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 김영민


15쪽
생각이 죽어 묻히는 자리는 어디인가? 생각의 무덤을 우리는 텍스트text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텍스트가 죽어 묻히는 자리는 어디인가? 텍스트의 무덤을 우리는 콘텍스트context라고 부른다. 콘텍스트란 어떤 텍스트를 그 일부로 포함하되, 그 일부를 넘어서 있는 상대적으로 넓고 깊은 의미의 공간이다. 죽은 생각이 텍스트에서 부활하는 모습을 보려면 콘텍스트를 찾아야 한다. ...... 생각의 시체가 주는 이 서먹함을 즐기기 위해서는 서둘러 고전의 메시지라는 목적지에 도달하려고 들지 말고, 그 목적지에 이르는 콘텍스트의 경관을 꼼꼼히 감상해야 한다. ...... 고전 텍스트를 읽음을 통해서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은, 텍스트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삶과 세계는 텍스트다.​ 

27쪽
어떤 사안에 대한 집요한 침묵이 있었다고 할 때, 혹은 발화가 예상되는 지점임에도 불구하고 침묵이 흘렀다고 할 때, 그 침묵은 단순한 발화의 휴지기가 아니라 그 자체로 심각한 해석을 요청하는 심오한 '발화'가 되는 것이다. 

45쪽
우리가 대하는 텍스트들 중에서 편집자의 손길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거의 없다. 

48쪽
레오 스트라우스의 비판자인 퀜틴 스키너는 텍스트에 일관성이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자체가 일종의 강박관념이자 신화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퀜틴 스키너의 취지는 독자들이 존재하지도 않는 일관성을 억지로 재구성하려는 데서 오는 왜곡을 경계하고자 한 것이리라. 

69쪽
어떤 사상가를 혜성처럼 나타난 성인으로 간주하거나 혹은 악의 근원처럼 간주하다 보면, 자칫 사상을 둘러싼 역사적 환경에 눈감게 된다. 그러다 보면, 그 사상은 자신이 발견하고 싶은 것만 발견하게 만드는 도구로 전락할 뿐이다. ...... 이렇게 해서 드러난 춘추시대의 모습은 <논어>에서 드러난 공자의 입장 역시 당대의 산물임을 보여준다. 

94쪽
<논어>에 따르면, 모든 이로부터 사랑받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모든 이들이 좋은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차라리 좋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나쁜 사람이 미워하는 것이 낫다. 제대로 된 사람은 나쁜 사람을 미워할 뿐 아니라, 나쁜 사람으로부터 미움을 받기 마련이다. 

95쪽
공자는 인(仁)한 사람은 호오好惡와 무관하거나, 혹은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고 좋아만 할 것이라는 통념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인한 사람은 좋아하는 일의 전문가인 만큼이나 미워하는 일의 전문가이다. ...... 인한 사람은 단순히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필요 이상의 폭력은 행사하지 않지만, 필요하다면 전쟁마저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다. 

109쪽
1987년 1월 대학생 박종철은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연행된다. 취조관들은 박종철에게 수배 중인 운동권 선배 박종운의 행방을 캐묻는다. 선배의 행방을 끝내 말하지 않던 박종철은 구타와 물고문으로 비극적인 사망에 이르고 만다. 그러자 당시 정부는 그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발표한다.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 그 불합리한 해명을 들은 시민들은 분노했고, 민주항쟁이 전국적으로 타올랐으며, 집권 세력은 6.29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을 약속한다. 

114쪽
<논어>의 이 구절에 대한 오규 소라이의 해석에 따르면, 활쏘기란 누가 과녁을 잘 맞혔느냐, 혹은 누가 많이 쏘아 잡았느냐의 경쟁이 아니라, 누가 활 쏘는 과정에서 예를 더 잘 구현했는가의 경쟁일 뿐이다. 과녁의 명중 여부가 아니라, 누구의 용모와 동작이 더 우아했는가가 중요하다. 그런 경쟁이라야 군자답다고 할 수 있다. 

188쪽
<논어> '자로' 편에서 공자는 말한다. "자신이 바르면,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행해질 것이고, 자신이 바르지 않으면, 명령을 내려도 따르지 않을 것이다." ......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이 바른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190쪽
훌륭한 덕을 가진 군주라고 한들 정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되는 것일까? ...... "자신을 공순히 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고, 바른 방향(군주의 경우, 남쪽)을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무위란 상대적인 침묵일 뿐, 강제적이고 과장되고 폭력적인 행동이 아닐 뿐, 행동의 완전한 침묵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213쪽
자신의 거친 피부를 그대로 보고하는 것이 졸업 사진의 목적이 아니듯이, 주나라 문화를 실증적으로 보고하는 것이 공자의 목적은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후대의 모범이 될 만한 모델을 주나라 문화라는 이름으로 재현할 것인가가 공자의 목적이었다. ...... 재현은 실증이 아니다. 재현은 드러내는 동시에 감춘다. 

220쪽
재현이란 어떤 대상이 부재하다는 전제 속에서 그 대상의 대체물을 제시present하는 것임을 기억한다면, 이런 모사의 강박에서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즉 재현 행위는 해당 대상을 그대로 구현할 수 없음을 인정한 상태에서 그 대상을 '대신'하고자 하는 것이다. ...... 영정 사진이 얼마나 훌륭한지는, 그 영정 사진이 망자의 검버섯 하나하나를 얼마나 핍진하게 보여주고 있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망자에 '대하여' 얼마나 잘 이야기해주고 있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 대의정치는 민의에 기반해야 하지만, 민의를 그저 모사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264쪽
일단 유교는 현대 한국 혹은 동아시아를 정교하게 설명할 능력은 없지만 그래도 기를 쓰고 설명하고 싶을 때 유용하다. ...... 실로 유교라는 단어가 없었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 자칫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킬 뻔했으니까. ...... 하나의 단어가 너무 많은 것을 의미할 때, 그 단어는 유용한 동시에 무용하다. 결국 '유교'라는 말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도대체 모르게 되어버리는 상황에 이르고 마는 것이다. 

268쪽
과거의 특정 문화, 전통, 혹은 텍스트를 너무 성급하게 혐오하면, 그 혐오로 인해 그 혐오의 대상을 냉정하게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결국 그 대상을 정교하게 혐오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마찬가지로 특정 문화를 너무 성급하게 애호하면, 그 애호로 인해 그 애호의 대상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그 대상을 정교하게 애호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성급한 혐오와 애호 양자로부터 거리를 둔 어떤 지점에 설 때야 비로소 자신이 다루고자 하는 대상의 핵심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272쪽
무턱대고 살아있는 고전의 지혜 같은 것은 없다. 고전의 지혜가 살아있게 된다면, 그것은 고전 자체의 신비한 힘 때문이라기보다는, 텍스트를 공들여 읽고 스스로 생각한 독자 덕분이다. 이 점을 확실히 할 때에야 비로소 <논어>는 독자에게 양질의 지적 자극을 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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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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