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 최은영


​31쪽
그녀는 어떤 사안에 대한 자기 입장이 없다는 건, 그것이 자기 일이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건 그저 무관심일 뿐이고, 더 나쁘게 말해서 기득권에 대한 능동적인 순종일 뿐이라고, 글쓰기는 의심하지 않는 순응주의와는 반대되는 행위라고 말했다. 

33쪽
나는 아직도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을 기억한다. 기억하는 일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자신의 영혼을 증명하는 행동이라는 말을. 

52쪽
당신은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한번 읽고 나면 읽기 전의 자신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글을, 그 누구도 논리로 반박할 수 없는 단단하고 강한 글을, 첫번째 문장이라는 벽을 부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글을, 그래서 이미 쓴 문장이 앞으로 올 문장의 벽이 될 수 없는 글을, 언제나 마음 깊은 곳에 잠겨 있는 당신의 느낌과 생각을 언어로 변화시켜 누군가와 이어질 수 있는 글을. 

59쪽
그녀는 타인의 상처에 대해 깊이 공감했고, 상처의 조건에 대한 직관을 지니고 있었다. 글쓰기에서는 빛날 수 있으나 삶에서는 쓸모없고 도리어 해가 되는 재능이었다. 

75쪽
글쓰는 일이 쉬웠다면, 타고난 재주가 있어 공들이지 않고도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당신은 쉽게 흥미를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어렵고, 괴롭고, 지치고, 부끄러워 때때로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밖에 느낄 수 없는 일,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게 하는 것 또한 글쓰기라는 사실에 당신은 마음을 빼앗겼다. 글쓰기로 자기 한계를 인지하면서도 다시 글을 써 그 한계를 조금이나마 넘을 수 있다는 행복, 당신은 그것을 알기 전의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115쪽
그녀는 다희에게 서운함을 느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서운하다는 감정에는 폭력적인 데가 있었으니까. 넌 내 뜻대로 반응해야 해, 라는 마음. 서운함은 원망보다는 옅고 미움보다는 직접적이지 않지만, 그런 감정들과 아주 가까이 붙어 있었다. 

116쪽
가끔은 제가 커다란 스노볼 위를 기어다니는 달팽이 같아요. 스노볼 안에는 예쁜 집도 있고, 웃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선물 꾸러미도 있고, 다들 행복해 보이는데 저는 그걸 계속 바라보면서 들어가지는 못해요. 들어갈 방법도 없는 것 같고. 

118쪽
아, 다희씨 없는 데서 다희씨 이야기하고 싶진 않은데요. 그렇게 말하면 따라붙을 질문이 귀찮고, 어색해질 공기가 두려워 그렇게 말하지 못했던 것이었으니까. 

119쪽
애정이 상처로 돌아올 때 사람은 상대에게 따져 묻곤 하니까. 그러나 어떤 기대도, 미련도 없는 사람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마음을 걸어 잠근다. 

139쪽
참는 건 내 생존 방식이었지. 맞서 싸웠다가 결국 곤란해지는 사람은 내가 될 거라는 걸 알아서이기도 했고, 나를 어떻게 건드리든 반응하지 않고 마치 그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무시하는 것이 자존심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서였던 것 같아. 

224쪽
말도 이모에게서 배웠다. 내가 재밌다, 무섭다, 행복하다, 예쁘다, 나쁘다 같은 언어를 쓰기 시작하기 전에, 그런 관념을 형성한 바탕에는 이모의 세계관과 해석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모가 예쁘다고 말하는 것들의 특징을 내 안에서 관념적으로 구성했고, 이모가 나쁘다고 하는 것들의 특징 또한 그렇게 했다. 그리하여 내가 무섭고 싫고 밉다는 말을 하게 됐을 때, 그 말에는 이모의 삶을 통과한 세계관과 해석이 들어 있었다. 

264쪽
언젠가 이모에게 왜 나를 데리고 옛 일터에 갔었는지 물었다. 그러자 이모는 뜬금없이 내가 웃고 싶지 않을 때 웃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319쪽
부끄러워도 돼요. 기남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한 번도 기대하지 않았던 말.

 

 

# 김포시 시민 독서감상문 공모 선정 도서
# 일반부
# 2024. 2. 19 ~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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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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