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인간 - 김기헌.장근영


35쪽
시험은 개개인의 차이를 비교하고, 어떤 대학이나 일자리에 적절한 사람을 선발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된다. 만약 그 시험이 어느 공동체 또는 사회나 국가 단위로 실시된다면, 시험은 잠재적인 적용 대상들에게 전체가 원하는 인재상에 대한 이미지를 전달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즉 시험을 통해 공동체 전체의 가치관이나 평가 기준에 영향을 미치고, 심지어는 새로운 가치관을 형성할 수도 있는 것이다.

36쪽
한 시대가 추구하는 인간상은 그 시대가 채택한 시험으로 드러난다.

43쪽
표준화된 시험의 점수는 화폐와 비슷하다. 물물교환 시대에는 개별 물건이 각각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고, 상황이나 상대방에 따라서 그 가치가 달라졌다. 고유성은 있었지만 합쳐질 수 없었다. 시험이 없던 시절의 개인 평가도 그랬다. A라는 사람에 대해 누구는 좋게 평가하고 누구는 불만을 가질 수 있었다. 상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개인에 대한 평가가 달랐다. 또한 한 개인의 능력은 주제나 영역에 따라 달랐고, 이를 합산하거나 비교하기는 어려웠다. ...... 그리고 시험의 명쾌한 환산 능력을 한번 맛본 사람은, 다른 인간성에 대한 복잡한 문제들도 시험을 통해 간단한 숫자로 환산하려고 노력하거나 환산할 수 있기를 기대하기 마련이다. 이렇게 우리 사회는 조금씩 시험의 맛에 중독되어 갔다.

64쪽
우리가 일회성의 고부담 시험 앞에서 어떤 배신을 해왔던가? 사교육 자체가 배신이다. 배신이 너무 만연되어 배신임을 자각하지 못할 뿐이다. 공교육 시스템은 원래 모든 학생들이 동일한 상태에서 교육을 받는다는 전제 아래 설계되었다. 이런 전제가 유지되어야 학생들의 학업성취도를 보고 그의 잠재력을 평가할 수 있다. 또 시험 결과를 학생이 학교에서 배우고 집에서 숙제를 하며 익힌 지식과 기술의 결과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어떤 학생이 과외를 통해 그 학기에 배울 내용을 미리 공부하고 학교에 온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당연히 나머지 학생들보다 시험성적에서 훨씬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된다. 원래 능력보다 더 우수한 결과를 얻을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학생들이 이 학생의 배신을 알아차렸다. 이 배신에는 특별히 보복할 수단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까? 이제 모든 학생이 과외로 미리 한 학기 앞서 공부를 하고, 그러면 처음 배신한 학생의 이점이 사라진다. 그다음부터 악순환이 시작된다. 배신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더 강력하게 배신한다.

94쪽
오랫동안 늘 겪어온 도구이기에 지겹고 힘들지라도 또 그것만 한 게 없다고 여긴다. 국가에서 사법고시제도를 폐지하려고 했을 때 일어났던 사회 전반의 반발을 생각해보자.
사법고시는 과거시험의 전통을 잇는 가장 대표적인 국가 임용시험이었다. 그리고 고졸 학력으로 사법고시에 합격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례가 보여주듯, 가정 형편상 대학에 입학할 수 없었던 인재들이 아무런 학력 차별을 받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능력만으로 등용될 수 있는 시험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 사법고시는 오랫동안 이른바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있게 해주는' 통로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게 공정하지 않다.

96쪽
국가에서 인정하고, 누구나 참여 가능하고, 내가 나름 좋은 경험을 한 적도 많고, 그 결과가 확실히 보장되는 것이 시험이다. 당연히 별 의문 없이 시험이라는 제도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시험은 처음부터 가혹하지는 않았다. 대부분은 시험을 통해서 선택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유치원이든 초등학교 1학년이든 우리가 접한 첫 시험은 대개 호의적이었다. 어린아이에게는 미지의 가능성이 많이 남아 있기에, 교사는 시험의 결과 중 긍정적인 면을 중심으로 부모에게 설명을 해주기 마련이다. 그러다가 조금씩 시험에서 기대한 결과가 나오지 않기 시작한다. 그건 시험 잘못이 아니라, 내 탓이었다. 내가 불성실했고,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어쩌면 무능했기에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원래 시험은 내 편이었는데, 내가 잘못해서 이렇게 된 것이다. 시험 앞에서 우리는 미안해진다. 시험과 결별하기보다는 '다음에는 좀 더 잘해야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갈수록 시험은 어려워지고 실패의 경험이 늘어난다. 그래도 우리는 포기하지 못한다.
이렇게 시험에 실패할수록 더 시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 '자기정당화'의 과정이다. 자기정당화는 어떤 대상에 투입한 자원이 많을수록 그에 비례해서 대상의 가치를 과대평가하게 되는 심리다. 시험이 어려울수록, 시험에 실패할수록 그 시험을 통과함으로써 얻어낼 수 있는 기회의 가치는 더 커 보인다. 나중에는 이 시험에 통과하지 않으면 인생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는 이후 차별의 심리적 기제로도 작동한다.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자들과 통과한 자들의 차이를 실제보다 훨씬 과장하려 든다.

98쪽
매몰비용의 오류

98쪽
터널비전

99쪽
집단사고

104쪽
우리는 왜 대기업에 더 많은 특혜가 주어져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대기업 직원들이 중소기업 직원들보다 더 많은 급여를 받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길까? 대기업은 수많은 입사지원자가 합격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한 곳이다. 경쟁률이 어마어마한 시험을 통과한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특별한 곳이 대기업이다. ...... 시험 자체가 특혜를 정당화한다. 

