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기술 - 알랭 드 보통


21쪽
우리는 여행의 현실이 우리가 기대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익숙하다. 물론 비관주의자들은 현실이 반드시 실망스럽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단 현실은 기대와는 다르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진실에 좀더 가까울 수 있고, 또 좀더 보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 내가 상상한 대로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 말에 놀라기 전에, 그동안 내가 무엇을 상상했는지 먼저 생각해보아야만 한다.

39쪽
우리는 집에서 우울해하면서 날씨와 추한 건물 탓을 했다. 그러나 열대의 섬에 와서 하늘의 상태와 숙소의 겉모습이 그 자체로는 결코 우리의 기쁨을 보장해주지도 못하고, 반대로 우리를 비참한 기분으로 내몰지도 못한다는 것을 배운다.

41쪽
실제 경험에서는 우리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것 때문에 정작 우리가 보러 간 것은 희석되고 만다. ...... 당혹스러운 신체적, 심리적 요구들 때문에 미학적 요소들의 감상은 방해를 받는다.

194쪽
우리가 시대나 엘리트 문제로 고통을 겪는다면, 우리가 사는 행성에 다양한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들을 만나고, 이 땅에는 위대한 사람들과 더불어 초원에서 트시입 하는 소리를 내는 밭종다리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위안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212쪽
이런 것들 옆에 있으면 인간은 그저 늦게 나타난 먼지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숭고함은 우주의 힘, 나이, 크기 앞에서 인간의 약함과 만나는 것이다. 이것은 유쾌할 수 있고, 심지어 사람을 도취시킬 수도 있다.

213쪽
버크는 자신의 주장을 설명해주는 예로 거세된 수소와 거세하지 않은 황소의 비유를 들고 있다.

215쪽
따라서 숭고한 풍경은 우리를 우리의 못남으로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익숙한 못남을 새롭고 좀 더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해준다. 이것이야말로 숭고한 풍경이 가지는 매력의 핵심이다.
숭고한 장소는 일상생활이 보통 가혹하게 가르치는 교훈을 웅장한 용어로 되풀이한다. 우주는 우리보다 강하다는 것, 우리는 연약하고, 한시적이고, 우리 의지의 한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 우리 자신보다 더 큰 필연성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는 것.
이것이 사막의 돌과 남극의 얼음 벌판에 쓰인 교훈이다. 이 교훈은 아주 웅장하게 쓰여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장소에서 우리를 초월한 것에 짓눌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영감을 받고, 그러한 장대한 필연성에 복종하는 특권을 누리고 돌아올 수 있다. 경외감은 어느새 숭배하고 싶은 욕망으로 바뀌어갈 수도 있다.

228쪽
만약 세상이 불공평하거나 우리의 이해를 넘어설 때, 숭고한 장소들은 일이 그렇게 풀리는 것이 놀랄 일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264쪽
니체가 알고 있었듯이, 화가는 단지 재현만 하는 것이 아니다. 화가는 선택을 하고 강조를 한다. 화가는 그들이 그려낸 현실의 모습이 현실의 귀중한 특징들을 살려내고 있을 때에만 진정한 찬사를 받는다.

276쪽
러스킨은 아름다움과 그 소유에 대한 관심을 통해서 다섯 가지 핵심적인 결론에 이르렀다. ...... 마지막으로 이런 의식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신에게 그런 재능이 있느냐 없느냐에 관계없이, 그것에 관해 쓰거나 그것을 그림으로써 예술을 통해서 아름다운 장소들을 묘사하는 것이다.
...... 이스트엔드(런던 동부의 근로자들이 많이 사는 지역)의 학생들이 화랑에 내걸 만한 것을 그릴 수 없어 그의 강의실을 떠나도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나는 목수를 화가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목수로서 더 행복하게 살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279쪽
한 장인은 강의를 끝내면서 러스킨이 자신을 포함한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자,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데생을 가르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단지 보는 법을 가르치려고 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두 사람이 클레어 시장을 걸어 들어간다고 해봅시다. 둘 가운데 하나는 반대편으로 나왔을 때도 들어갔을 때보다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 사람은 버터 파는 여자의 바구니 가장자리에 파슬리 한 조각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그 아름다움의 이미지들을 간직하고 나왔습니다. 그는 일상적인 일을 하는 과정에서 오랫동안 그 이미지들을 자신의 일에 반영시킬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그와 같은 것을 보기를 바랍니다."

282쪽
러스킨은 데생에 대한 애착을 설명하면서, 그런 애착이 "명성이나 다른 사람들 또는 나 자신의 이익을 얻고자 하는" 욕망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과 비슷한 어떤 본능"에서 생긴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세 가지 행동의 공통점은 모두 자아가 세상의 바람직한 요소를 동화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바깥의 선(善)을 안으로 옮기는 것이다. 러스킨은 어린 시절에 풀의 생김새가 너무 좋아서 자주 그것을 먹고 싶었지만, 점차 그것을 그리는 편이 낫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풀밭에 누워 자라는 풀잎을 그리곤 했다. 초원의 구석구석, 또는 이끼 낀 강둑이 나의 소유가 될 때까지."

285쪽
러스킨의 말을 빌리면, "당신의 예술은 당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한 찬양이어야 한다."

285쪽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아무리 솜씨가 형편없다고 하더라도 그 행위를 통해서 그 대상의 생김새에 대한 선명치 않은 감각으로부터 구성요소와 특색에 대한 정확한 의식으로 빠르게 넘어가게 된다.

291쪽
러스킨은 여행을 하면서 스케치를 하라고 권했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인상을 굳히려면 글을 써야 한다고, 그의 말로 하자면 "말로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 그는 우리 모두가 적절한 "말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295쪽
그는 많은 장소들이 미학적 기준이 아니라 심리적 기준에서 우리에게 아름답게 비친다는 점을 인식했다. 즉 색깔의 조화나 대칭과 비례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중요한 가치나 분위기를 구현하고 있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것이다.

308쪽
그렇다면 여행하는 심리란 무엇인가? 수용성이 그 제일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용적인 태도가 되면,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새로운 장소에 다가가게 된다. 어떤 것이 재미있고 어떤 것이 재미없다는 고정관념은 버리고 간다.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우리 때문에 짜증이 난다. 우리가 교통 섬이나 좁은 도로에 서서 그 사람들에게는 눈여겨볼 것이 없는 사소한 것들에 감탄을 하기 때문이다.

314쪽
거리를 걸어가다 보면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 연상적인 사고, 경이감이나 고마움, 시각적 요소에 의해서 촉발되는 철학적 일탈은 잘려나갔다. 그 대신 어떻게든 빨리 지하철 역까지 가고자 하는 집요한 요구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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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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