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라 마바사

짜장면 시켜달랬는데 짬뽕을 주문하다니요

몽자크 2024. 6. 1. 00:01

중국집에 가면 날씨, 음식점, 타인의 선택 등과는 무관하게 오로지 짜장면 혹은 짬뽕 중 하나를 내리 선택하는 이들이 있다. 취향이 확실한 경우다. 그런가 하면 짜장을 시키면 짬뽕을 탐내고 짬뽕을 시키면 짜장에 입맛다시는 이들도 있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이다. 한편 때에 따라 다른 선택을 하지만 첫 술을 뜰 때부터 가게를 나설 때까지 본인의 선택에 흡족해하며 맛을 만끽하는 이들도 있다. 자연스럽고 무탈해 보인다. 때가 평일 점심시간이라면 위의 다양한 표정은 더욱 도드라진다. 한정된 시간 내에 부여된 소중한 선택권이니까.

 

오늘, 중국집으로 향했다. 유난히 짜장면이 당긴다. 일행에게 '난 짜장면!' 하고 손을 씻으러 갔다. 말끔해진 손, 상쾌해진 기분으로 자리로 돌아와 앉았는데, 일행이 전한다. 내 식사로 짬뽕이 나올 거라고. 그가 내 점심 메뉴로 짬뽕을 주문했다고!

 

우선은 무척 황당하다. 난 짜장을 먹겠다고 분명히 의사를 전했는데 왜 중간에 짬뽕으로 메뉴를 바꿔버린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설명이 필요하다. 납득할 만한 근거를 내놓으시라! 식당 테이블을 뒤엎고 싶지만 공공장소임을 감안하여 최대한 흥분을 가라앉히고 이유를 묻는다. 내 메뉴를 네 마음대로 바꾼 이유가 대관절 무엇이냐고. 너는 설명해야만 한다.

 

당신이 내세울 근거가 무엇이든지 둘 중 하나에 속할 것이다. 나를 미워하거나 혹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은 평소 미워하는 마음에 나를 골탕먹이려는 속셈으로, 혹은 가볍게 장난 삼아 나의 선택과 다른 주문을 넣었을 수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당신은 언제고 나의 부탁 또는 지시를 거스를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미워하는 마음이 작용한 결과다. 이 경우 해결은 쉽다. 진작 알았다면 좋았겠지만 이제라도 알아 다행이라 여기고 돌아서면 그만이다. 괘씸하겠지만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말을 듣는 것보다는 덜 답답할 것이다.

 

사랑 운운하면 골치 아프다. 

 

당신은 얼마 전 이 중국집에 관한 후기를 들었다. 짜장을 먹은 회사 동료가 세 명이나 탈이 났다는 것. 짜장에 넣는 재료의 신선도에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하다는 의심을 강하게 품고 있다. 나를 사랑하는 당신은 내가 그 의심스러운 짜장을 먹게 두고볼 수 없었을 것이다.

 

오늘 날씨가 꽤 쌀쌀하다. 점심으로 뜨끈하고 매콤한 국물을 좀 들이키면 면역력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나를 사랑하는 당신은 나의 건강을 생각하는 마음에 내 의견을 무시하고 짬뽕을 주문했을지 모른다. 

 

흔히 따져보는 가성비를 챙겼을 수도 있다. 그 어떤 메뉴보다 짬뽕에 진심으로 보이는  주방장의 경력, 다른 중국집에 비해 저렴한 짬뽕 가격, 들어가는 재료의 풍성함을 생각하면 더더군다나 칭찬할 만한 가격, 무엇보다 당신의 혀가 기억하는 훌륭한 맛. 상황이 이러할진대 나를 위하는 당신의 마음은 나의 당시 선택쯤이야 거스르는 것이 대수겠나.

 

짜장이 썩었을지 모른다는 염려, 날씨와 몸 상태에 대한 고려, 그저 더 맛있는 메뉴를 먹었으면 하는 배려. 셋 중 어느 경우이든 나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당신은 설명할 수 있고, 또 그게 사실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나는 분이 치밀 수 있다. 짜장에 들어가는 재료가 불량하다는 위험요인이 근거라면, 나보다 당신이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나의 메뉴를 결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이야기다. 오만이다. 날씨와 몸 상태를 들먹이며 메뉴를 강제하는 것 역시, 가성비에 따른 타당한 결정이라는 것 역시 다르지 않다. 내가 가진 정보에는 한계가 있으며 당신이 가진 정보가 질적 양적으로 우월하니, 판단의 주체는 당신이어야 하거니와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따르기만 하면 된다는 의식의 흐름. 

 

니가 뭘 잘 몰라서 그러는데, 다 널 위해서 그러는 건데, 내 말대로만 하면 자다가도 떡이 생길 터인데, 같은 식이다. 이런 발상이 먹히는 관계가 아예 없진 않다. 다만 따로 있을 뿐. 그렇다. 미취학 아동과 부모(보호자)의 관계. 나는 유아식을 만들어달란 적이 없다. 주는 대로 먹을 생각이 없다. 왜 이걸 권했냐며 투덜댈 생각도 없다. 탈이 나든, 맛이 덜하든, 가성비는커녕 어처구니없는 돈지랄이 되어버리든, 내가 선택하고 결과 또한 당연히 내가 감당할 것이다. 사랑이랍시고 마구 들이대면 곤란한다. 

 

나의 분은 단순히 지금 이 자리에서 짜짱 대신 짬뽕을 먹어야 하기 때문이 아니다. 당신이 나를 조금밖에 사랑하지 않기 때문도 아니다. 당신이 강제한 짬뽕이 내가 선택한 짜장보다 얼마나 훌륭한지 열변을 토해봤자 소용이 없다. 핵심이 아니다. 나에 대한 당신의 애정이 얼마나 깊은지도 지금 끼어들 이야기는 못 된다. 사랑이든 배려든 고려든 염려든지 간에 그 따위 타령만 계속한다면 몰이해에 대한 분노만 재차 부추기고 만다. 

 

본인의 우월성을 전제한 애정은 속이 터진다. 사람에 따라 먹는 것은 사소한 문제일 수도, 소중한 일상일 수도 있다. 나는 먹는 데엔 큰 관심이 없어서 알아서 시켜주면 좋던데, 하고 넋놓을 일이 아니다. 속 터지는 애정은 무시로 찾아온다. 옷을 고를 때, 연애 상담을 할 때, 자녀 교육의 우선순위를 결정할 때, 투표할 때 등등. 너를 위해서, 이게 더 좋다는 연구결과가 있으니까, 내가 직접 해보니까, 대세가 이러니까 같은 말들이 붙으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그리고 선택해야 한다. 분노의 포인트를 파악한(파악한 듯 보이는) 상대라면 그 약속을 한두 번 더 믿어보든지, 분노의 핵심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라면 짬뽕이 채 나오기 전에 그러니까 애저녁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대로 안녕을 고하든지. 이 집 짬뽕이 얼마나 맛있는지 한번만 먹어보라며, 먹어보면 네 생각도 바뀔 거라며 제자리를 맴도는 상대와의 동행은 고역이다. 

 

그 국회의장 후보도 잘할 거다, 국회의장을 누가 더 잘해낼지 누가 더 적격인지는 같이 의정활동을 해본 우리가 더 잘 안다, 시어머니는 간섭 말라,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을 수 없다, 같은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심히 답답하다. 혼란은 벌써 2주째. 떨치자. 선택하자! 일어나, 말어?

 

 

 

2024. 05. 29.