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려니 하기엔 너무도 기막힌 지경에 이른 우리 사회를 어쩌면 좋을까? 바꿀 순 있을까? 내가? 없다. 그럼 그냥 살까? 그럴 수도 없다. 그래서 내린 결론. 생각하자! 그럼 적어도 비뚤어진 쪽으로 맥없이 휩쓸리진 않을 테니까. 그리고 이야기하자, 생각하자고. 듣고, 읽고, 생각하고, 말하고, 그리고 중심을 잡자.

 

다음은 진중권의 <폭력과 상스러움>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사형제도

 

동료 인간을 죽여야만 유지되는 우리 사회의 이 잘난 질서. '마이너스 하나'의 안정과 평화. 그런데 우리는 일상적으로 이 잔혹한 살인행위에 가담하면서도 이제는 죄의식마저 느끼지 못한다. 우리 사회에 사형제도가 존재하는 한, 우리 모두는 어떤 비열한 살인의 공범이다.

 

다만 과거에는 폭력이었던 것이 제도로 바뀌었을 때에는 더 이상 폭력으로 느껴지지 않고, 그것이 폭력에 대한 우리의 감성을 무디게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사적 폭력을 통제하는 것은 공적 폭력이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이며, 또 공적 폭력은 그 이유를 들어 자기를 정당화하곤 한다. 공적 폭력이 제도화함으로써 그것의 원초적 폭력성을 감추는 것처럼, 사적폭력 역시 때로는 관습화함으로서 그 폭력적 성격을 감추는 데 성공하기도 한다. 법의 신성함 뒤로 숨든, 관습의 익숨함 뒤로 숨든 어느 경우에나 폭력은 더 이상 폭력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무섭지 않은가?

 

사형제도의 존속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형수 없으면 사회의 질서가 무너질 것이라 본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사형제도 없이도 잘만 유지되는 사회들이 얼마든지 있다. 우리 헌법의 한 축을 이루는 자유주의의 원리는 사회를 '계약'의 산물로 설명하곤 한다. 그런데 '생명' '사회계약'의 대상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국가가 제 아무리 신성해도 살인을 명할 권리는 없다. 때문에 나는 사형이라는 살인행위를 '합법'으로 명시한 이 미련한 계약서에 서명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한다.

 

사대주의

 

한국과 미국이 혈맹이라도, 분명 두 나라는 국익이 다르다. 아무리 북한이 미워도, 우리 국익을 버리고 미국의 이익을 앞세울 수는 없는 일이다. 한국과 일본도 민족적 이해가 다르다. 아무리 북이 미워도, 민족의 이익을 저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북에 대한 증오심에 사로잡혀 미국과 일본 앞에서 국가적 이익과 민족적 이익을 저버리는 것은 신판 사대주의가 아닐 수 없다.

 

신이 자기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듯이 지배계급은 사회의 성원들을 꼭 자기들의 형상대로 찍어내는 것이다.

 

집단이기주의

 

언젠가 베를린 한글학교에서 선생을 할 때의 일이다. 운동회에서 '짝짓기 게임'을하는데, 영 분위기가 썰렁하다. 우리의 아이들과는 달리 독일교포 아이들은 이 재미있는(?) 게임의 규칙에 적응을 하지 못한다. 마지막에 네 명의 아이를 남기고 "!" 이라고외쳤는데, 그 아이들은 하나를 떨궈내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마냥 붙어 있었다. 왜그러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한다. "다 친구인데 누구를 떨궈내요..."

 

짝짓기 게임 역시 극단적인 집단주의와 이기주의의 모순적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게임에서 살아남으려면 항상 어느 집단에 속해야 한다. 하지만 잠시 후에 "!"이라는외침을 들으면 떨어지면 서로 죽을 것같이 붙잡고 있던 집단을 매정하게 버리고 혼자서 자기를 구원할 또 다른 집단을 찾아 떠나야 한다.

 

왜 같은 한국의 아이들인데 독일에서 자란 아이들은 짝짓기를 거북해하고, 여기서 자란 아이들은 그 놀이를 하며 즐거워하는 것일까? 알 수 없다. 분명히 유전자의 차이는 아니다.

 

 

나는 지하철 노동자들의 파업에 반대한다.

나는 지하철 노동자들이 투표를 하는 데 반대한다.

