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 자전거 여행 - 홍은택


14쪽
반면 페달은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피로 돌아간다. 페달을 밟는 수직 운동이 바퀴의 순환운동으로 전환되고, 다시 자전거의 수평이동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두 차례 혁명이 발생한다. 소진에서 지속으로, 그리고 경쟁에서 협동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이다. 미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두 가지 기본 가치인 속도와 경쟁과는 전혀 다른 세계다.

15쪽
마차와 자동차 사이에서 자전거의 시대는 너무 짧았다. 하지만 자전거가 지금도 굴러가고 있는 이유는 산악자전거 붐을 타고 레저용으로 살길을 찾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차를 타고 다니는 게 얼토당토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 몸무게 70킬로그램 한 사람을 나르기 위해 300마력을 내는 2000킬로그램 괴물을 움직이는 게 과연 합당한 일인가. 자전거 사색가인 리처드 밸러타인이 말했듯이, 카나리아 한 마리를 죽이기 위해 원자탄을 투하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28쪽
짐 싸는 과정은 자신의 취향과 성격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 사람들은 저마다 삶의 무게를 지고 산다. 집착이 많을수록 무거운 삶을 산다. ...... 어떤 사람은 아예 떠나지 못한다.

45쪽
무엇보다 미국의 철도 회사들은 자신들의 돈으로 철도를 건설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차 전용이 맞다. 만약 자동차 회사들도 도로 포장비용을 부담하거나 또는 분담하기라도 해야 했다면, 이렇게 많은 자동차들이 설치고 다니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정치적인 이슈다. 왜 미국에서 납세자들의 돈으로 도로를 포장해주고 자동차 회사들에게 더 많은 차들을 팔게 해줬는지 늦었지만 청문회라도 열어야 한다. 그렇게 공짜로 길을 닦아주니까 자동차들은 자기 것인 줄 착각하고 도로를 점령해버렸다. 

75쪽
보통 남녀가 종주를 같이하면 처음엔 남자가 짐의 3분의 2를 메고 가다가 하나씩 넘겨줘서, 여행 중반에 이르면 무게가 거의 같아진다고 한다. ...... 여성은 자신이 더 짊어져야 하는 무게로 남자의 인간성을 판단하지 않는 모양이다.

78쪽
젊은 사람들은 넒은 세상을 보기 위해 산행을 떠나지만, 나이 든 사람들은 세상을 잊기 위해 걷는다.

90쪽
관광지나 목적지 들을 찾아다니는 자동차 여행의 경로를 점선이라고 하면, 자전거 여행은 실선이다. 창 밖으로 보는 게 아니라 경치의 일부가 된다.

104쪽
운동과 노동의 차이는 운동은 하고 싶을 때 한다는 데 있다. 피로하면 운동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쉬는 동안 근육이 자란다. 그래서 내일은 더 높은 강도에 대응할 수 있다. 막노동하는 사람들에게 근육이 없는 이유는, 그들은 쉬지 않고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165쪽
여행이 좋은 것은 그 숱한 과정을 통해서 불필요한 것들을 걸러낼 뿐 아니라 필요한 것들의 숫자를 줄인다는 점이다. 여행을 하면 질박한 삶을 배운다.

223쪽
한국은 조금 이상하다. 우리는 걸을 때는 좌측 통행인 것 같은데, 차는 확실히 우측 통행이다. 보행이 좌측 통행인 것은 일제의 잔재인지도 모른다. 일본은 좌측 통행이다. 세계적으로 좌측 통행인 나라는 영국과 싱가포르, 말레이지아 같은 과거 대영제국권의 국가들과 일본밖에 없다. 우리나라 차들이 우측 통행을 하게 된 것은 짐작건대 미군정의 유산이 아닐까. 일제와 미군정을 거치면서 사람과 차의 통행방향이 뒤죽박죽 돼버린 거라면, 그리고 현행의 이중 통행체제에 내가 모르는 어떤 이점이 있는 게 아니라면 이제라도 한 방향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228​쪽
버지니아의 돌담이나 켄터키의 목책은 오래 묵으면 자연의 일부가 된다. 반면에 캔자스 대평원의 가시철조망은, 아무리 오래돼도 눈에 거슬린다. 같은 울타리인데 왜 그럴까. 출입을 막는 목적 외에 출입하려는 사람이나 동물을 해하려는 의도가 가시로 드러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231쪽
조지프 글리든. 1874년에 그가 특허를 낸 '더 위너The Winner'라는 철조망은 현재 쓰이고 있는 가시철조망의 원조이며, ...... 글리든은 잽싸게 특허를 출원했다. 글리든이 발명한 뒤에도 무려 570가지 철조망의 특허가 출원됐다고 하니, 기술을 개발하려는 의지와 철조망에 대한 미국 사회의 편집증에 가까운 집착을 엿볼 수 있다. ......
철조망의 발명은 카우보이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열린 목장'은 '닫힌 목장'에 밀려났다. ...... 철조망이 소 떼들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봉쇄함에 따라 카우보이들은 일자리를 잃고 낭만적 의미도 상실했으며, 끝내 로데오 선수로 변신했다.

