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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뜻과 인간의 해석

 

쟁점 또는 정곡

 

영화 <밀양>과 함께 기독교의 문제점을 짚어 봤다. 한때 기독교인이었던 나는, 내가 취한 단어들이 얼마나 기독교인들의 감정을 자극할지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를 비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참과 거짓에 대한, 진정한 교리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싶어서다. 내가 가진 '기독교에 대한 비판 의식'은 엄밀히 말해 '한국 개신교의 일부 기득권층에 대한 비판 의식'이다. 너도 나도 앞뒤 가리지 않고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불쾌해 할 필요가 없다.

 

보통 '정치가 썩었다'고 표현한다. '정치' 자체를 부정하는 말이 아니다. '일부 정치인'들의 비리를 탓하는 말이다. 올바른 정치인은 이 말에 분개할 이유가 없다. 주어진 자리에서 더 반듯하게 자기 일을 해 나가면 된다. 개신교의 교리를 있는 그대로, 더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목적으로 해석하고 전달하는 기독교인은 기독교에 대한 비판에 '분개'하지 않는다. 부끄럽고 안타까운 마음에 더 잘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 불쾌한가? 그럼 당신은 둘 중 하나다. '쟁점을 파악하지 못한 무식쟁이'거나 '정곡을 찔린 개독교인'이거나.

 

영화의 원작은 이청준의 소설 <밀양: 벌레 이야기>. '신에게 빼앗긴 용서의 권리(가해자에 대한 용서의 권리를 신으로부터 박탈 당했을 때, 피해자가 느끼는 무력감과 가치관의 혼란)'. 저자가 던지는 담론의 주제다. '절대적 가치의 주체'인 신과 '피해를 입은 당사자'인 인간 사이에 갈등의 요소가 있다고 본 것이다. 영화는 직접 시나리오를 쓴 이창동 감독의 손을 거쳐 상당 부분 재창조되었다. 나는 영화를 통해 다른 접근을 시도한다. 갈등의 주체를 신과 인간이 아닌, 인간과 인간으로 보자. 양자는 '종교인' '피해자'로 대치된다. 비판의 대상이 '기독교' 자체가 아닌 '한국 개신교의 일부 기득권자들'임을 생각할 때, 충분히 따져 볼 만한 가치가 있다.

 

용서 받지 못한 자 

 

종종 도마 위에 오르는 '기독교'의 실체는 대부분 '대형 교회 목회자들'이다. 이들의 행태를 문제 삼는 이유는, 개인의 오류로 보기에는 그 영향력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그들이 전파하는 '왜곡된 교리' '삐뚤어진 신도'를 낳는 심각한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논란의 대상이 되는 이유 역시 이 때문이다. 신애가 배신감에 치를 떨던 순간을 떠올려 보자. 용서하기로 마음을 먹고 범인을 찾아간 신애. 신으로부터 벌써 용서를 받았다고 말하는 범인. 신은 정말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용서한 걸까?

 

신의 용서. 어떻게 증명할 수 있으며, 또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정작 신은 그를 용서한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을 받았다는 가해자의 말은 어디까지나 그놈 생각일 뿐이다. 그가 교도소 안에서 만났다는 '하나님''그만의 하나님'일 뿐이다. 스스로를 용서한 '자신의 뜻' '하나님의 뜻'으로 착각한 것이다. 실제 교회에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하나님은 모든 이를 용서한다고. 그렇게 위대하고 고매하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왜곡된 교리는 교회 밖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무수한 가해자의 '자기 합리화' 수단으로 전락하기 딱 좋다.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특별히 더 선하다는 인식은 사라진 지 오래다. 오히려 더 무섭다고들 말한다. 이유는 역시 성경 해석에 있다. 부족하기에 매일매일 죄를 짓고 산다는 인간. 6일 간 지은 죄를 7일째 되는 날 하나님 앞에 나와 참회의 기도를 드리면, 싹 다 용서해 주신다는 너그러운 하나님. 너무 너그러워서 교인들은 면죄부를 얻었다. 주일에 출석하고 헌금하면 만사 오케이다. 천국 가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참과 거짓, 진리와 비리가 아닌 '교회 출석' '헌금'을 믿음의 척도로 선전한 탓이다.

 

안타깝게도 신애는 놈이 지껄이는 대로 믿어 버렸다. 역시 교회 탓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는 주장. 하나님이 용서했으면 상황 종료인 셈이다. 인간은 너무나 하찮은 존재라는 주장. 어떤 피해를 입었든지 간에 하찮은 나 따위에겐 용서를 하고 말고 할 권한 자체가 없다는 얘기다. 하나님만이 전지전능하고 완벽한 존재라는 주장. 하늘에서 모든 걸 내려다보고 있기 때문에 공정하고 정확한 심판만을 내리신다는 뜻이다. 결국 아들을 죽인 살인자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를 미워할 수도 없다. 상황은 종료돼 버렸고, 나는 자격도 없으며, 하나님의 용서는 정당하기 때문이다. 치명적인 오류다.

 

용서 받은 자

 

신의 용서는 자의로 해석할 사안이 아니다. 가능성을 열어 둘 필요가 있다. 신이 그를 용서한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때도 주체는 인간 대 인간이다. 신으로부터 용서 받은 그놈. 놈이 설령 교도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고 해도, 그는 피해자인 신애를 그렇게 맞아선 안 됐다. 반질반질한 얼굴로 이미 용서 받았다며 뻐길 게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고 보니 그가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 깨달았다며 신애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재차 구해야 했다.

 

교회 밖까지 퍼지는 목회자들의 목소리가 오류의 단초가 되었음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너그러움'만 떠들어 대지 말자. 하나님의 '정의'도 함께 가르치자. 죄 지은 자들이 '성경과 기도, 출석과 헌금만으로' 용서 받을 수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지 말자. '끊임없이 뉘우치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전하자. 구원을 받은 자는 '높은' 사람이 아닌 '낮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걸 일깨우자. 종교란 모름지기 사회악을 근절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사회악의 면죄부로 전락한 종교는 더 이상 종교도 뭣도 아니다. 목회자는 '신도 늘리기'보다 '밝은 세상 만들기'가 제 역할임을 바로 알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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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메시지 MONZAQ

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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