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쪽
계약관계상의 지위를 나타내는 '노동자'란 말보다 대상(노동을 하는 자)의 상태(勤, 부지런함)를 포함시킨 '근로자'(勤勞子)라는 단어가 더 익숙한 한국에서 '아기 돼지 삼 형제' 이야기에 거부감을 느낄 사람이 있을까? '근로자'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 공식적으로 '노동자'를 대체한 단어다(박정희 정권은 1963년,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을 통해 기존의 '노동절'이라는 명칭을 '근로자의 날'로 수정한다). 왜 그랬을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일반적으로 '근로자'는 말 그대로 '근명 성실하게 국가나 회사를 위해 시키는 대로 순종적으로 일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풍긴다. 또한 실제로도 그 틀에 맞추어 당사자들을 행동하게끔 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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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이란 말은 왠지 부정적인 이미지가 짙다. 학습의 결과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북한을 연상케 한다는 거다. 기똥차게 이렇게 또 엮었다. 다른 하나는 '노동'으로 만든 많은 단어들이 부정적인 이미지를 풍기기 때문이다. 중노동, 막노동, 단순노동, 육체노동, 강제노동, 감정노동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냥 노동자다!

 



208쪽
상대적으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꺼리지 않는다. 프랑스에서는 어릴 때부터 '시민교육'을 필수 교과로 공부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세계화의 이면에 존재하는 비인간적 노동환경을 소개하고 중학교 때는 급여명세서를 꼼꼼하게 이해시켜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유도한다. 공장 폐쇄에 맞선 노동조합의 사례도 한국처럼 '강성노조' 이미지로 포장되지 않는다. 오히려 '노조가 어떻게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는지'를 교육한다. 고등학교 과정에서도 '노동의 유연성'에 대한 논쟁을 '기업의 생산성 증가'가 아니라 '노동자의 권리 침해'라는 시각에서 토론하게 만든다. 영국도 정규 교과과정에서 노동에 대한 개인의 권리를 가르치고 독일에서는 모의 단체교섭을 초등학교 때부터 경험해해본다.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직시해야 개인의 권리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체득하기 위해서다.

 

144쪽
자본주의라서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다. 영국에서는 노동자가 사망할 경우, 기업주와 감독관을 과실치사 혐의로 처벌할 수 있는 '기업과실치사 및 기업살인범'(Corporate Manslaughter and Corporate Homicide Act)이 적용된다. 안전에 대한 부주의한 관리를 '과실치사'로 본다는 뜻이다. (...) 이런 법들이 여러 나라에 있다. '같은' 자본주의라도 경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내실은 완전히 다른 셈이다.



249쪽
정치적으로 정당성이 없는 박정희 정권이 이를 뒤엎을 수 있는 카드는 '경제성장'뿐이었다. 다른 나라가 200년에 걸쳐서 한 일을 단기간에 가시적으로 이뤄내기 위해서는 그저 '성실한 사람' 정도로는 불가능했다. '전사'가 필요했다. 시키는 것은 반드시 다 하고, 시키지 않은 것도 찾아서 할 사람, 그리고 이런 고생을 고생이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 말이다. 그러니 고등학생들을 군인 정신으로 무장시킨다. 졸업과 동시에 훌륭한 '산업전사'가 되어야 하기 떄문이다. 그렇기에 일상은 병영화되어야 한다. (...) 군대가 아닌 곳에까지 '군인정신'이 침투하니, 한국에서는 "여기가 군대야?"라고 물을 만한 상황이 무수히 발생한다.


98쪽
정조는 무더울 때는 더위를 물리쳐주고, 추울 때는 추위를 가시게 하고, 밥 먹을 때는 소화를 도와주고, 변을 볼 때는 악취를 막아주고, 시를 읊거나 문장을 지을 때는 영감을 일으켜주고, 남들과 대화를 나눌 때에는 말문을 틔워주고, 조용히 앉아 있을 때는 고독을 달래준다면서 담배의 유익함을 역설했다. 심지어 정조는 개인 취향이 지나쳐서 모든 백성들이 담배를 피우게 할 대책을 제시하라는 황당한 문제('남령초 책문')를 신하들에게 출제하기도 했다.
<문화일보>, 장은수, "담배 도입 초기부터 '금지 vs 예찬' 격론 있었다", 2015.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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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다르다. 다름은 재미지다. 한 시공간 안에서의 다름도, 다른 시대, 다른 공간에서 발견되는 다름도. 부디 다름을 즐기자. 다름의 반대는 조화나 화합이 아니라 '획일적', '천편일률'이다. 