파업과 투표는 헌법이 보장하는 시민의 권리.

 

나는 여성들이 길에서 담배 피우는 데 반대한다.

나는 남성들이 길에서 담배 피우는 데 반대한다.

나는 여성이 자기 성취를 위해 아기를 갖기를 거부하는데 반대한다.

나는 남성이 자기 성취를 위해 아기를 갖기를 거부하는데 반대한다.

인류의 종자를 퍼뜨리는 게 여성의 자기 성취를 접어두어야 할 만큼 신성한 일이라면, 그 일은 또한 남성에게 신성해야 할 터이다.

 

나는 남자다.

나는 당신이 남자라는 데 반대한다.

그 누가 내 존재에 관한 자연적 사실찬반을 표할 권리가 있단 말인가.

나는 이성애자다.

나는 당신이 이성애자라는 사실에 반대한다.

나는 당신이 여성을 사랑하는 데 반대한다.

나는 동성애에 반대한다.

 

남의 인권을 침해하는 어법이 우리 사회에서는 공공연히 통용되고, 하나도 이상하지 않게 여겨진다. 사회 자체가 보수 이데올로기의 마법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는 문법적 착각에서 비롯된 미신이다. 그리고 철학은 오성에 걸린 이 마법과의 투쟁이다.

 

"너는 여자와 교합함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레위기>18:22)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레위기>20:13)

 

동성애를 배척하는 가장 오래된 논증이 바로 이 신학적 논변이다. 하지만 이는 근거를 갖춘 논증이라기보다는 '성서에 동성애가 죄악으로 규정되어 있다'는 데 기초한 일방적 주장일 뿐이다.

 

"육체에 흠 있는 자는 그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려고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라. 무릇 흠이 있는 자는 가까이 못할지니 곧 소경이나 절뚝발이나 코가 불완전한 자나 지체가 더한 자나 발 부러진 자나 손 부러진 자나 곱사등이나 난쟁이나 눈에 백막이 있는 자나 괴혈병이나 버짐이 있는 자나 불알 상한 자나..." (<레위기>21:17~20)

 

한마디로 모든 지체 부자유자는 교회 밖으로 내쳐야한다는 얘기. 과연 이것도 신의 말씀이라고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기독교라는 종교에 이름을 준 예수 그리스도는 장애인의 친구였다. 만약 예수라면 동성애자를 어떻게 대했을까? 그들을 교회 밖으로 내치라고 했을까?

 

참고로, 최근 독일의 헌법재판소는 장애인을 죄인으로 규정하는 교회의 태도가 위헌이라고 판시한 바 있다.

 

만약 한 여자가 다른 여자와 함께, 한 남자가 다른 남자와 더불어 성욕을 충족시킨다면, 이는 인류의 목적에 위배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욕에 관하여 인류의 목적은 종의 보존에 있기 때문이다. …… 하지만 이것을 통해서는 종을 보존할 수가 없다. …… 따라서 그것은 자신을 짐승 아래 놓고 인류를 능욕하는 짓이다. - 이마누엘 칸트 <도덕철학 강의>

 

신의 말씀 때문에 주장하는 신학적 논증과는 달리, '종의 번식'이라는 목적을 근거로 종의 번식이라는 ''의 목적을 곧바로 '개인'의 목적으로 치환하는 오류. 나라는 개인이 인류의 존속이라는 목적을 위해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종의 번식에 복무하지 않는 성행위는 모두 부도덕하다?

 

아무런 근거도 갖추지 못한 감정 덩어리를 우리는 흔히 '편견'이라 부른다. 동성애에 대한 감정이 일종의 취향 판단이라고 한다면, 자기와 다른 취향에 대해서 관용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동성애자는 이성애자를 혐오하지 않는데, 왜이성애자는 동성애자를 혐오하는가?

 

동성애자는 사회의 대부분을 이루는 이성애자와는 다른 존재이다. 이제까지 이 '차이' '차별'의 근거로 사용해왔다, 이제 이 '차이'가 사회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 그 잠재력을 밝여내야 한다.

 

 


폭력과 상스러움 - 진중권의 엑스 리브리스

저자
진중권 지음
출판사
푸른숲 | 2002-04-06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우연히 스크랩한 글 쪼가리들을 뒤적이다가 그 속에서 우리 사회를...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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