪽
한자로 풀이하더라도 체념의 체諦는 진리 '체'자로 사물의 본질을 명확하게 밝히거나 주관을 단념하고 객관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체념은 포기하는 마음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처한 조건을 명확하게 밝힘으로써 새롭게 깨달은 도리에 따라 희망을 만들어가는 적극적 마음이다. ...... 폴라니의 대표작인 <거대한 전환>이란 책을 읽다가 마지막 페이지의 결론에 눈길이 갔다. "체념은 항상 인간에게 힘과 새로운 희망의 샘이었다"며 체념의 축복을 역설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는 “인간은 죽음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였고, 오히려 그것을 기초로 삼아 자신의 이승에서의 삶의 의미를 쌓아올리는 법을 배웠다"며, 가장 밑바닥의 체념을 받아들이게 되면 다시 새로운 생명이 솟구치고 아무도 꺾을 수 없는 용기와 힘을 얻게 된다고 주장한다. ...... 포기는 상대의 힘을 아는 것인 반면, 체념은 '나 자신을 아는' 것이라는 말이 있듯이, 무엇보다도 자신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포기는 자신을 모르는 상태에서 쉽게 할 수 있지만, 체념은 자신을 아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기에 쉽게 할 수 없다. 체념은 나름의 고민과 깨달음이 수반되는 일이다. ...... 나는 자주 체념을 함으로써 마음의 평온을 찾는다.
70쪽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날 것으로 배설하는 걸 솔직이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배설이지 솔직이 아니다.
75쪽
"난 뒤끝이 없다"는 말은 기분이 상한 피해자가 할 수 있는 말이지, 기분을 상하게 만든 가해자가 해선 안 될 말이다.
111쪽
남녀를 막론하고 우리는 과연 사회생활에서 우리 자신의 인식과 자신감을 믿고 있는가? 혹 그건 남들의 경험에 의해 판정되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좀더 유리한 판정을 얻어내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는 건 아닌가? 예컨대, SNS는 그런 용도와 무관한가? 몇 년 전 인기를 끈 <SNS 백태>라는 게시물은 이렇게 말한다.
"미니홈피 - 내가 이렇게 감수성이 많다. 페이스북 - 내가 이렇게 잘살고 있다. 블로그 - 내가 이렇게 전문적이다. 인스타그램 - 내가 이렇게 잘 먹고 다닌다. 카카오스토리 - 내자랑 + 애자랑 + 개자랑. 텀블러 - 내가 이렇게 덕후(오타쿠)다." 등.
세상은 참 재미있다. 대부분의 인정 투쟁은 자신이 잘나고 중요한 사람으로 대접받기 위한 것이지만, 어떤 인정 투쟁은 억울한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정 투쟁이니 말이다. 특히 삶의 밑바닥으로 굴러 떨어진 범죄자에게도 나름의 인정 투쟁이 있다는 게 흥미롭다. ...... 한 재소자는 "누군가에게 총을 겨누었을 때만큼 자신이 '존중'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 이렇듯 낮은 단계의 인정 투쟁과 관련해 김찬호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억지로 나를 증명할 필요가 없는 공간과 안전한 관계라고 말하는 것이 가슴에 와닿는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사람들, 억지로 나를 증명할 필요가 없는 공간이다. ...... 내가 못난 모습을 드러낸다 해도 수치스럽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가지고 뒷담화를 하지 않으리라고 믿을 수 있는 신뢰의 공동체가 절실하다. 그를 위해서는 자신과 타인의 결점에 너그러우면서 서로를 온전한 인격체로 승인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120쪽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는 "우리가 사람을 있는 그대로 대할 때,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그보다 그를 안 좋게 보는 것이다. 그가 될 가능성대로 이미 된 것처럼 대할 때 우리는 그가 되어야 할 모습대로 만들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122쪽
영국 런던의 한 잡지사는 이와 같이 주어에 따라 표현이 다르게 변하는 유형들을 모집하는 대회를 열었는데, 당선작으로 뽑힌 것 중에는 이런 게 있었다.
"나는 정의에 따라 분노한다. 너는 화를 낸다. 그는 아무것도 아닌 일에 날뛴다."
"나는 그것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너는 변심했다. 그는 한 입으로 두 말을 했다."
123쪽
이른바 '장점의 단점 법칙'이라는 게 있다. 개인의 장점은 그 어떤 것이든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단점이 수반되기 마련이라는 법칙이다. ...... 이는 뒤집어서 '단점의 장점 법칙'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우리는 보통 어느 한쪽만 보려는 경향이 있다. ...... 놀랍게도 내가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그 사람의 단점이 다른 상황에선 놀라운 장점일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 그런 마음의 여유를 누리고자 한다면, 사람에 대한 '확신'은 자제하는 게 좋다.
129쪽
'침묵의 칵테일 파티'라는 게 있다. 가벼운 파티를 열되 그 파티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말을 하지 않게끔 되어 있다. 신체 언어로만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어떤 결과가 벌어질까? 말을 나누는 보통의 파티보다 서로를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왜 그럴까? 우리의 언어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자신을 감추거나 미화하는 용도로 더 많이 사용되기 때문이다. 특히 파티와 같은 사교 모임에선 더욱 그럴 것이다.
137쪽
수많은 해법이 나와 있지만, 정여울의 생각이 모범답안인 것 같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 진짜 중요한 것은 거절의 '태도'지 거절 자체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며 이런 결론을 내린다. "잊지 말자. 우리는 부탁을 거절하는 것이지 존재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거절하는 이에게는 '거절의 윤리와 에티켓'이, 거절당하는 이에게는 '거절을 지혜롭게 해석하는 능력과 거절을 극복하는 용기'가 필요한 요즘이다."
141쪽
안드레아 돈데리Andrea Donderi는 거절과 관련해 '직접 문의형 문화'와 '추측형 문화'를 구분한다. ...... 요청을 받는 입장에서 거절을 하기 어려운 건 당연히 후자다. 대체적으로 보아 서양은 직접 문의형 문화권인 반면, 동양은 추측형 문화권이다.
268쪽
그런 위인전 교육으로 인해 아이들이 이른바 '평범함에 대한 두려움과 수치심'을 갖게 된다면, 그게 아이를 위해 좋은 걸까?
[네이버 책] 평온의 기술 - 강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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