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대신 욕망 - 김원영 - 푸른숲


​21쪽
우리는 쿨하기보다는 오히려 뜨거운 존재가 되어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며 세계를 향해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35쪽
즐겁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고깃집 문을 열었는데, 갑자기 달려 나온 주인이 대뜸 "여기는 왜 오신 거예요?"라고 물었다. 왜 왔느냐니? 고깃집에 간 건 당연히 고기를 먹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주인의 눈에는 장애인 네 사람이 그 늦은 시간에 돈을 내고 무엇인가를 먹기 위해 자기 가게에 온 것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44쪽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 말은 어머니에게 위로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희망이 될 수는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71쪽
이런 식으로 특별한 날 일회적으로 행해지는 봉사활동은 누군가에게 시의적절한 도움으로 이어지기기가 쉽지 않다. 봉사자들이 찾아오는 바로 그날에 맞춰 필요한 도움이 언제나 대기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종종 봉사자들의 마음에 훈훈함을 담아주기 위해 우리 같은 '봉사를 받는 사람들'이 의무를 지기도 한다. 나는 이날도 내게 주어진 의무(사회를 정화하고 훈훈함을 불어넣어 우리 기업의 경쟁력을 향상시킬 의무)를 충실히 따라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내용을 찾아내 학습 도움을 받았다.

72쪽
그녀가 나를 특별한 존재로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진정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132쪽
서로 완전히 다르지 않기 때문에 단순히 상대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며, 서로 동일하지도 않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공유하고 공감하기만 하는 것도 아니었다.

133쪽
무엇보다 나는 장애를 이해한다는 것이 반드시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와 지식을 몸에 익히거나 종교적 신념에서 비롯한 헌신과 배려에 기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 어떤 사람들은 별다른 교육을 받지 않아도, 세상에 대해 특별히 이타적이거나 헌신적으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자신과 다른 존재들이 함께 만들어갈 새로운 관계, 새로운 삶의 방식, 새로운 가치를 찾아내는 데 능숙하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일수록 강력한 신념을 갖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149쪽
장애인에게는 지하철 요금이 무료다. 그러나 장애인은 지하철을 탈 수 없다. 지하철은 '대중' 교통수단이지만 장애인은 대중이 아니다.

152쪽
장애인 운동을 이끌고 있는 대표적인 리더이자 지체장애인인 박경석은 장애인 이동권 운동 현장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물러서지 맙시다. 지금 여기서 물러서면 또 집구석에서 수십 년씩 처박혀 살아야 합니다."

153쪽
시민불복종은 사회를 상대로 협상할 어떤 권력도 없는 집단이 선택하는 최후의 방식이다. 이들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으며, (현행법에 의한) 불법 행위에 대한 처벌도 감수한다. 그러나 계속해서 '불법'을 저지른다. 장애인들은 바로 이런 일을 한 것이다.

154쪽
그들은 이렇게 외쳤다. "우리의 몸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사회를 바꾸는 것은 가능하다."
이들은 휠체어를 탄 자신의 모습이 개인의 비극과 책임이라는 시각을 부정했다. 오히려 자기 몸의 특징, 예컨대 휠체어에 앉아 있어야 하거나 수화로 대화를 해야 하는 등의 특징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인식했다. 그것은 피부색이 검다거나 성 정체성이 여성인 것과 같은 맥락이다. 다만 이러한 정체성이 '장애'가 되는 이유는 사회구조가 그 정체성을 제대로 수용할 수 없도록 짜여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55쪽
바로 이러한 시각을 사회학에서는 앞서 소개한 '장애의 의료적 모델'에 대비하여 '장애의 사회적 모델'이라고 일컫는다.
장애의 사회적 모델의 관점을 정당화하는 몇 가지 예가 있다. 먼저 1961년 간행된 <한국장애아동조사보고서>를 보자. 여기서는 장애의 종류를 열다섯 가지로 분류한다. 이에 따르면 장애에는 절단, 마비, 맹인, 농아 등 현재도 장애로 분류되는 유형 이외에 혼혈아와 사생아도 포함되었다.

171쪽
나는 지금도 걷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이 내가 건강을 얻기 위한 투병의 역사에서 실패했다는 뜻은 아니다. 투병의 성공이나 실패는 내가 장애를 극복하거나 내 몸에서 골형성부전증의 병인을 제거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이 상태로 안정적인 균형을 유지하는 성인으로 성장했다. 그러므로 생물학적인 질병 치료와 몸의 치유는 같은 개념이 아니다. 나는 치료되지 못했지만, 치유되었다.

171쪽
우리의 몸은 분명히 우리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장애와 질병을 소거하거나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관점이 비현실적이라는 사실을 깨닫을 필요가 있다.

200쪽
수년 전부터 장애인들은 필연적으로 장애인의 삶을 구속할 수밖에 없는 시설 위주의 장애인 정책을 지속적으로 비판하고, '자립생활운동independence living movement'을 추구해왔다. 자립생활운동은 수용시설의 인권침해와 전문가들에 의존한 수동적인 삶을 비판하며 장애인들이 지역사회에서 살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운동이다.