114쪽
시험은 개인의 잠재력을 측정하고, 특정한 교육과정이 개개인에게 미친 효과를 측정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시험은 한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었다. 하지만 유치원에 들어갈 때부터 시험을 봐야 하는 세상, 인생의 중요한 길목마다 시험을 통해 자신이 어떤 길을 선택할 자격이 있는지를 평가받는 세상에서 청소년기까지 보내게 되면, 시험을 세상의 원리로 여기기 시작한다. 시험이라는 제도가 한 인간의 가치체계의 바탕을 이루어 내면화된다. 그리고 그다음, 우리는 차별을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한다.
...... 누군가 열악한 환경에서 부당한 처우를 받으며 일하는 건 그가 공부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더운 곳에서 일하게 내버려두는 세상은 당연해진다.

119쪽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구직 안내책자는 리처드 넬슨 볼스(Richard Nelson Bolles)가 쓴 <당신의 파라슈트는 어떤 색깔입니까?>이다. 이 책에 따르면 실제로 미국이나 유럽 대부분의 조직에서 직원을 채용할 때 제일 먼저 인턴 같은 비정규 직원을 후보로 삼는다. 도의적인 책임의식 때문이 아니다. 이미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사람들이므로, 업무 수행능력과 적성, 조직에 대한 충성심이나 인성에 대한 정보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시험으로 얻는 정보보다 더 정확하기 때문에 이들 중에서 채용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방법이다.

123쪽
이경규는 아마도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성공한 연예인이지만, 그는 방송 이외에도 또 다른 분야에서 큰 발자취를 남겼다. 바로 음식사업 분야다. ...... 만약 그가 음식에 관한 일을 시작하기 전에 조리사 자격증시험을 먼저 본 뒤 그 결과를 바탕으로 자신이 음식을 만들 자격이 있는지를 평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음식에 관한 어떤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144쪽
서열주의는 <신분의 종말>의 저자인 로버트 풀러(Robert Fuller)가 제시한 개념이다. 서열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특별한 자', 즉 썸바디(somebody)와 '아무것도 아닌 자', 즉 노바디(nobody)로 구별하게 유도한다. 그러고는 특별한 자들이 아무것도 아닌 자에게 우선하는 권력을 행사하는 걸 당연하다고 가르친다. 이런 서열주의는 특별한 자가 되기 위해 엄청난 비용을 치르게 만들고, 일단 차지한 자리를 지키기 위해 진입 비용을 정당화하는 악순환으로 이끈다. 특별한 집단이 특별한 이유는 그 집단에 들어가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노력, 비용을 들여야 하기 때문이라는 식이다. 결국 그 집단이 특별한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으면서, 특별대우를 정당화하기만 한다.

175쪽
시험이 교육을 집어삼켜서 위에서 말하듯, '교육을 잘하기 위한 시험이 아니라 시험을 잘 보기 위한 교육'이 되어버리고, '시험점수를 높이는 수업'을 통해 '시험선수'들을 배출하는 교육이 되어버린 현상, 그리고 이를 당연하게 여기는 세상. 당연한 정도를 넘어서 더 심각한 시험선수를 만들어내려고 이를 이른바 경쟁력의 강화라고 착각하게 되어버린 한국 사회에 경고하려는 것이다.

199쪽
이렇게 시험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삶의 다른 영역에서도 복종하기에 매우 적당한 시스템이다. ...... 이렇게 시험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삶의 다른 영역에서도 복종할 시험문제들을 발견한다. ...... 그런 삶의 전과는 대개 '처세술' 또는 '매뉴얼'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 공략법은 동조, 순종의 틀로 사람들을 얽매기 시작한다. 공략법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온갖 형태의 압박이 가해진다. 한국 사회에선 대학에 입학해야 할 나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결혼해야 할 나이, ...... 모두 순종의 결과다.

205쪽
시험 훈련의 다른 문제는 비판적인 사고력을 키울 기회가 줄어든다는 점이다. 비판적 사고는 문제의 정답이 과연 정답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때나 필요한 정신 과정이다. 그런데 수능시험처럼 문제당 30초 이내에 답을 적어 내야 하는 훈련 과정에서 비판적 사고는 방해가 될 뿐이다. ...... 시험이라는 시스템에서 최적의 적응을 하는 방법은 내 주장을 내세우기보다는 정해진 답에 나를 맞추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 이제 자신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도 똑같이 정답에 맞추라고 요구하는 순간 정답은 권력이 된다.

211쪽
정답이 하나라면, 정답을 알고 나면 더 질문할 필요가 없다. 그것으로 끝이다. 승패만 남을 뿐이다. 답을 맞힌 자는 승자, 답을 맞히지 못하면 패자가 된다. 이런 논리에 길들여지면 다른 곳에서도 정답을 찾으려 한다. 모자 쓰기와 바지 입기의 좋은 예와 나쁜 예, 대학 들어가기의 좋은 예와 나쁜 예를 찾는다. 그리도 '다른'을 '틀린'으로 착각하며 그것을 사실로 만들어버린다. '다른' 답을 말한 자는 모두 '틀린' 자, 패배한 자가 되는 것이다. 

 

[네이버책] 시험인간

 

시험인간

당신은 몇 등급의 인간입니까?사회학자×심리학자, 시험중독에 빠진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진단하다!한국의 시험은 단순히 자기 능력을 측정하고 학습의 방향을 정하는 ‘수단’이 아니다. 영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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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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