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경사 바틀비 - 허먼 멜빌


69쪽
나는 때때로 급한 용무를 신속히 처리하려는 열망에서 무심코 짧고 급한 어조로 바틀비를 소환하곤 했는데, 가령 빨간 끈으로 어떤 서류를 눌러서 묶다가 첫번째 끈 매듭을 손가락으로 눌러달라고 부르는 경우가 그랬다. 물론 칸막이 뒤에서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라는 평상시의 대답이 어김없이 나왔다. 그러면 인간 본성이 공유하는 나약함을 지닌 인간인 이상 그렇게 괴팍하고 그렇게 비합리적인 반응에 어찌 호통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당하는 이런 종류의 거절이 매번 누적됨에 따라 무심결에 그런 행동을 반복할 확률은 대체로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82쪽
그는 가정대로 하기보다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사람인 것이다.

86쪽
하지만 다정한 자선 때문에 악마의 소행인 살인을 저질렀다는 말은 이제껏 들어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다른 고상한 동기를 거론할 것도 없이, 단순히 자기이익을 위해서라도 모든 사람은, 특히 성을 잘 내는 사람은 자선과 박애를 행할 만하다. 어쨌거나 지금 이 문제의 경우에 나는 바틀비의 행위를 호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그 필경사에 대한 나의 격앙된 감정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87쪽
너는 이 의자들처럼 해가 없고 시끄럽게 굴지도 않아. 요컨대 네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만큼 사적인 느낌이 든 적이 없어. 드디어 나는 내 삶의 예정된 목적을 보고 느끼고 꿰뚫어보고 있어. 나는 만족해. 다른 사람들은 좀더 고상한 역할을 맡을 수도 있겠지만, 바틀비야, 이 세상에서 나의 임무는 네가 머물렀으면 하는 기간만큼 네게 사무실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야.

88쪽
그러나 도량이 좁은 사람들과 끊임없이 마찰하다보면 마침내 좀더 관대한 사람들의 최상의 결심마저 갉아먹히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90쪽

녀석이 부랑자라고? 뭐라고! 꼼짝도 않으려는 녀석이 떠돌이 부랑자라고? 그렇다면 녀석을 부랑자로 취급하려는 까닭은 녀석이 부랑자가 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인 셈이네. 그건 정말 말이 안돼. 명백한 부양수단이 없다는 것, 녀석의 약점은 바로 그것이야. 이것도 틀렸어. 왜냐하면 녀석이 자기 힘으로 벌어먹고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며 그것이야말로 부양수단을 소유하고 있음을 보여줄 수 있는, 반박 불가능한 유일한 증거이기 때문이야. 

101쪽
그 소문은 이렇다. 즉 바틀비가 워싱턴의 배달 불능 우편물 취급소(Dead Letter Office, 미국 우정국 산하로 1825년에 설치되었음 - 옮긴이)의 말단 직원이었는데, 행정부의 물갈이로 갑자기 그 자리에서 쫓겨났다는 것이다. 이 소문을 곰곰이 생각할 때면 나를 사로잡는 감정을 표현할 길이 없다. 배달 불능 편지라니! 죽은 사람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가? 천성적으로 혹은 불운에 의해 창백한 절망에 빠지기 쉬운 사람을 생각해보라. 그런 사람이 계속해서 이 배달 불능 편지를 다루면서 그것들을 분류해서 태우는 것보다 그 창백한 절망을 깊게 하는 데 더 안성맞춤인 일이 있을까? 그 편지들은 매년 대량으로 소각되었다. 때때로 창백한 직원은 접힌 편지지 속에서 반지를 꺼내는데, 반지의 임자가 되어야 했을 그 손가락은 어쩌면 무덤 속에서 썩고 있을 것이다. 또한 자선 헌금으로 최대한 신속하게 보낸 지폐 한 장을 꺼내지만 그 돈이 구제할 사람은 이제 먹을 수도 배고픔을 느낄 수도 없다. 그리고 뒤늦게 용서를 꺼내지만 그것을 받을 사람은 절망하면서 죽었고, 희망을 꺼내지만 그것을 받을 사람은 희망을 품지 못하고 죽었으며, 희소식을 꺼내지만 그것을 받을 사람은 구제되지 못한 재난에 질식당해 죽어버린 것이다. 삶의 심부름에 나선 이 편지들이 죽음으로 질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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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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