233쪽
미국은 집이 하나의 우주다. 유럽이나 아시아에서 마을이 하나의 우주인 것과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미국에서 가족이 최우선적 가치로 강조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국의 가족은 핵가족을 의미한다. 근대적 개인들이 전통 사회에 들이닥쳐 수천 년 동안 연속해온 문명을 파괴하고 사유재산권에 기초해 세운 나라이기 때문이다. 사유재산권은 지금에서 보면 당연한 것 같지만, 왕이 모든 땅을 보유하던 국가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낯선 개념이었다. 영국의 식민통치를 몰아낸 미국인들은 개인들이 어마어마한 규모로 땅을 매집했다.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은 대표적인 땅투기꾼이었다. 미국 독립은 그들에게 복권 당첨과 같았다. 광활한 땅들이 투기꾼들의 수중에 넘어갔다. 절반 이상의 미국 국민들이 당시 땅 한 평 갖지 못했고 재산이 없는 사람은 투표권도 주어지지 않은 점을 감안할 때, 그것은 당신들의 축제였다.

235쪽
대평원은 가시철조망으로 둘러친다고 한들 그 안에 가둬지지 않는다. 가시철조망은 한없이 뻗어가는 내 시선을 차단할 수 없다. 나는 땅 한 뼘 없지만 대평원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대평원은 그 공간만큼 달리는 사람의 것이다. ...... 소유하지 않아도 세상을 누리는 법을 배운다.

243쪽
이제 몸은 일정한 수준 이상으로 달리지 않으면 무력감을 느낀다. 갑갑해한다. 앙탈을 부린다.
겨우 몇 주 전까지도 몸이 내 뜻대로 따라주지 않아서 힘들어했는데, 이제는 몸이 나를 끌고 가려고 한다. ...... 전부터 나는 내 몸을 손님처럼 잘 모셔야 할 별도의 존재로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몸이 점차 주인이 되고 그 전에 내 주인이라고 생각하던 정신이 몸의 지시를 따라간다. 이번 여행의 주체가 몸의 발견으로 변해간다.

257쪽
질리언은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10년간 수상생활을 했다고 한다. ...... 그러다 배가 바다 한가운데서 고장 나면 어떻게 하지? 일단은 배를 수리할 줄 알아야 하지만, 궁극적으로 마지막 해결책은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고 그는 담담히 말했다.

277쪽
원래 들소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의식주였다. 들소 가죽으로 천막집인 티피와 옷을 짓고 뼈로 도구를 만들었다. 특히 농토가 전혀 없던 이 일대에 살던 아메리카 인디언 부족 우테Ute에게 들소는 밥줄이었다. 함부로 잡지 않았다. 그러니 백인들은 인디언들을 직접 죽일 필요가 없었다. 총으로 들소를 마구잡이로 도살하면서 인디언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삶의 원천을 없애버렸다. 

287쪽
나는 놀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났다. 놀면서 이 세상에 있다는 거,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놀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다. 노는 데는 어떤 의무나 조건도 붙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자유롭다. 자유는 신의 특징이다. 신은 누구의 창조물도 아니고 다른 누구를 위해 일하지 않으며, 세계는 제우스의 장난이라는 니체의 말대로, 세상을 창조해야 하기 때문에 창조한 것도 아니다. 신은 스스로 연유하며 스스로 완결된다. 노동이 신성한 게 아니라, 놀이가 더 신의 속성을 닮았다. 놀이는 일상적이고 지루하고 관습적이고 당위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즉흥적이고 자발적이며 사소하며 창의적인 세계로 가는 몸짓이다. 천진난만한 아이가 되는 것이다. ...... 노는 게 당위론적으로도 좋은 이유는, 놀면서 뜻하지 않게 자신을 알아가고 얻어가며 넓혀나가기 때문이다. ......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게 아니라 세상 안에 펼쳐지고 있다. 

288쪽
체력이 향상된다는 것과는 다른 뜻이다. 내 몸은 의지가 육화된 표현기관이다. 반대로 내 의지는 몸이 조성하는 정신적인 힘이다.

334쪽
카를로스와 고르고 형제와 함께 호숫가를 산책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끝에 고르고의 직업이 가로청소원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처음에 시정부에서 일한다고 해서 고위공무원을 연상했다. 중앙정부에서 일한다고 하는 카를로스는 건설부에 소속된 도로를 포장하는 인부였다. 그래도 세계 여행을 할 수 있다. 자전거로 여행하면 돈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와인 한 병을 사와서 네 사람, 회사 중역 출신의 스위스인과 가로청소원, 도로포장 인부인 스페인인 두 사람, 그리고 백수인 한국인이 조촐한 저녁 잔치를 벌였다. 이게 자전거 혁명이 꿈꾸는 사회다.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자전거를 타든, 자전거 여행을 떠나는 순간 우리의 신분은 같다. 라이더다. 

378쪽
허무주의를 꼭 극복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도 우주를 이루는 전체의 한 부분이라고 믿는 것뿐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연계돼 있다고 믿어야 한다. 그렇다면 죽음으로 삶의 의미가 완성되지는 않겠지만 단절되는 것도 아니다. 더 큰 존재에 합류하는 길이 될 수 있다.

379쪽
자전거타기는 긴 거리를 달려서가 아니라 자신이 페달로 밟은 몇 미터의 거리에도 성취감을 느낄 줄 아는 삶의 한 방법이다. 비단 자전거타기뿐 아니다. 마라톤을 뛸 때 연도에선 시민들이 왜 손을 흔들어주고 박수를 쳐줄까 생각해본다. 인간애와 연대감 같은 게 있겠지만, 무엇보다 마라톤 주자들이 인간의 숙명을 재연하는 위대한 연기자들이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느껴서가 아닐까.

382쪽
그는 평소에 운동을 전혀 안하고 살다가 체중이 견딜 수 없게 불어나면 이렇게 직장을 관두고 미국에 와서 반년씩 걷다가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가곤 한다는 것.


​[네이버 책]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 - 홍은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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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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