110쪽
동성애에 대한 차별의 역사가 무구하다는 뜻은 그렇게 박해를 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방증한다.
어느 사회에나 동성애자는 이미 '왼손잡이'처럼 특정 비율로 존재한다(통계상 동성애자의 비율은 9~11% 사이이다. 이는 왼손잡이 비율과 비슷하거나 조금 높은 수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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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자의 비율이 이리 높은지 지금에야 알았다. 따로 찾아보진 않았어도 0.1 내지는 1%쯤일 거라 무식하게 생각해왔다. 이렇게나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데 그렇게나 무자비하게 대하다니 더 어이가 없다. 사실 비율이 뭐 그리 중요할까. 작가 역시 늘 일정 비율로 있어 왔다는 점을 강조한다. 비난하고 무시한다고 줄지 않으며 존중하고 인정한다고 늘지 않는다. 쉽다.


121쪽
'다문화'라는 단어 자체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지만 실제로 '다문화 가정'이라는 말에는 사회적 약자라는 의미가 배어 있다. (...) 그러니 한국 여성이 미국 남성과 결혼했거나 혹은 한국 남성이 영국 여성과 결혼해서 아이를 출산한 가정은 '다문화' 가정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우리가 만들어놓은 '다문화'라는 이미지 안에 해당되지 않아서일 게다.


133쪽
그 결과 한국에는 세계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재벌'(財閥)이 존재한다. 재벌은 영어로도 'Chaebol'이다. giant business group(거대 사업집단), financial combine(자본 결합체) 등의 단어만으로는 한국의 '재벌'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여러 개의 계열사를 동시에 보유하고 친인척들이 이를 운영하고 지배권이 초법적인데다 경영권을 자연스럽게 세습하면서 일반적인 민주주의의 가치를 무시하는 형태는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라 해도 당연한 것이 아니다. 한국인들은 재벌이 다른 나라에도 있는 줄 알지만 설마 그러겠는가. 재벌이 영어로도 'Chaebol'인 이유는 한국인들이 자본주의를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 실제론 많은 이들이 경제적인 것만 해결되면 다른 것들은 절로 따라온다고 생각한다. 이 순진한 발상은 오래전부터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그렇기에 "~가 밥 먹여주냐?"는 말을 듣는 게 우리에게는 낯설지 않다. (...) 그런데 먹고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면 관심사가 더 넓어질까? 아니다. 먹고사는 것 다음은 '더' 잘 먹고 잘살겠다는 욕망뿐이다.


206쪽
(...) 그만큼 예술에 대한 시야가 좁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우선 전 세계적인 현상인 상영관의 멀티플렉스 현상이다. 멀티플렉스가 등장해서 상영관 수는 늘었지만, 영화 장르는 '멀티해지지 않는' 역설의 상황에서 관객들의 시야는 좁아진다. 다양한 영화를 '많이' 상영하는 것이 아니라, (...) 흥행할 영화만을 '집중' 상영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익숙해지면 흥행을 보장하는 익숙한 몇 가지 장르 외의 영화를 대하는 것이 낯설어지게 마련이다.

216쪽
한국에서 예술은 스스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각인된 것이다. '저게 왜 예술일까?'라고 질문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저것이 바로 예술이니 눈여겨봐라'고만 가르친다. 예술을 전지전능한 이미지로 기억하는 건 태중에 있을 때부터다. '태교 명화'는 얼핏 아름다워 보이지만, 예술을 순종적으로 인지시키고자 하는 사회적 강박이 그대로 드러나는 거친 단어다. 이후 세상에 태어난 아기는 '명화 퍼즐'부터 '명화와 함께하는 한글(영어) 공부'와 마주한다. (...) 한국에서는 미술관에서 작품들을 '멋대로 해석하라'고 말하는 사람을 살아생전 볼 일이 없다. 


222쪽
송창식의 <왜 불러>는 반말을 한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됐다. 
이장희의 <그건 너>는 남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는 이유에서, 
조영남의 <불 꺼진 창>은 창에 불이 꺼졌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됐다.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는 창법 저속과 불신감 조장이라는 항목으로 금지 조치되고, 
한대수의 <물 좀 주소>는 노래 제목이 물고문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행복의 나라로>는 '그렇다면 지금은 행복의 나라가 아니라는 뜻인가'라는 이유로,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왜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느냐,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강조하면 사회에 우울함과 허무함이 조장된다'라는 이유로, 
정미조의 <불꽃>은 공산주의를 상징한다는 이유로, 
이금희의 <키다리 미스터 킴>은 '단신인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배호의 <0시의 이별>은 통금이 있던 시절 '0시에 이별하면 통행금지 위반이다'라는 이유로 금지됐다.
민은기 엮음, <독재자의 노래: 그들은 어떠게 대중의 눈과 귀를 막았는가> 중 
송화숙의 <박정희, 국가 근대화 프로젝트와 음악>, 271p, 2012, 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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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빵빵 터질 만한 코미디 아닌가. 공유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웃음거리다! 과거의 시사만 웃길까. 지금의 뉴스도 만만치 않다.