203쪽
지하철역 계단에는 휠체어 리프트라는 기계가 설치되어 있다. 이 기계는 중학교 1학년 음악교과서에 나오는 <즐거운 나의 집>을 배경음악으로 초속 3센티미터 정도의 속력으로 이동한다. 누군가가 "사람들의 시선을 이겨내는 훈련을 하고 싶다"라고 한다면, 나는 지체 없이 이 기계를 체험해보라고 추천할 것이다. 아, 이 기계에서는 추락 사고도 자주 일어나 몇 명의 장애인이 다치거나 숨졌다는 점을 밝혀둔다. 아마 보험이 필요할 것이다(보험료는 매우 고액일 것이다).

214쪽
요컨대 정상은 비정상 없이 성립될 수 없다. 장애인 없이는 '건강한 몸'인 자신을 확인 받을 길이 없다. 그래서 오늘도 많은 장애인이 이곳저곳에서 전시되고 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눈물을 훔친다. 따가운 시선과 동정심 가득한 눈물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둘은 사실상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이러한 가운데 두 세계는 점점 더 멀어진다. 한쪽에서 법전을 들고 서 있는 내 친구와 다른 쪽에서 돈을 구걸하는 장애인은 서로에게 아무런 적대감을 갖고 있지 않지만 이렇게 차츰 하나의 세계를 살아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242쪽
나는 내 몸에 가해지는 사회적 차별에 대해서는 충분히 뜨거울 수 있었고, 그에 저항하는 '장애인권연대사업팀'의 팀원이었다. 그러나 내 몸과 내 몸의 욕망에 대해서는 결코 뜨거운 존재가 되지 못했다. 내가 쓸 수 있는 전략은 '쿨함'밖에 없었다.

257쪽
눈에 보이는 실천 없이 신앙이나 마음 수련에만 기대는 태도는 때로 이기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몸을 신에게 맡긴 채 작은 기도원에서, 수용시설에서, 병원에서 개인적 위안을 얻는 사람들은 현재를 살고 미래를 살게 될 평범한 사람들에게 지금보다 더 나은 세계에 대한 구체적인 희망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259쪽
무엇을 욕망하는 것이 자연적 질서에 속하는 이들은 그 욕망을 과감히 억누르고 가치 있는 행위를 할 때 자유로워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욕망하는 것 자체가 자연적 질서에 반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욕망을 과감히 표출하는 것이 곧 세상에서 자유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것이 된다.

276쪽
현실에서 어떤 역할을 실현한다는 것이 정해진 틀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라면, 무대 위에서 어떤 역할을 연기한다는 것은 그것을 맡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창의적으로 적응하면서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는 과정이다. 즉 장애인인 나는 현실에서는 절대로 장군이 될 수 없지만, 연극 속에서는 상상력과 창의적인 연출, 무대 위에서의 협력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어떤 면에서는 장군보다 더 장군다운 장군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286쪽
누구도 어두운 객석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을 때, 몇몇 사람들이 그 어둠 속에서 내 열망을 찾아냈다. 그리고 나에게 기회를 주었다. 이 과정에는 무대의 구조를 새롭게 만들고, 스포트라이트의 방향을 바꾸는 등의 놀라운 움직임이 뒤따랐다. 그들은 내게 무대에 등장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는 걸 일깨웠다. 탁월한 연출자와 좋은 동료를 만나는 것 이외에 무대 자체를 개조해 객석을 아예 무대로 만들 수도 있다. 스포트라이트의 방향을 무대에서 객석으로 돌려버릴 수도 있다. 이제 무대는 단 하나가 아니다. 우리가 빛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이 여기저기서 출몰한다.

303쪽
나의 중첩된 사회적 위치와 정체성은 그 모든 것에 일정한 책임감은 느끼지만 어느 것에도 공감하지 않은 채 서로를 회피하고 있었다. ......
어린 시절 나는 우연히 떠안게 된 삶의 무게를 덜어내기 위해 내 삶에 몰입하지 않는 방법을 선택했다. ......
이런 나에게도 ...... "무대에 올라가, 그게 더 섹시해"라고 말했으며 ......
...... 나는 뛰어난 능력으로 장애를 '극복'한 사람은 아니지만 여러 세계에 정체성을 걸치고 있다. 그것은 때로 나를 분열시키고 삶에 대한 내 책임감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도 하지만, 나는 또한 그 안에서 끊임없이 합당한 방식으로 분노하고 사랑하고 치열하게 삶을 살아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 가운데서 남들이 생각지 못했던 이질적인 것들의 종합과 초월을 경험한다.

314쪽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슈퍼맨 같은 재능을 지녔던 장애인들이 했던 노력보다 2000년대에 아무런 권력도 없는 중증 장애인들이 했던 노력이 훨씬 더 크고 넓은 자유를 만들어냈다.  

314쪽
나는 우리 세대 또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분노'라고 생각한다. ...... 사람들은 보통 분노를 증오와 착각한다. 증오는 타자에 대한 감정적인 혐오이고 복수심이다.
증오는 폭력만을 낳을 뿐 증오하는 주체의 상태를 조금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 분노는 부정의에 대한 합당한 저항이고, 그 저항 속에서 우리 자신의 욕망과 열정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분노하는 삶은 사랑하는 삶만큼이나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확장시킨다. 


[네이버 책] 희망 대신 욕망 - 김원영

 

희망 대신 욕망

누구든 삶에서 자격 없는 인간은 없으며, 누구든 당당히 욕망해도 된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변호사의 첫 책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 2019 개정판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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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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