235쪽
저널리즘 정신이 사라지니, 뉴스에 '새로운 것들'(new+s)이 존재할 리 없다. 봄이 되면 '날이 따뜻해졌다'를 제일 먼저 보도하고, 여름에는 '열대야가 대단하다'는 소식이 굵직한 시사 이슈보다 먼저 나온다. 토요일에는 나들이 가는 차들이 서울을 빠져나간다고, 일요일에는 그 차들이 다시 돌아오는 걸 취재한다. 동물원의 기린이 새끼를 낳으면 특종이라면서 보도한다. 이런 뉴스를 다루느라 정말로 중요하게 논의되어야 할 사회문제들은 대중의 관심에서 사라진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않기 위한 언론의 태도는 놀라 자빠질 만한 것들을 보도하는 수준에 이르기도 한다. 비 오는 날 잘 팔리는 빵이 무엇인지, 윷놀이에서 '모' 나오게 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뉴스 등은 그 사실 유무를 떠나 '뉴스의 소재'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광고주에게 호감을 얻기 힘드니 한발 더 다가선다. 언론은 비판적 보도를 포기한 걸 넘어, 기업을 숭배하기에 이른다. (...) 원전 회사와 광고를 맺느냐 마느냐가 언론의 생사가 되어버리자 처음에는 '원전'에 관한 비판적 태도를 삼가던 수준의 기사가 '왜 원전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지'를 증명하는 것으로 진화한다. '자체적 규제'가 '능동적 아부'로 발전한다. 한국의 언론이 '삼성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프로필 사진을 교체한 걸 보도하는 지경이다.



252쪽
그러니 성형 열풍은 '자기결정권의 증가'가 아닌 '사회적 예속의 증가'가 원인이다. 만약 자기결정권이 증가되었다면 성형수술도 다양한 개성을 드러내는 형태여야 한다. 과연 그런가? 박노자는 <당신들의 대한민국>에서 이를 '예뻐지고 싶다는 말을 사회과학 쪽으로 해석한다면 서구 중심의 세계 체계와 지역적인 대리인들이 표준으로 삼는 신체 모델에 내 몸을 무조건 맞추려는 체제에 순치된 욕망을 의미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일침을 가한다. '얼굴이 비슷해지는' 사람이 많아지는 상황을 어찌 '자유'의 개념으로 해석할 수 있겠는가. 많은 이들이 '자기만족'이라면서 애써 정당화를 하려고 하지만 거짓말도 이런 거짓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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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카메라 앱이 넘쳐난다. 사람 얼굴을 모두 비슷하게 만들어버리는 신기한 앱들에 손가락을 뻗는 더 신기한 사람들. 주름도 내 것, 지방도 내 것, 뾰루지도 오늘의 내 것인데 말이다.



288쪽
내가 손에 쥐고 있는 기계는 나보다 똑똑해졌다. 검색이 일상화되면서 사색은 아득해진다.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의 상실은 이 부박한 자본주의 시대에 대항할 힘이 없는 부박한 개인들을 양산한다. 사유 능력이 사라진 개인은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를 향해 가는지 자각하기 어렵다."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이라고들 말한다. 그래서 다들 멋지게 살려고 애쓴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그런 우리들에게 작금의 사회 현실은 인생의 승부수를 띄울 절호의 기회다. '멋지게 산다'는 것은 과연 어떤 걸까? 나 스스로가 '인간'임을 자각하고, 인간만이 갖고 있는 이성의 힘을 바탕으로 어떻게든 올바른 사회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 이보다 더 멋진 삶이 있을까?

 

[네이버책] 나는 태어나자마자 속기 시작했다

 

나는 태어나자마자 속기 시작했다

“세상이 이상한 건가, 내가 이상한 건가?” 이상한 세상에 적응이 안 되는 당신을 위한 사회학 특강11년 동안의 대학 사회학 강의를 한 권의 책으로 엮다. 자본주의에 잠식당한 대한민국 20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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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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